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 10:3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혜적과 혜연[惠寂惠然]
[수시]
하늘로 통하는 관문을 뒤흔들고 지축(地軸)을 뒤엎으며, 범과 무소를 사로잡고
용과 뱀을 가려내는 팔팔한 놈이어야 구절마다 투합되고 기틀마다 상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였을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앙산(仰山)스님이 삼성(三聖)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명분과 실상을 모두 빼앗는다. 도적을 끌여들여 집안이 망하였구나.
“혜적(慧寂)1)입니다.”
-혀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네. (적군의) 깃대도 빼앗고 북도 빼앗아 버렸다.
“혜적은 바로 나다.”
-각자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군.
“저의 이름은 혜연(慧然)입니다.”
-시끄러운 저자 속에서 빼앗겼다. 피차가 각각 본분을 지켰다.
앙산스님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상황에 딱 들어맞는 기연이라 말할 만하군. 금상첨화이다.
천하 사람들이 귀착점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국토는 넓고 사람은 적으며
서로 만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암두스님의 웃음과 닮았지만 암두스님의 웃음도 아니다.
똑같은 웃음인데 무엇 때문에 서로 다를까?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다.
[평창]
삼성(三聖)스님은 임제(臨濟)스님 문하의 큰스님이시다.
어려서부터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며 큰 기틀[大機], 큰 작용[大用]이 있어,
대중 가운데 우뚝 솟아 짱짱했으며 사방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뒤 임제스님을 하직하고 회해(淮海) 지방을 두루 행각하였는데,
이르는 총림마다 모두 큰스님으로 그를 대접하였다.
그후 북쪽 지방을 떠나 남방에 이르러 맨 먼저 설봉(雪峰)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잉어는 무엇을 먹이로 해서 낚을까요?”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올 때 말해주겠다.”
“1천 5백 명을 거느리는 선지식이 화두도 모르다니.”
“노승은 주지 일이 바빠서······.”
뒷날 설봉스님이 사찰의 장원(莊園)으로 가는 길에 원숭이를 만났다.
이에 삼성스님에게 말하였다.
“이 원숭이가 각기 하나의 옛 거울[古鏡]을 차고 있다네.”
“오랜 세월을 지내오도록 이름조차도 붙일 수 없었거늘 어찌 옛 거울이라 하십니까?”
“(거울에) 흠집이 생겼구나.”
“1천 5백 명을 거느리는 선지식이 화두도 모르는군.”
“잘못했다. 노승은 주지 일이 바빠서······.”
그 뒤 앙산스님에게 이르자 앙산스님은 준수하고 영리한 그를 몹시 사랑하여
밝은 창문 아래(수좌 소임)에 앉도록 하였다.
하루는 어떤 관리가 찾아와 앙산스님을 참방하자, 앙산스님이 물었다.
“무슨 관직에 계시오?”
“추관(推官 : 감찰관리)에 있습니다.
앙산스님이 불자를 곧추세우면서 말하였다.
“이것을 감찰할 수 있겠오?”
관리가 대답이 없자, 여러 대중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두 앙산스님의 뜻에 맞지 않았다.
때에 삼성스님은 몸이 불편하여 연수당(延壽堂)에 머물러 있었다.
앙산스님이 시자(侍者)를 보내어 이 말을 그에게 물어보도록 하였더니, 삼성스님은 말하였다.
“(본래 無事이거늘) 화상께서 일삼고 계시는군.”
다시 시자를 보내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다시 묻자,
“다시 범하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당시 백장(百丈)스님은 선판(禪板)과 포단(蒲團)은 황벽(黃蘗)스님에게,
주장자와 불자는 위산(?山)스님에게 부촉하였는데, 그 뒤 위산스님은 앙산스님에게
이를 부촉하였다.
앙산스님이 이미 삼성스님을 크게 수긍하였는데, 하루는 삼성스님이 하직하고 떠나려 하자,
앙산스님이 주장자와 불자를 전해주니, 삼성스님은 말하였다.
“저에게 스승이 있습니다.”
앙산스님이 그 이유를 물어보니, 곧 임제스님의 적자(嫡子)였다.
앙산스님이 삼성스님에게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는데, 그가 이름을 알았을텐데
무엇 때문에 다시 이처럼 물었을까?
