2018. 9. 8. 12:5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출가
혜천스님 설법 : 불기 2555년 3월 6일
오늘의 강론 주제는 '출가'입니다. 일전에 어느 분이, 출가를 말씀하시면서 '출가는 속세를 떠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인간이 인간세계를 떠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한 바가 있습니다. 속세를 떠나는 것이 세상과의 결별이라면 어떤 인간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물며 부처님도 인간 세계를 떠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떠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크샤트리아 태생이 칼을 놓고 숲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 숲에서 나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궁금한 대목이기도 했던 부분인데, 왜 부처님은 숲에 들었다가 나왔을까요. 부처님이 연기의 가르침을 깨달았다는 것 말고 진정으로 그 숲에서 나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크샤트리아 전사가 칼을 놓고 숲엘 들어도 인간은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게 아닐까요. 실제로 부처님은 매일 숲에서 나와 한그릇의 밥을 얻어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인간세계를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속세를 떠난다는 것, 떠났다는 것은 현실세계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념, 가상의 세계인 무릉도원이나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현실세계에 살면서 마치 가상세계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실의 세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장미를 장미라 하고, 똥을 똥이라 하는 것입니다. 장미를 똥이라 부른다해서 그것을 한아름 안고 님에게로 뛰어가는 청년의 뜀박질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요. 마찬가지로 똥을 장미라고 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님에게 그것을 안고 달려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붓다를 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에게 드리는 예배와 경의를 막을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가상의 세계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옛날에 성철스님이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법어를 내리는데, '들판에 계시는 부처님, 공장에서 일하는 부처님' 운운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부처님이라고 불럿지만, 이 모든게 가상의 세계이지요. 현실에서는 노동자를 부처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노릇이지요. 공자는 명칭이 사물을 규정한다*1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명칭이 사물을 규정하기 보다는 사물이 명칭을 규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장미와 똥의 이름이 바뀌어도 사물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맞고 있는 사물의 정확한 규정없이 명칭만을 바꾸는 것은 가상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의 강론 주제로 '출가'를 잡은 이유가 이번 주가 붓다의 출가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관념입니다. 부처님조차 인간세계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출가란 '새로운 선택'을 의미합니다. 칼을 놓고 숲으로 들어간 것도 새로운 선택이요 숲에서 나온 것 또한 새로운 선택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선택을 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의도된 선택이기도 합니다. 의도된 선택이 아닌 어쩔수없이 하는 것은 선택할수밖에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상황논리에 따른 선택이기에 불안하고 두려움이 따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왜 새로운 선택을 하는가 하는 것을 알때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도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불안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렇게 출가는 속세를 떠나고 그런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인간세계를 떠나는 것은 아예 숲에서 안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 석두가 보여준 '사벽의 대화'를 봅면 두 도반이 함백산 토굴에서 62년 봄부터 63년 봄까지 수행을 하면서 기록한 것이 나옵니다. 토굴에서 지낸다고 해도 어쨌든 소금과 양식, 옷가지 등을 구해 갖고 돌아가야 합니다. 어쨌든 부처님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스스로 칼을 내려 놓은 결과입니다. 그 시대의 관례로 보자면 패배자와 같습니다. 전사가 아름다울때는 싸울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무사인 사무라이의 가장 치욕적인 죽음은 요위에서 죽는 것이라 합니다. 전장에서 죽지 못하면 스스로 배를 갈라야 명예로운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시대의 도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문은 중궁이나 조선에서의 왕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크샤트리아 전사였고, 언제나 싸움의 일선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칼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선택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에 속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집단에 속하게 되면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도된 선택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가상세계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가상세계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가 있다면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있을 것입니다. 그 영역에서만 존재할뿐, 현실에는 있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신데렐라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담론의 생산자입니다. 