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3. 12:1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내가 너에게 숨기는 것이 없노라[吾無隱乎爾]
송나라 때의 황정견은 철종 황제의 태사가 되어 있었는데, 산곡 거사라고 호를 지어가졌다.
거사는 시를 좋아하여 시작으로 유명하였는데 염사를 지어 인기를 끌었다.
어느 날에 원통 수선사을 찾아가서 뵈었더니, 선사가 꾸짖어 말씀하시되,
“대장부가 시와 글의 매력에 빠져서 이것에만 종사하다가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하면
죽을 때에 염라왕을 무엇으로 달랠것아냐?” 하므로, 거사가 참회하고 수도에 뜻을 두고
발원문을 짖고 주색(酒色)을 금하고 조죽오반(아침에 죽, 점심에 밥) 이외에 먹지 않는
오후불식계를 지켜왔다. 그 뒤에 황룡조심(黃龍祖心) 선사에 의하여 수도하며 첩경의 도,
즉 빨리 깨달을 수 있는 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더니 선사가 이르되,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이삼자야, 내가 너에게 숨기는 것이 있느냐고 하셨으니,
다만 이것을 참구하여 보라. 나도 그대에게 숨기는 것이 없노라.” 하였다.
거사가 어떠한 이론을 가지고 와서 답변하여도 선사는 ‘아니다(不是), 틀렸다’ 하고
허락하여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 거사가 공부에 진척이 없는 차인데
모시고 산으로 구경을 갔더니 바위에 꽃들이 만개하여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선사가 목련화를 가르키며,
“저 꽃나무의 향기를 맡느냐?”
“맡습니다.” 고 하였더니 선사가 말씀하시되,
“내가 그대에게 감추고 숨김이 없노라.”
하였더니 거사가 석연하게 깨닫고 예배한 뒤 이르되.
“화상의 노파심절을 이제 와서 알았습니다.”
하고 감사를 드렸더니, 선사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다만 공이 자가에 돌아감을 요할 뿐일세.” 하고 말씀하셨다.
-『거사분등록』-
위의 문답에서 황정견은 꽃나무의 향기를 맡으면서 깨달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보고 듣고 감각하고 생각하면서도[見聞覺知]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 밖에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 아닐까.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유명한 4구게가 있다.
이 뜻을 풀이하면 “무릇 있는바 모든 상(모습)은 이것이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님을 본?摸? 여래(진리)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에 보는 즉시 깨닫는
비밀이 숨어있다. 그래서 어느 선사는 이 부분을
“만일 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님을 본다면 보는 자가 여래이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뜻풀이 역시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
그래서 ‘보는 자가 여래다’ 라기 보다는 ‘보는 그 자체(Seeing)가 여래다’라고 좀더
자세히 풀이하기도 한다.(물론 이렇게 풀이해 주는 선사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보는 작용과 여래(진리)라는 것이 분리되어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은 어떠한 풀이를 한들 무엇인가를 감추는 듯한
오해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결국 보는 순간, 듣는 순간, 감각하는 순간, 한 생각 일으키는 순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그리하면 황룡조심 선사의 ‘감추거나 숨기는 게 없다’는 말에 수긍하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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