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만공 스님 (1)(2)(3)(4)(5)

2018. 10. 20. 18: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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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만공 스님 (1)


어떤 학인이 만공(滿空;1871∼1946) 선사에게 물었다.

“불법(佛法)이 어디에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느니라.”


“눈앞에 있다면 왜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너에게는 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느니라.”


“스님께서는 보셨습니까?”

“너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하느니라.”


“나도 없고 스님도 없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는 누구냐?”


진리는 항상 눈앞에 있다. 불법은 지금 코앞에 있다.

그것은 언제나 없는 곳이 없다. 선사들은 마음의 눈이 열리면 눈에 가득한

그대로가 불국토라고 말한다.

천태덕소 스님은 “마음 밖에는 법이 없으니(心外無法),

눈에 가득 온통 푸른 산이네(滿目靑山)” 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

 

'촉목보리(觸目菩提: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깨달음),

‘촉사이진(觸事而眞: 손에 닿는 것 그대로가 진실)’,

‘도무소부재(道無所不在: 도가 없는 곳이 없다)’

라는 말들이 이런 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뜬 만공 스님 역시 ‘불법이 네 눈앞에 있다’고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촉목보리(觸目菩提)의 도리를 깨달으면 사바세계에서도 극락의 삶을 보고

즐길 것이요, 깨닫지 못한다면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으로

평생 캄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만공 스님은 불법이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은

‘나(我)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고 일러주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라고 애지중지하며 사랑해 온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인 아집(我執)과 아상(我相)으로 인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다.

더구나 이 ‘나’에 대한 집착 위에다 ‘너’를 포함한 객관적 사물과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집착하는 법집(法執)까지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숭산 스님은 ‘보는 자가 여래다(卽見如來)’라는 주제의 법문에서 이런 힌트를 주고 있다.

 “만약 당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허한(텅빈) 마음을 유지하면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너와 모든 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만물은 언제나 하나이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이다. 설탕을 맛볼 때 설탕과 하나이다.

소가 ‘음메’하고 하면 바로 그 때 소와 하나이다.”(선의 나침반)

숭산 스님은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

‘나’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면 볼 수 있을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는 과연 누구일까?

“한 생각을 일으켜 자기를 찾으면 곳곳에서 그르칠 것이다”는 고인의 말이 있다.

보려면 순간에 볼 것이요, 한 순간이라도 머뭇거리면 빗나가고 만다(動念卽乖)는 것이다.

만공 스님 입적 후에 문도회에서 출간한 법어집 제목이 <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자는 과연 무엇일까?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만공 스님 (2)

 

 

배가 가는것이냐 섬이 가는것이냐?
어느 날 만공(滿空, 1871∼1946) 스님, 혜암 스님, 진성 사미가 함께 배를 타고
간월도의 간월암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섬을 향해 움직이자
주변의 작은 섬들이 서서히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만공 스님이 옆에
있는 진성 사미에게 물었다.
 
“배가 가는 것이냐, 섬이 가는 것이냐?” 그러자 진성 사미는 한 걸음 물러나 차수
(손을 모으는 것)하고 서 있었다.
그때, 혜암 스님이 말했다.
“스님, 저에게도 물어봐 주십시오.”

“오, 그래. 혜암 수좌. 배가 가는 것인가? 섬이 가는 것인가?”
“배가 가는 것도 아니고 섬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가는가?”
혜암 스님은 아무 말없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어올렸다.



그러자, 만공 스님은 감동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 혜암 수좌, 자네 공부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가?”
“이렇게 된 지 좀 되었습니다.”

만공 스님과 혜암(惠菴, 1886~1985) 스님의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선문답은
육조혜능 스님의 깃발에 대한 선화와 매우 유사하다.
이른바 ‘비풍비번(非風非幡)’ 공안은 혜능 스님이 중국 남쪽의 광주 법성사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깃발이 펄럭 이는 것을 보고 대중들이 무엇이 흔들리는 것인가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 하고 있을 때 나온 일화다.
대중의 한 쪽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다’고 했고, 한 쪽은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다’
고 했다. 그러자 혜능 스님이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라고 말하자, 모여 있던 대중이 크게 놀랐다고 한다.
 
