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한암 선사(2)(3)(4)

2018. 10. 13. 11: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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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한암 선사(2)


한때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승려 사토(佐藤泰舞)는 우리 불교계를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한암(漢巖ㆍ1876∼1951) 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한암 선사는 곁에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올렸다.

다시 사토 스님이 물었다.

“스님이 모든 경전과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아 오는 가운데,

어디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한암 선사는 사토 스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참배나 다녀오너라.”

다시 사토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수도하였는데,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모르겠노라.”

이때 사토 스님은 일어나 큰절을 하면서 말했다.

“활구(活句)의 법문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암 선사가 말했다.

“활구라 해버렸으니 이미 사구(死句)가 되고 말았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인가?’라는 사토 스님의 질문에 한암 선사는 무심히 곁에

놓여있던 안경집을 들어보였다. “불법의 대의가 저 멀리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 눈앞에 있네. 이래도 보이지 않는가?” 라는 뜻이 아닐까.

<중용>에

“도야자(道也者)는 불가수유리야(不可須臾離也)니 가리(可離)면 비도야(非道也)니라.”는

말이 있듯이, 불법(道)은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으며, 떠나 있다면 이미 불법이 아닌 것이다.


경전과 어록에서 가장 감명 깊은 부분을 묻는 질문에, 한암 선사는

“적멸보궁에 참배나 다녀오라”고 경책한다.

“불법의 정수를 어찌 문자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적멸보궁에 참배하고 새롭게 발심한 뒤

직접 문자와 언어가 끊어진 적멸(寂滅)의 경지를 체험하라.”는 멋진 대답이다.


이어 한암 선사는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를 묻는 질문에, “모르겠노라.”라고 답한다.

수행 상에 나타나는 경계는 어디까지나 경계일 뿐이다. 어떤 신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고 가기에, 기억에 남는 좋고 나쁜 경계가 따로 있을 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사토 스님이 활구 법문에 대해 감사를 표하자, 한암 선사는 끝까지 자비를 아끼지 않는다.

“입을 열고 생각을 움직이면 벌써 그르쳤느니라(開口卽錯 動念卽乖).

죽은 말(死句) 그만하고 참구나 하거라.” 하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이처럼 한암 선사는 고인들의 선문답을 흉내내어 읊조리는 ‘구두선(口頭禪)’, ‘앵무새선’을

크게 경계하였다.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의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27년 동안 동구 밖을 나오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암 선사의 이런 경책을 받고 크게 감명을 받은 사토 스님은, 어느 강연회에서

“한암 스님은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도인임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둘도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상원사에는 선사를 친견하려는 일본 저명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 현대불교에서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한암 스님(3)


만공(滿空, 1871∼1946) 선사가 묘향산에 있던 한암(漢巖, 1876∼1951) 선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이별한 지 10여 년이나 되도록 서로 거래가 없었도다.

구름과 명월과 산과 물이 어디나 같건만, 북녘 땅에는 춥고 더움이 고르지 못할까 염려되오.

북방에만 계시지 말고 걸망을 지고 남쪽으로 오셔서 납자들이나 지도함이 어떠하겠소?”

한암 스님은 만공 선사에게 이렇게 답했다.

“가난뱅이가 묵은 빚을 생각합니다.”

만공 선사가 다시 답했다.

“손자를 사랑하는 늙은 첨지는 자연히 입이 가난하느니라.”

한암 스님이 다시 답했다.

“도둑놈 간 뒤에 활줄을 당김이라.”

만공 선사가 다시 답했다.

“도둑놈 머리에 벌써 화살이 꽂혔느니라.”

 

. . . .!

 

만공 스님이 한암 스님에게 남쪽으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나서달라고 청하자,

한암 스님이 선문답으로 사양하는 장면이다. 한암 스님은 가난뱅이가 묵은 빚을 생각할

정도로 지독하게 가난하다고 정색을 한다

마음이 가난해져 ‘일체의 분별심을 텅 비워버린 경지(身心脫落)’여서,

한 마디도 설할 법이 없다는 자부심이 묻어난 말이기도 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요.”라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듯이,

선가에서도 마음이 가난함을 미덕으로 여긴다. 대표적인 법문이 향엄 선사의 게송에 보인다.


앙산 선사가 향엄 스님이 기왓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깨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네가 다다른 심득(心得)의 경계가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에 향엄 스님은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올해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다.

작년 가난은 송곳 세울 만한 땅은 있었지만, 올해엔 송곳조차도 없네.”라는 게송으로 답했던 것이다.


