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용성 스님 (1)(2)(3)(4)

2018. 11. 3. 12: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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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용성 스님 (1)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이 하루는 제자 고봉에게 물었다.

“고봉아, 화과원(華果院: 용성 스님이 함양 백운산에 세운 농장)의

도리원(桃梨園: 복숭아밭) 소식을 한 마디 일러라.”

“화과원에 도리가 만발하니, 그대로가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용성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네, 이 놈. 뭐가 어쩌고, 어째! 이놈이 공부 깨나 하여 안목이 열렸는가

했더니만, 순전히 밥이나 축내는 밥도둑 놈이 아닌가” 하고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고봉이 생각하기를, ‘내가 혹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했나?’ 하고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했다. 그리고는 곧 스승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화과원에 도리가 만발하니, 그대로 화장세계로구나.”


화과원의 도리원 소식, 즉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스승과 제자가 한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 차이점이 있을까.

불법에 대한 안목(眼目)을 갖춰야만 똑같은 말에서도 천지현격(天地懸隔)의

차이점을 훤하게 볼 수 있다.

이 문답에서 제자는 이미 나름의 안목을 갖춘 공부단계였지만, 스승이 던진 낚시밥을

냉큼 물고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둥대는 가련한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자는 바로 대답을 했지만, 스승의 시험에 걸려 자신의 견처(見處)에 대해

순간적으로 확신을 잃은 것이다. 이는 고봉 스님의 당시 경계가 체험적 증오(證悟)가

아니라, 이치로만 안 해오(解悟)에 머물고 있었음을 뜻한다. 물론 용성 스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몽둥이질로 고봉 스님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깨달은 경지가 역대 조사의 견처와 같은지를 점검하는 말에 ‘신득급(信得及)’이란

말이 있다. 대혜 선사 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증오와 해오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신(信)’이란 확신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며,

‘득(得)’은 그 경지까지 다 체험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신득급을 확인하는 문답은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는

유명한 공안에서도 보인다.


하루는 법안문익(885∼958) 선사가 그의 문하에서 감원(監院) 소임을 보면서도

한번도 법문을 청하지 않는 보은현칙에게 물었다.

“나에게 묻지 않는 이유라도 있느냐?”

“전 이미 청림 화상 문하에서 한 소식을 얻었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제가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청림 화상이

 ‘병정동자가 불을 구하러 왔구나’ 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 잘못 알았을까 두렵구나. 설명해 보거라.”

“병정(丙丁)은 (음양5행에서) 불(火)에 해당하니 ‘불이 불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구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너는 잘못 알았다.”

현칙이 수긍하지 않고 일어나 나갔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개운치가 않아서, 다시 돌아와 법안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병정 동자가 불을 구하는구나.”

이 말에 현칙은 크게 깨달았다.



의심과 확신, 그리고 회의, 절대확신으로 이어지는 신득급의 여정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한국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용성 스님 2

 


어느 날 용성(龍城, 1864∼1940) 선사가 전강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第一句)냐?”

전강 스님이 답했다.

“예!”

“틀렸다.”

이에 전강 스님이 손뼉을 치고 웃어 보였더니, 용성 선사가 다시 말했다.

“틀렸다.”

“제가 묻겠습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이때 용성 선사가 느닷없이 “전강아!” 하고 불렀다.

“예!”

“그것이 제일구니라.”


용성 스님이 후학을 일깨우는 수단은 능수능란한 달인의 경지이다.

두 번이나 대답이 틀렸다고 분심(憤心)을 일으킨 후 약이 바짝 달아올랐을 때,

학인의 근기에 맞게 선교방편(善巧方便)을 베푸는 것이다.

이런 단련을 받은 전강(田岡, 1898~1975) 스님 역시 당대의 선지식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물론이다.