만공-혜암 스님의 문답은 ‘비풍비번’ 공안과 비슷한 스토리의 대화이지만, 더욱 격조가 높다.
즉 구차한 말로 설명을 하지 않고 하나의 즉각적인 동작으로 드러 낸 점에서 혜능 스님의
법문을 뛰어넘어 조사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할만한 탁월한 문답이라 할 수 있다.
만공 스님은 뛰어난 두 제자의 공부를 위해 일상 중의 경계를 가지고
“배가 가는 것이냐, 섬이 가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고, 혜암 스님은 아무 말 없이
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어올리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렇다면 이 행위가 혜능 스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는 답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물론 그 뜻은 다르지 않지만, 혜암 스님은 ‘마음이 갑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마음이
바로 보이는 방법(동작)을 대신 썼다.
만약 혜능 스님의 말을 모방해 똑같이 말했다면 앵무새라는 핀잔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말을 내세워 설명했으니 ‘벌써 제2구(句)에 떨어졌느니라’ 라는 만공 스님의 질책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혜암 스님은 볼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란 언어 대신,
아무 말없이 손수건을 들어올림으로써 마음을 바로 보인 것이다.
이 뜻밖의 행동에 만공 스님은 손수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때 스님은 제자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 손수건을 보는 그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라
혜암의 말없는 말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아차리고, 제자의 공부를 인정한 것이다.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만공 스님 (3)



어느 해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공(滿空;1871∼1946) 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가 왔는데, 내용은 이랬다.

“시방세계가 적멸궁(寂滅宮) 속에 건립되었다 하는데,

그 적멸궁은 어느 곳에 건립되었습니까?”

만공 선사가 답했다.

“시방세계는 적멸궁에 건립되었으나, 적멸궁은 나의 콧구멍 속에 있느니라.”


다시 편지가 왔다.

“적멸궁은 선사의 콧구멍 속에 건립되었거니와,

선사의 콧구멍은 어느 곳에 건립되었나이까? 저희들을 그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만공 선사가 답했다.

“일찌기 가야산엔 적멸궁만 있다더니, 오늘에 와서 다시 보니 과연 그렇구나.”


‘적멸한 궁전(寂滅宮)’이란 미혹(迷惑)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

즉 모든 번뇌와 고뇌가 소멸된 열반의 경지를 뜻한다. 그리고 ‘콧구멍(鼻孔)’이란 말은

불성(佛性),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분(本分), 본각(本覺)을 상징한다.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겨날 때 코가 먼저 생기며,

오관 중에서도 콧구멍이 먼저 뚫린다고 본 데서 유래했다.

 

해인사 수좌의 질문에 만공 선사는 시방세계가 적멸궁에 건립되었으며,

적멸궁은 다시 당신의 본래면목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각자의 콧구멍 즉, 진여자성(眞如自性)에서 미혹과 깨달음,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

주체와 객체 등 일체 만법이 건립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콧구멍, 즉 본래면목은 다시 어느 곳에 건립되었을까?

이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공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 스님이 조주(778~897) 스님에게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만,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이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라고 답한 것이 바로 이 공안이다.

이와 관련, 만공 스님은 “가야산에 적멸궁만 있다”라는 대답을 통해, 진여자성(하나)이

가야산이란 적멸궁 즉, 만법에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一)는 진여인 마음의 본체를 가리킨다.

만법은 일심(一心)의 인식과 판단으로 성립되는 심법(心法)이기에, 만법은 근원적인

깨달음의 경지인 일심으로 되돌아가고, 일심은 다시 만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화엄경〉등 대승경전의 “삼계는 오직 마음(三界唯一心)이며,

마음 밖에 별다른 법이 없다(心外無別法)”,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조작한 것이다(一切唯心造)”,

“만법은 일심(一心)이며 일심이 만법이다.”는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즉 만법은 심법(心法)인 것이다.