<맹자>에는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이 적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는

말이 있듯이, 소욕지족(少欲知足)은 마음공부의 기본이다. <유교경>에서는

“만일 모든 고뇌를 없애고자 한다면 마땅히 지족(知足)을 관해야 한다.”고 했고,

 <법구경>에서는 “지족은 제일의 부(富)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같은 한암 스님의 가난뱅이 타령에, 만공 스님은 “할애비가 비록 가난하더라도 손자를

아끼듯이 후학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친다.

그러자 한암 스님은 “(내 뜻은 이미 밝혔으니)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들지 마시라.”고 한 방 먹인다.


만공 스님 역시 작가 선지식인지라 고이 보내줄 리 없다. 도둑놈 심정은 도둑놈이 가장 잘 알기에,

 ‘그대의 본래면목에 화살을 적중시켰다(以心傳心으로 뜻이 통했다는 의미)’고 되받아친다.

장군멍군이요 피장파장이다.


선가에서는 ‘천하와 우주를 훔치는 위대한 작가 선지식’을 도둑놈이라 표현한다.

자아의식과 분별심, 번뇌 망상을 텅 비운 무심도인은 만법과 하나가 된 경지에 살기에

우주만유를 자기 것으로 만든 도둑으로 상징한다.

불법을 완전히 체득하기 위해서는 천하를 훔치는 대도(大盜)의 기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 현대불교에서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한암 스님 (4)


일제강점기의 어느 날, 한암(漢巖, 1876∼1951) 스님이 상원사에 주석할 때의 선화다.

월정사 종무소에서 전갈이 오길, 일본 조동종 관장(종정)을 지낸 경성제국대학 사토 타이준

(佐藤泰舞) 교수가 면회를 요청하니 곧 내려오시라는 것이었다.

그 때 상원사에서는 한암 조실의 지휘 아래 가을 김장 준비로 밭갈이 중이어서 내려가지 않았다.

얼마 후 사토 교수 일행이 직접 상원사로 올라오자, 통역이 작업을 중지하고

귀빈을 맞으라고 성화였다. 통역이 다시 조르자 한암 스님이 말했다.


“가서 물어보게. 나를 찾아보러 왔는지, 절 받으러 왔는지.”

이윽고 시자방으로 들어온 사토 교수는 공손히 예배하고 법문답을 청했다.

“본연청정(本然淸淨)한테 어찌 산하대지(山河大地)입니까?”

한암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문을 활짝 열고 청산(靑山)을 보여주었다.


이 선문답은 장수(長水) 선사와 낭야(廊揶, 991~1067) 선사간의 문답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한 공안이다.


장수 선사가 낭야 선사에게 가서 묻되, <능엄경> 가운데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께 묻기를

“청정본연커늘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淸淨本然 云?숨絪? 山河大地)?”

한 질문을 인용하여, 다시 “청정본연커니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낭야 선사가 반문하되,

 “청정본연커늘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생겼는고?” 하였더니,

장수 선사가 언하에 깨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수 선사가 물을 것도 없는 것에 한 생각을

공연히 일으켜서 ‘묻는 그 자체가 산하대지를 나타나게 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장수 선사와 사토 교수의 질문은 동일했지만, 한암 스님은

 ‘만목청산(滿目靑山: 보이는 그대로가 진리인 세계) 즉, 산하대지를 직접 보여주는

말없는 지혜작용으로 오히려 낭야 선사 보다 더욱 명쾌한 대답을 하고 있다.


본래 청정한 법신(法身)에서 어찌하여 무명(無明)이 일어나 산하대지의 세계와 중생이

생겼느냐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는 미혹한 눈으로 보면 세계가 더러운 곳으로, 중생이 악의 덩어리로

보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세계가 유리(琉璃) 세계로, 중생이 부처로 보인다고 한다.

법계가 본래 청정한 것을 깨닫고, 또 깨닫지 못한 차이로 달라보인다는 것이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에 대해 <능엄경>에서는 본래 깨친 성각(性覺)이 망념으로 인하여 본연청정한 것을

가리우고 지, 수, 화, 풍, 공, 견, 식(地水火風空見識)의 7대 만법이 연기되어서

무기물의 세계와 생명계의 중생이 생겼다고 본다. 즉, 부처님께서는

“무명의 망념을 인하여 세계도 생기고 중생도 생기고 기타 만물이 생겼느니라.”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종에서는 단적으로 “한 생각이 쉬면 본연청정한 세계요,

선악으로 나누는 한 생각이 일어나면 오탁악세다.” 라고 말한다.

즉, “다만 한 생각의 차이로 인하여 만 가지의 형상이 나타났다

(只因一念差 顯出萬般形)”는 것이다.



 
 이정희 5집 - 화요일 / 젖은 눈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