제자의 이름을 부른 후, ‘예!’ 하고 대답할 때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공안을

제시하는 이러한 문답은  ‘이뭣고?’ 화두가 정형화 되기 이전,

백장 선사의 문답에서도 나타날 만큼 학인의 본래면목을 일깨우는 효과적인

방편이라 볼 수 있다.


『백장록』에는 이런 공안이 나온다.

“하루는 백장 스님이 설법을 마치니 대중이 법당에서 물러가자, 스님이 대중을

 불렀다. 대중이 고개를 돌리자, 백장 스님은 ‘이것이 무엇인고(是甚?)?’ 하고 물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묻는 ‘이뭣고?’ 화두는 다양한

공안집에 등장하지만, 『벽암록』에 등장하는 운문 선사의 법문에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향림징원(香林澄遠)이 18년 동안 운문 스님의 시자를 했는데, 그를 가르침에

다만 ‘원 시자(遠侍子)!’라고 부르면, 원 시자는 ‘네!’ 하고 대답하였고,

운문은 ‘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18년 만에 어느 날

바야흐로 원 시자가 깨달으니, 운문은

 ‘내가 지금 이후로 다시는 너를 부르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앞에서 용성 스님의 질문에 전강 스님은 똑같이 “예!” 라고 대답했지만,

용성 스님은 한번은 “틀렸다”고 했고, 한번은 “맞다”고 했다.

같은 말이건만, 이렇게 맞고 틀린 차이가 벌어진 것은 과연 왜일까?

용성 스님은 ‘이뭣고?’ 화두의 열쇠인 이 물건 아닌 ‘한 물건(一物)’에 대해

 “찾으면 더 멀리 도망하고 그냥 두면 여러분 앞에 있어 항상 손바닥 안에 머문다”

고 말한 바 있다.


진리의 당체(當體)를 직접 지칭하는 말인 ‘제 1구’는 딱히 정해진 바가 없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인 동시에, 구하려고 하면 얻을 수 없는 ‘무소득법(無所得法)’

이다.

하지만 찾지 않고, 갈망하지 않고, 원하는 바가 없으면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라제 존자는 “성품(性品)은 작용하는 데 있다.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을 한다”고 풀이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개야!” 하고 부를 때, “예!” 하고 대답하는 이 작용에서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두 공부는 ‘모르는 게 약’일 때가 훨씬 많다


- 현대불교

한국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_ 용성 스님 (3)


용성(龍城, 1864∼1940) 선사가 제자인 고암(古庵, 1899∼1988)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무자(無字)의 10종병(十種病)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인 뜻은 무엇인가?”

“사자굴 속에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조 스님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


그리고는 고암 스님이 여쭈었다.

“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용성 선사는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며 반문하였다.

“너의 가풍은 무엇이냐?”


고암 스님도 주장자를 세 번 내리쳤다.


무자 십종병이란 ‘조주 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여야 할

병통 열 가지를 말한다. 이는 조주 무자 화두가 모든 화두의 대표격이므로,

결국 이것은 화두 참구에 있어서의 열 가지 병통을 말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그 내용은 전적(典籍)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②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참으로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③ 도리(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④ 의식으로 생각하거나 비교ㆍ분석하지도 말라.

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데서(불법의 지혜작용에서) 캐내려고 하지도 말라.

⑥ 문자나 말에서 살아갈 방도를 찾지도 말라.

⑦ 마음이 편안하다고 일없는 경지에만 안주하는 무사선(無事禪)에 빠져도 안된다.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라.

⑨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지 말라.

⑩ 어리석음을 가져다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등이 그것이다.


고암 스님은 이러한 무자 10종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화두 일념 속에서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늘 ‘또렷또렷하고 고요고요하게(惺惺寂寂)’ 깨어있다고 답한다.

세존의 ‘염화 미소(拈華微笑)’ 공안에 대해서는 영산회상에는 법왕(法王)인

사자의 혈족들만 살고 있어서, 세존이 꽃을 드는 순간 곧바로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알아차린 것이라고 대답한다.

