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선 불사악

2018. 11. 10. 14: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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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태종 황제 때에 서울에 있는 절에 화재가 일어나서 대장경이

일시에 소실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황제가 어떤 승려에게 물었다

   “옛날에는 마등가와 축법란이 가지고 온 불경은 타지 아니하였는데

금일에는 수만권의 대장경이 도리어 다 타고 말았으니 어찌된 셈이냐?”

하니 승려가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날 황제가 아침 정사를 파하고 승려의 발우를 손에 들고 앉아서

승상인 왕수에게 물었다.

 “이 발우는 이미 대유령(大庾嶺)고개에서 들지 못하던 것인데 어찌하여 도리어

짐의 손에 들이고 있느냐?” 하니 승상 왕수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 일찌기 마등 법사와 축법란이 사십이장경과 불도상을 모시고 와서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니 도교를 신봉하는 도사들이 시기하여 불교와 도교와의

우열을 비교하여 보자고 황제에게 간청하여 불교와 도교의 경전을 태워서

타지 않는 것으로 결승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수십권의 도교장서는 다 타버리고 한권밖에 없는 불경은

표지만 끄을리고 타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 육조혜능 대사가 행자시절에 오조홍인 대사의 심인(心印)을 얻고

그의 신표로 발우를 받아가지고 칠백대중의 시기를 피해 야반도피를 하여

구강을 건너서 대유령에 도착하였는데, 아침에 대중이 이 사실을 발견하고

발우를 빼앗아 오려고 각처로 달려갔다.

그 가운데 장군이라는 말을 듣는 혜명 스님이 대유령까지 추적하여 행자를 보고

말우를 내놓고 가라 하니 행자가 발우를 석상에 놓고 은신하였는데,

혜명이 아무리 힘을 다하여 들려고 해도 들리지를 아니하였다.

혜능 행자가 보고 그 발우는 이심전심의 믿음을 표한 것인데 힘으로 빼앗으려고

하느냐 하니. 혜명이 감복하고 말하되,

  “나는 행자의 법을 받으러 온 것이지 발우를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그리고 법문을 해달라고 하였다. 이 때에 행자가 말하되.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또한 생각하지 말라!(不思善不思惡)

어떤 것이 상좌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냐?”

고 하였더니 혜명이 깨쳤다고 전해온 말이다.

태종이 이러한 두 사실을 들어서 승려와 왕수의 경지를 시험하여 보려고 한 것이다.

- 오등선원


무소득무소구(無所得無所求)


선종 황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승려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황벽(黃檗) 스님이 불전에 예배하는 것을 선종이 보고 물었다.


“선가에서는 불에 착하여 구하지고 아니하고, 법에 착하여 구하지도 아니하고,

승단에 착하여 구하지도 아니한다(不着佛求 不着法求 不着僧求)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구하여 절하는가?” 한다, 황벽 화상이 답하되,

“불에 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 법에 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

승단에 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 항상 이와같이 절할 따름이니라.”

하였다. 선종이 다시 물었다.

“불전에 예배하는 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하였더니, 황벽 화상이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 갈긴다, 선종이 말하되,

“대추사문(大?沙門, 매우 거친 사문)이로군.”

하였다, 황벽이 말하되,


“이 속에 무엇이 있다고 추(?)니 세(細)니 말할 것이 있는가.”

하고 황벽이 손바닥으로 또 한대 갈겼다.


평왈:   불착불구(不着佛求)하고 불착법구(不着法求)하고 불착승구(不着僧求)이니,

구하는 바가 있으면 사욕을 충족함이라, 결정코 예불, 예법, 예승이 아니로다.

 선종이 아직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구할 바가 없으면 삼보에게 예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무구무득(無求無得)하여 일체의 욕념과 망상이 없는 것이 곧

 진실로 삼보에게 예배하는 것이다.

일체의 망상과 욕념이 없는 것이 이 불심이요, 불행(佛行)이거니, 어떤 부처가 감응하지

아니할 것인가! 우리들의 행위가 불심에 계합하면 예불이 되는 것이요,

 우리들의 행위가 법칙에 합하면 법에 예배함이 되는 것이요, 우리들의 행위가 화합도를

따르면 이것이 승단에 예배함이 되는 것이다.


-『벽암집(碧巖集)』-



수행자가 조금이라도 구함이 있고 얻을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그는 학인(學人)에

불과하다. 반대로 불심(佛心)에 계합하여 부처행을 하지도 못하면서, 구할 바 없고 얻을 바

없다며 멋대로 지껄이고 막행막식하는 놈들은 수행을 포기한 교만한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면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턱 막히는 막막함을 느낄 것이다.

 ‘깨달음을 구하지도, 얻으려 하지도 말라 하니 공부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쓰벌!’

하고 열만 받는다.

하지만 여기서 헛갈려 길을 잃으면 안된다. 구함이 없이 구해야 하고, 닦는 바 없이 닦아야

하고, 얻을 바 없이 증득해야 한다. 억지로 말하자면, 일체의 망상과 욕념이 없이 구해야

하고 얻어야 한다.

 조금의 머뭇거림과 집착, 분별, 후회도 없이 구한다는 생각 없이 구해야 한다.

물론 ‘구해야 한다’는 말이 이미 천지현격으로 어긋난 말이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면

벌써 십만팔천리다. 오로지 간절하고 간절하고 간절하고 또 간절한 마음이면 족하다.

이렇게 구하는 바 없이 구하고 닦는 바 없이 닦다 보면, 얻을 바 없는 법을 증득한다는

의미를 아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쯤이면 이런 말들이 군더더기이자 공연한 헛소리임을 알 것이다.


 
    밤에 듣는 인디음악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