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혜월 스님 (1) (2) (4)

2018. 11. 10. 13:5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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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혜월 스님 (1)


혜월 스님은 19세부터, 은사인 혜안 스님의 부탁으로 서산 천장사에서

경허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을 즈음,

스님은 경허 스님을 졸라서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배우게 된다.

이 <수심결> 서두에 임제 선사의 “지ㆍ수ㆍ화ㆍ풍의 네 가지 물질적 요소는

법을 말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도 또한 그러하거니, 다만 네 눈앞에

항상 뚜렷하여 홀로 밝고 형상 없는 그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말하고 법을 듣느니라”

라는 구절에 이르러, 혜월 스님은 큰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목전에 뚜렷하고 형상 없이 홀로 밝은 것(歷歷孤明 物形段者),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화두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때 경허 스님은 다시 “알겠느냐? 어느 물건이 설법하고 청법하느냐?

형상 없으되 뚜렷한 그 한 물건을 일러라.”

답을 이르지 못한 혜월 스님은 이로부터 늘 ‘대체 이 한 물건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에 꽉 차서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오직 이 한 생각 뿐이었다.

이렇게 일념에 일념이 거듭 뭉쳐 1주일이 되던 날, 스님은 짚신 한 켤례를 다

삼아놓고 마지막으로 신골(틀을 짚신에 넣고 두드려 모양새 고르는 것)을 치기 위해

‘탁!’ 하고 자신이 친 망치소리에 그렇게 찾던 ‘한 물건’이 환하게 드러났다.


혜월 스님이 타파한 ‘한 물건(一物)’은 남악혜양 스님의 깨달음과 유사하다.

회양 선사가 숭산으로부터 와서 뵈오니, 육조 대사가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마物 恁마來)”고 할 때, 회양은 어쩔 줄 모르다가

8년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라고 한 공안이 그것이다.

여기서 ‘무슨 물건’이 바로 ‘이뭣고’ 화두의 근원이 된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다는 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이니,

불성(佛性)이니, 주인공이니, 무일물(無一物)이니,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니 하는

등의 이름을 붙이지만 실은 설명이 불가한 ‘그 무엇(거시기)’이다.

모양과 형상이 없기에 말이 끊어지고 마음 길이 사라진 곳에서 스스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는 ‘물건 아닌 물건’인 것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바라제 존자가 이견왕(異見王)으로부터

불성에 관하여 질문을 받고 ‘불성은 작용 속에 있다’는 취지로 대답하여

왕을 깨닫게 했다는 이런 게송이 전한다.


“태내에 있으면 몸이요, 세상에 살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며,

귀에 있으면 듣는다는 것이며, 코에 있으면 향기를 분별함이요, 입에 있으면

말하는 것이며, 손에 있으면 잡는 것이요, 발에 있으면 걸어가는 것이다.

두루 드러내면 모래알 같이 무수한 세계를 다 아우르고,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에 있다.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자는 그것을 불성이라 알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정혼(精魂)이라고 한다.”

이견왕도 이 게송에 깨달았는데 그 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는 우리는

왜 깨닫지 못할까? 그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당체(當體)에 대해 진실로

의심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주와 인생을 세웠다 허물었다 하는 ‘깨달음의 성품’(覺性)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의심해야만 화두가 저절로 들리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생각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 현대불교에서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혜월 스님 (2)


무심삼매(無心三昧)에서 짚신을 삼아 놓고 신골을 치는 망치 소리에

‘이 한 물건(一物)이 무엇인가’하는 의심이 환하게 해소된 혜명(慧明: 혜월의 법명)

스님은, 그 길로 경허 선사를 찾아갔다.

 경허 스님은 한눈에 뭔가를 간파하고 물음을 던졌다.


“그래 참선은 무엇하러 하는가?”

“못에는 고기가 뛰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 지금 어디 있는가?”

“산 꼭대기에 바람이 지나갑니다.”


“목전(目前)에 고명(孤明: 뚜렷이 밝은)한 이 한 물건이 무엇인고?”

이에 혜월 스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 섰다.

“어떤 것이 혜명(慧明)인가?”

“저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천성인(一千聖人)도 알지 못합니다.”


경허 선사께서는 여기에서, “옳고 옳다” 하시며, 혜명을 인가하였다.


‘한 물건’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서,

‘이 뭣고?’화두의 참구 대상이다. 육조 대사가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 땅을 괴었으며, 밝기는 일월 같고 검기는

칠통(漆桶)과 같아서 항상 나의 동정(動靜)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하고 제시한 공안이다.


이 한 물건은 그 어떤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서

부처님과 조사도 입을 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달마 대사는

 ‘불식(佛識: 모른다)’이라고 말했으며, 육조 스님의 인가를 받은 회양 스님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設使一物也不中)”고 했으며,

 숭산 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도 했다.