그래서 아난다는 붓다에게 '혹시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없는가?'하는 질문을 하기에 이릅니다. 대승경전이나 밀교에서는 문을 닫아 걸고 당사자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구이언(一口二言) 이부지자(二父之子)라, 부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난의 위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아난다여, 나는 감춰두고 가르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이말이 참으로 맘에 듬니다. 적어도 붓다는 사기는 안친다는 것이지요. 당시 인도의 관습으로 스승은 제자에게 다 가르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설화에는 화살 잘 쏘는 스승을 찾아나선 소질있는 제자가 스승을 만나 사사를 받게 되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제자는 나중에 나무뒤에 숨은 원숭이도 활을 휘어가며 맞출수 있는 실력을 갗추게 되고, 그러자 이 제자는 자기가 활의 최고수가 되고 싶어 스승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스승은 날아오는 화살을 이빨로 부는 묘기를 보이며 방비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만은 내가 너에게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공부가 오늘을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고전(읽기)은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사이 불교 지도자인 큰 스님들께서 2,500년 전 붓다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얼마전 화성행 편도 탐사대원을 모집하는데 이만명이 넘게 신청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단지 갈뿐 올 수 없는 조건인데도 많은 사람이 신청을 해서 놀랐다고 합니다. 아마 어디든 가서 돌아올 수 있는 비상한 재주들을 갖고 있나 봅니다. 이처럼 우리는 고전을 읽으며 지식을 쌓을지 몰라도 오늘을 이해하는데는 거의 쓰고 있지 않습니다. 공부하는 것과 고전을 읽는 것의 공통점은 현실 세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상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돌을 차면 발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가상세계에서는 바위가 날라가 버리겠지요. 현실에서는 발이 아픕니다. 그것이 싫어서인지 우리는 그 꿈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세계에 속해 있는한 인간 세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떠난듯이 말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상세계는 명칭이 사물을 규정하는 세계입니다. 똥과 장미가 마구 헛갈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현실에서 이탈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다보니 현실감각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그래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블랙스완이라는 영화를 보면, 선과 순결, 백치미까지 갖추고 있어야 하는 백조가 악과 관능미를 풍기는 흑조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원래는 공주가 마법을 통해 백조로 변하였고, 왕자와 사랑을 해서 다시 공주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왕자가 흑조를 사랑해서 백조가 자살에 이르게 됩니다. 프리마돈나는 현시과 가상의 캐릭터 사이에서 혼동을 겪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렇게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이 숲에서 나온 이유를 이렇게 짐작해 봅니다. 부처님이 가상의 꿈을 안고 숲에서 고행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동료 수행자들에게 존경과 숭앙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처님은 이 모든것을 그만두고 숲을 나와 버립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을 타락하고 변절했다고 손가락질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는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숲에 들어간 것 또한 출가이자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고, 숲에서 나온 것 또한 출가이자 새로운 선택인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의도된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매일 출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두려워 합니다. 우리는 변화하지 말고 유지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떠밀려 선택하게 됩니다. 마치 물위에 떠가는 배처럼 말입니다. 이왕 떠밀릴 것이라면 스스로 뗏목을 끌고 긍정적으로 가야 합니다. 이도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철 스님의 전도된 법어를 알게 됩니다. 똥은 똥일뿐입니다. 가상의 오류일뿐입니다. 노동자가 부처다,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늘 불편한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뺨을 맞으면 아픔니다. 그렇지만, 가상에서 뺨을 맞으면 그 자리에 연꽃이 피어납니다. 출가는 현실을 등지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세계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선택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또 이는 새로운 세상을 갖게 됩니다. 자기 뜻이 의도된 선택이 출가입니다. 이런것이 아닌 떠밀린 선택은 출가가 아닌 가출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늘 세상속에서 항상 출가한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좋은 봄날, 부처님의 출가일을 즈음한 얘기를 마칩니다.
*1 : 명칭이 사물을 규정한다.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논어,편 "이름(名)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하는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 지가 쓰고 지가 못 읽는 이 저능의 존재태가 분명 현실속에 있음을 절감하며, 그냥 분위기만 모사했다고 자위합니다. 늘 좋은 날 되시삼~~~
윤미래 좋은 노래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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