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요법문(心要法文)

2018. 11. 3. 12: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시 [禪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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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요법문(心要法文)


풍주의 용담숭신(龍潭崇信) 선사는 천황도오(天皇道悟) 선사가 좌우에서 시봉하기

여러 해가 되어도 선사가 한번도 가르쳐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나서 용담 선사에게 사뢰었다.


“소승이 스님회상에 온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나 한번도 심요를 가르쳐 주시지를

아니하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나는 네가 온 날로 부터 날마다 심요를 아니 가르쳐 준 날이 없는데,

네가 듣지 못하였다는 말이 웬말이냐?”

“어느 날 어느 때에 어떤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까?”

“매일 매시에 시간마다 여기서 가르쳐 주었나니라.”

“어떻게 가르쳐 주셨습니까?”

“네가 차를 가져오면 내가 받아 마시었고, 네가 밥을 가지고 와서 받아 먹었고,

네가 인사 예배하면 내가 머리를 숙여 받았으니 어찌 심요를 가르쳐주지 아니하였다고 하느냐?”


천황도오가 언하(言下)에 즉시 깨닫고,

“어떻게 보림하리까?”

하였더니 선사가 게송으로써 말씀하시되,


      任性逍遙           성품에 맡겨서 소요하고

      임성소요

      隨緣放曠           인연을 따라서 널리 무애행을 지으라

      수연방광

      但盡凡情           다만 이 심요라는 것은 범정을 제할 뿐이요

      단진범정

      別無聖解           별도의 성스러운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다.

      별무성해


라고 하셨다.

                                                                                      -『오등회원』-




이 선문답은 많이 알려진 공안이지만, 아직도 긴가민가 한다면 다시 온갖 알음알이와

고정관념을 버리고 깊이 깊이 더욱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천황도오 선사는 용담숭신 선사의 간단한 심요법문에 의해 단박에 언하대오 했건만,

이를 보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여전히 용담 선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말밖에 따로 전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망상을 피우기 때문이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구할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있고, 찾을 것이 있기에

그것을 획득하기 전까지는 전혀 쉴래야 쉴 수가 없다.

도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얻을 바 없는 것이요,

정해진 바 없는 것이라고 경전과 어록에서 수도 없이 반복해서 설하고 있지만

이를 믿는 자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아직도 무언가 구할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도가 뭔지 꿈에도 모르는 학인일 뿐이다.


이 도라는 것은 늘 우리의 삶을 감싸고 있으며, 보고 듣고 감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함께 하는 것이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을 어찌 도라고 하겠는가.

밥먹고 똥싸고 공부하고 잠자는 가운데 오롯이 함께 하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그래서 물속에서 물을 찾는다느니, 광화문에서 서울을 찾는다느니, 이딴 말들을 하는 것이다.

물론 용담 선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추구와 갈망을 그치고

참으로 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도니, 선이니, 깨달음이니,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잡소리를 하지 않고도 거시기를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제자를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가진 용담 선사는 천황 선사의 애간장을 태우고 또 태운 다음,

돌아버리기 직전에 비로소 간절하게 묻는 녀석에게 이런 심요법문을 설한다.

결코 쉽사리 일러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쉽게 묻고 쉽게 일러준다면 그것이 어떻게 귓구녕에 박혀서 전식득지(轉識得智)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무명과 집착에 물든 우리의 일상적 생각이 식(識)이며,

무명이 극복된 후 집착을 떠난 청정한 생각을 지(智)라고 하는데, 식이 지로 전환되는

‘전식득지’가 가능한 것은 스승의 한 마디 요긴한 법문(法門: 법의 문)에 그동안 갖고 있던

온갖 ‘허망한 분별’이 사라지고 ‘무분별지(無分別智)’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깨달음의 지혜로 교리상으로는  ‘반야바라밀’이라고도 하고, ‘불이(不二)’의 일심

(一心)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용담 선사가 말했듯이, 이 깨달음의 요체는 별달리 성스러운 지혜를 따로 얻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주 오래된 분별심, 집착심, 망상 등 범부의 습관과 속성을 버리는 동시에

확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 이 도리를 깊이 믿고 확신하여 깨달았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보임해야 할까.

성품에 맡겨서 자유롭게 노닐고, 인연을 따라서 널리 대자대비하고 자유자재한 부처행을

지으면 된다. 이때부터는 악행을 행하지도 않고, 선행을 추구하지 않아도 자비행을 하게 된다.

이를 깨달은 뒤[悟後]의 불행수행(佛行修行)이라 한다.

이때부터는 수행 아닌 수행이어서 닦는 바 없이 닦는 대자유의 행복한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任性逍遙 임성소요   성품에 맡겨서 소요하고     

     隨緣放曠 수연방광   인연을 따라서 널리 무애행을 지으라     

     但盡凡情 단진범정   다만 이 심요라는 것은 범정을 제할 뿐이요     

     別無聖解 별무성해   별도의 성스러운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고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가장 무서운 칼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가지의 자신 중 어느 자신을 쫓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은 결정된다.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 짓는 요인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 가이다.


- 법정스님의 <홀로사는 즐거움> 중에서

 
9. 밤에 듣는 인디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