 

이와 관련 승조 법사는 <조론>에서 “지인(至人)의 마음은 텅 비고 환하여 형상이 없다.

그리하여 내가 짓지 않은 만물이란 없다(萬物無非我造).

만물과 화합함으로써 자기를 이룬 자는 성인일 뿐이다.”고 하였다.

<조론>을 해설한 감산 선사는

“만일 삼계의 만법이 마음에서 나타난 것일 뿐임을 요달할 수만 있다면 만법마다

모두가 자기에게로 귀납된다. 이를 성인이 열반을 증득했다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만법을 버리고 열반을 찾거나, 본래면목을 찾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감산 선사의 ‘만법 그대로가 하나의 진여(萬法一眞)’라고 한

가르침을 깊이 새기면서, 이 공안을 참구해 보자.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만공 스님 (4)


어느 날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 한가로이 앉아있을 때,

진성 시자가 차(茶)를 달여가지고 왔다. 스님이 말했다.

“아무 일도 않고 한가로이 앉아있는 내게(我今不勞而閑坐), 왜 이렇게 차를 대접하는고?”
시자가 한 걸음 다가서며,

“노스님! 한 잔 더 잡수십시오.” 하였다.

스님이 “허! 허?” 하고 웃었다.


이 문답은 유명한 조주 선사의 ‘끽다거(喫茶去: 차 드세요)’ 공안의 한국판이라 할만한다.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등장한다.

한 수좌가 절에 도착하자, 조주 선사가 물었다.

“여기에 처음 왔는가, 아니면 온 적이 있는가?”

“온 적이 있습니다.”

“차나 마시게.”

조주 스님이 또 다른 수좌에게 같은 질문을 하니, 그가 “온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자,

 조주 선사는 또 “차나 들게” 라고 하였다.

뒤에 원주(?찔?) 스님이 의심이 나서 조주 스님께 물었다.

“왜 온 적이 있다 해도 차를 마시라 하고, 온 적이 없다 해도 차를 마시라고 했습니까?”

“자네도 차나 한잔 마시게.”

 

이처럼 조주 선사는 세 명의 스님에게 똑같이 “차나 들게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선사가 상대적인 분별의식을 끊은 깨달음의 절대경지에서,

이리 저리 찾고 구하는 치구심(馳驅心)을 내려놓도록 이끄는 법문이다.

이 절, 저 절 찾아다니며 불법(佛法)이 무엇이고, 선(禪)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헤매는

망상과 집착을 맑은 찻물로 씻어내리는 시원한 화두인 것이다.

 

만공 스님이 차를 마시면서, ‘끽다거’ 공안을 화제(話題)로 제자의 기량을 시험하자,

진성 시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 잔 더 잡수십시오.” 라고 응대한다.

‘끽다거’ 화두에 대해 요리조리 알음알이를 내어 대답하는 순간,

한 잔의 차는 어느 순간 독주(毒酒)가 되고 만다.

물론 조주 스님의 대답을 앵무새 처럼 흉내낸다면 더욱 어긋나고 만다.

찻자리에서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주고 받음 없이 차를 올리고 받는 무심(無心)의

거래(去來)가 아니고서는 이런 자연스러운 응대가 즉각적으로(생각의 개입 없이)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이 문답에는 ‘끽다거’ 공안과 함께 ‘일없이 한가한 도인(無事閑道人)’의 경지가 어떤 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숨어있다. 만공 스님은 스스로 ‘일도 없이 한가로이 앉아있는

(不勞而閑坐)’ 무사인(無事人)임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행여나 말따라 가서 ‘빈둥빈둥 노는 노인네’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무사(無事)’는 보통 평온하다,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할 일이 없다, 문제가 없다, 건강하다

등의 뜻인데, 선에서의 의미는 그와 다르다.

임제 선사가, “구하는 마음을 쉬면 바로 무사(無事)”라고 했듯이,

 ‘밖을 향해 구하는 마음(치구심)’이 없는 것을 ‘무사’라고 한다.