 마찬가지로 혜명 스님은 ‘혜명의 본래면목’을 묻는 질문에,

역대 성인도 이치로는 알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황벽 스님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경계인 사물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힘써 노력한다고

다다를 수도 없는 이것”을 “모든 불ㆍ보살과 일체 꿈틀거리는 미물까지도

 똑같이 지닌 대열반의 성품(大涅槃性)”, 또는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靈覺性)’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듯이 이 ‘각성(覺性)’을 깨닫는 참선은 물고기가 물을 찾고, 광화문에서

서울 찾는 것처럼 자명한 평상(平常)의 일이다.

또 각성은 주객(主客)과 자타(自他)가 사라진 경지여서 찾으면 찾을 수 없지만,

찾지 않으면 없는 곳이 없어서 산 꼭대기의 바람이 지나가는 가운데도 있다.

이 ‘한 물건’은 무엇이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혜명 스님은 ‘한 물건’ 자체가 되어 언어와 생각을 떠나 경허 스님의 질문에

척척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경허 스님은 전법의 표시로 비로소 혜명에게‘혜월(慧月)’이란 법호와

전법게송을 지어주었다.

“일체법 사무쳐 알면 자성에 또한 소유가 없는 것/

이와 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노사나부처님 곧 보리라/

세상의 생멸법 쉬어 생사초월한 도리 부르짖으니/

청산 다리 한 빗장으로써 서로 우물쭈물 하도다.”


경허 스님은 혜월 스님에게

“남방이 인연있는 땅이니, 이 길로 남쪽으로 가도록 하라” 했기에,

스님은 하직하고 곧 양산 미타암으로 가게 된다.


- 현대불교에서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혜월 스님(4)


일제 말기, 미나미 지로(南次郞ㆍ1874~1955) 총독이 남방에 큰스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부산 안양암에 주석하고 있던 혜월(慧月ㆍ1861~1937) 스님을

참방하여 인사를 드렸다.

“스님의 도에 대한 명성은 일찍부터 잘 듣고 있었습니다.

진작 찾아뵙고자 했으나 이제야 뵙습니다.”

총독은 절을 하고 “부처님의 아주 깊고 높은 진리를 한 말씀 일러주십시오” 라며

법을 청했다. 이에 혜월 스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귀신 방귀에 털난 소식이니라.”

총독은 한동안 무료하게 앉아있다가 일행과 더불어 덤덤하게 돌아갔다.

총독이 혜월 스님에게 한 방망이 크게 맞았다는 소문이 불교계와 총독부에

자자하게 퍼졌다. 총독에게 무례하게 대했다는 소문에 분개한 총독부의 한

무관이 스님을 단단히 혼을 내 주리라 작정하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는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참선하고 있는 스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말했다.

“내 칼 받아라. 그대가 혜월 스님인가?”

“그렇다. 내가 혜월이다.”

하고 스님이 손가락으로 그 무관의 등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보아라.”

무사가 뒤를 돌아보는 찰나, 스님이 벌떡 일어나 무관의 등을 치며 소리쳤다.

“내 칼 받아라.”

그러자, 무관은 깜짝 놀라 칼을 떨어뜨리고선 큰절을 하고 항복했다.


일제강점시대 조선 권력의 제1인자인 총독의 위세를 가볍게 눌러 준 일도

놀라운 일이지만, 목에 칼이 들어오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도

태연하게 응대할 수 있는 것은 깊고 깊은 무심(無心)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묘한 지혜작용이 아닐 수 없다.

혜월 스님이 총독에게 조금이라도 위축된 마음이 있었다거나, 무관의 칼날

앞에서 공포에 떨었다면 한국 선종의 존엄과 스님의 목숨은 한 순간에

땅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위풍당당하게 혜월 스님을 참방한 총독은 ‘불법의 진리를 설해 달라’며

그물을 던지지만, 백전노장인 스님의 ‘귀신 방귀에 털난 소식’을 접하고는

더 이상 입을 뗄 수 없었다.

형상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귀신도 허무한데, 그 귀신이 방귀를 뀐다는 것,

더군다나 그 방귀에 털이 난 것이라고 하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 도리는 총독이 아니라 총독 할애비도 알 수 없는 진리의 암호인 것이다.

이와 관련, 혜월 스님의 사제인 만공 스님은 이런 법문으로 힌트를 주고 있다.


“참된 말은 입 밖에 나가지 않나니라. 허공에 뼈가 있는 소식을 알겠느냐?

귀신 방귀에 털나는 소식을 알겠느냐? 등상불(等像佛)이 법문하는 소리를

듣겠느냐? 생각이 곧 현실이요, 존재니라. 생각이 있을 때는 삼라만상이

나타나고, 생각이 없어지면 그 바탕은 곧 무(無)로 돌아가나니라.”(만공 법어집)


귀신 방귀에 난 털은 본래 생겨난 적이 없기에 본래 사?竄測? 것도 아닌

무생법인(無生法忍: 일체가 불생불멸임을 깨닫는 것)을 상징한다.

<반야심경>에서 “일체의 존재가 공하여 실체가 없으며,

생기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諸法空相 不生不滅)”는 의미와 같다.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거시기’를 알려면 구구한 지견풀이를 잊고, 귀신 방귀에 털난 소식을

온몸으로 체득할 수 밖에 없다. 


 
                 밤에 듣는 인디음악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