또 육조 스님의 ‘비풍 비번(非風非幡)’ 공안에 대해서는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다’는 말과 같이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가 마음

(目擊道存 觸目菩提)’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 용성 스님과 고암 스님은 사자의 후손답게 똑같이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치는

지혜 작용을 통해 가풍(家風)을 전한 바 없이 전하고 있다.

용성 스님의 질문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또박또박 말대답하고 있는

고암 스님은, 그 스승의 그 제자답게 마침내 대선지식이 된다.

스님은 혜월, 만공, 용성, 한암 스님등 대선사의 회상에서 25 하안거를

성만한 후 1938년 용성 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그후 1967년 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됐으며 1970년 해인총림 2대 방장,

72년 4대 종정, 78년 6대종정, 80년 용성문장에 취임하여

불조(佛祖)와 스승의 은혜를 갚았다.


- 현대불교



한국 근현대 고승들의 선문답 - 용성 스님(4)


창수(昌洙) 수좌가 망월사에서 용성 조실께 삼배를 드리고 꿇어앉자마자,

용성 스님이 물었다.

“십마물(什마物) 임마래(恁마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는 물음이다.

이에 창수 수좌는 주먹을 불쑥 내밀며 아뢰었다.

“임마물(恁마物)이 여시래(如是來)니다.”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는 대답이다.


용성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여시 여시(如是如是)니라.”

‘그렇다 그렇다’ 하는 긍정의 표현이다.

잠시 후, 용성 스님은 붓을 당겨 창수 수좌에게 인곡당(仁谷堂)이라는

법호와 함께  ‘인곡당 창수 장실에 보임(示 仁谷堂昌洙 丈室)’이란 전법게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렸다.


어진 마음이 천지를 감싸안으니 (人心抱天地)

깊은 골짜기 또한 밝고 밝도다   (玄谷又明明)

온갖 조화가 이에서 일어나니    (造化從斯起)

영원토록 생멸하지 않도다        (亘古不生滅).


인곡(1895∼1961년)  스님은 23세에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자(無字) 화두와 씨름한 지 9년만에 용성 스님의 인가를 받고

입실제자(入室弟子)가 된 것이다.

위 문답에서 용성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한 질문은

육조혜능 스님이 남악회양 스님에게 던진 공안과 같다.

이 질문에 회양 스님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여

인가를 받았고, 인곡 스님은

“이러한 물건이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답하여 인가를 받았다.

회양 스님과 인곡 스님의 대답은 서로 다름에도 똑같이 인가를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 뭣고?’ 화두의 대상인 ‘한 물건(一物)’은 시간과 공간, 생과 사를 초월한

‘그 무엇(거시기)’이기에 뭐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맞지 않지만,

 이름 붙이지 않고 쓴다(作用)면 또한 ‘거시기’ 아닌 적이 없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보고 듣고 쓰는 그 모든 것이 ‘거시기’이지만,

깨닫지 못한 이에게는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는 것이다.

모기 주둥이 처럼 공안에 들이대는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한 물건’에 대한 용성 스님의 법문을 가슴 깊이 새기며 있는 힘껏 참구해 보자.

“이 물건은 육근(六根)으로 이뤄진(構造) 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 없이 항상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상관 없이 항상 있으며, 공(空)하고 공하지 않은 것에

상관 없이 항상 있다. 허공은 없어져도 이 물건은 없어지지 않는다.

밝은 것은 무량한 일월로도 비준할 수 없고, 검은 것은 칠통과도 같다고 할 수 없다.

참으로 크도다. 천지세계와 허공을 다 삼켜도 삼킨 곳이 없다.

참으로 작은 것이다. 가는 티끌에 들어갔으되, 그 티끌 속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하고 단지 의심하여 불지어다.”(수심정로)


- 현대불교에서



 
10. 밤에 듣는 인디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