 ‘무사’는 적정의 경지이며 본래 진실한 자기(眞己)로 돌아가서 평안한 마음상태인 것이다.

 

사실,  ‘치구심’을 없애는 것이 부처(본래 순수한 자기)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래부터 완전한 불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것을 잊고 자기 밖에서

부처나 조사나 도를 구하고자 애쓰기에 더욱 갈망은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무사(無事)가 바로 귀인이다. 밖으로 구하지 말라.

다만 조작하지만 말라.”(임제록) 고 했던 것이다.

<능엄경>에는 멀쩡한 자기 머리를 두고 머리를 찾아 헤매는 연야달다의 이야기가 등장하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본래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늘 밖을 향해 끊임없이 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임제 선사는

“그대여, 만약 염념에 치달리는 마음을 쉬면 곧바로 불조와 다름 없다.”고 경책했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무사인(無事人).”이라는 임제 선사의 말을 깊이 믿고 깨달음을 구하고,

원하고, 바라면서 잠시도 쉬지 못하는 망상과 분별심을 쉬어 보자.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만공 스님(5)


1939년 동안거 해제 때였다. 몽술(夢述) 행자가 만공 노스님께 나아가 절을 하니, 물었다.

“네가 누구냐?”

“몽술이라 합니다.”


“이 곳에 무슨 일로 왔느냐?”

“노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으러 왔습니다.”


“법문을 어디로 듣느냐?”

“귀로 듣습니다.”


“귀로 들으면 잘못 듣는 법문이니라.”

“그렇다면 어디로 듣습니까?” 하니,

노스님이 쥐고 있던 주장자로 행자의 머리를 한 번 ‘딱!’ 때리고 묻기를,


“알았느냐?”

하고, 다시 한 번 더 때릴 기세로 주장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알았다 하여도 이 주장자를 면치 못할 것이고, 알지 못하였다 하여도

이 주장자를 면치 못하리라. 속히 일러라.”

행자가 머리를 만지며,

“아야! 아야!”

하니, 스님은 주장자를 내리고 박장대소(拍掌大笑)하였다.


몽술 행자는 훗날 만공 스님의 선문답에 사미나 시자로 자주 등장하는 진성(眞性, 혹은 眞惺)

스님이다. 이 문답은 하룻강아지 처럼 물정(物情) 모르는 행자가 덕숭산의 호랑이를 놀린

격이지만, 만공 스님은 오히려 손뼉을 치며 좋아하고 있다.

막 절에 들어온 어린 행자가 알고 모르고 하는 분별심을 떠나, “아야! 아야!” 하는 무심의

지혜작용을 드러낼 줄 아는 법기(法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문답에서 만공 스님은 법문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듣는다는 말인가?

흔히 ‘마음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법의 비’를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한다.

마음 땅에 뿌려진 불법의 씨앗을 싹틔우기 위해서는 학인의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만

선지식의 ‘마음 법문’이 진실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남악회양 스님은 마조 스님의 “도가 모습(色相)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

(마조록)고 답했다.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실제로 온갖 고정관념과 사량분별,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이 진리의 말씀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마조 스님은 “옷 입고 밥 먹으며 말하고 대꾸하는

 6근의 작용과 모든 행위가 모조리 법성(法性)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서 명상(名相)을 좇으므로 미혹한 생각(情)이 허망하게

일어나 갖가지 업(業)을 지으니, 가령 한 생각 돌이켜본다면(返照) 그대로가 성인의 마음이다.

(마조록)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진리의 법문을 바로 듣기 위해서는 개념과 분별심에 걸리지 않고 텅빈 마음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성철 스님은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른 바 ‘무정물의 설법[無情說法]’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말이 아닌 주변의 풍경이나 사물이 드러내는 진실을 ‘무정설법’이라 한다.

그것은 의식으로 조작해서는 알 수 없는 진실의 세계이다. 쓸데없는 망상과 분별의식,

 일체 관념이 사라졌을 때, 있는 그대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선(禪)의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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