그러므로 작가가 사람을 시험하려면 자세히 그를 알아야한다.
그러기에 무심하게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어 완전히 계교상량을 없앴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삼성스님은 혜연이라 하지 않고 혜적이라고 말했을까?
살펴보면, 안목을 갖춘 사람은 자연 (보통사람들과) 같지 않다.
삼성스님이 이처럼 말한 것은 전도된 것이 아니라 대뜸 적군의 깃발을 빼앗고 북을
빼앗은 것이다. 본뜻은 앙산스님의 어구(語句)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상정(常情)에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놈의 솜씨가 있어야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활구를 참구해아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상정(常情)을 따른다면 사람을 쉬게 하려 해도
쉬질 못한다.
살펴보면 옛사람들?? 이처럼 도를 생각하며 정신을 다한 후에야 비로서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깨친 뒤 이를 활용할 때에도 결국은 깨닫기 이전의 시절과 흡사하여, 상황에 딱딱
들어맞아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상정에 떨어지지 않았다.
삼성스님은 앙산스님의 귀착점을 알고서 대뜸 그에게 말하였다.
“나의 이름은 혜적입니다”라고. 앙산스님은 삼성스님을 (덫을 놓아) 잡아들이려고 하였는데,
삼성스님이 거꾸로 앙산스님을 잡아들인 것이다.
앙산스님은 완전히 당하여 벌거숭이가 되어 말하기를 “혜적은 바로 나라네”하였다.
이는 (상대를) 놓아준 것이며, 삼성스님이 “나의 이름은 혜연입니다”한 것 또한 놓아준 것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뒤에 송에서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무슨 종지인가?”
라고 하였으니, 이 한 구절로 일시에 송을 끝마친 셈이다.
앙산스님은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는데, 이 또한 권(權), 실(實)이 있고, 조(照), 용(用)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팔방이 영롱하게 빛났기 때문에 활용함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웃음은 암두스님의 웃음과는 다르다. 암두스님의 웃음에는 독약이 있었으나,
이 웃음에는 천고만고의 맑은 바람이 늠름하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이 무슨 종지인가?
-몇 사람이나 그를 알까? 팔방이 영롱하다. 하마터면 이런 일이 있다고 여길 뻔했다.
호랑이를 타는 목적은 공(功 : 인위적인 조작)을 끊는 데 있다.
-정수리에 외알눈이 있고 팔꿈치 위에 호신부(護身莩)가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호랑이를 타는 것은 나쁘지 않으나 내려오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일’을 밝힐 수 있겠는가.
실컷 웃어제치고 어디로 갔을까?
-9주 400군(九州四百軍 : 趙, 宋의 행정구역)을 다 뒤져도 이러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말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천고만고에 맑은 바람이다.
천 년이 지나도록 자비의 바람 진동하리.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쯧쯧! 벌써 큰 웃음을 웃었는데 무엇 때문에 자비의 바람을 일으키랴!
대지가 캄캄하구나.
[평창]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이 무슨 종지인가?”라는 것은, 잡아들이고 놓아주고
하여 서로서로가 빈(賓), 주(主)가 된다는 것이다.
앙산스님이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하자, 삼성스님이 “나의 이름은 혜적입니다”한 것은
놓아준 것이며, 앙산스님이 “혜적은 바로 나다”고 하자, 삼성스님이
“저의 이름은 혜연입니다”한 것은 잡아들인 것이다. 실로 이는 서로서로가 교환한 기봉이다.
잡아들이면 모두 잡아들이고 놓아주면 모두가 놓아주니, 이로써 설두의 송은 일시에 끝나버렸다.
그가 의도한 바는 “놓아주거나 잡아들이지 않아 서로가 교환하지 않는다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혜적, 혜연이라는) 네 글자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그 안에서 놔주었느니
잡아들였느니 하며, 또 쥐었느니 풀어헤쳤느니 하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은
“그대가 서면 나는 앉고 그대가 앉으면 나는 서버린다. 함께 앉고 함께 서게 되면
둘 다 눈뜬 장님이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잡아들이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니, 이 무슨 종지인가?”이다.
“호랑이를 타는 목적은 공(功 : 인위적인 조작)을 끊는 데 있다”는 것은, 이처럼 고고한
풍채야말로 으뜸의 솜씨[機要]이므로 타려거든 단박에 타고 내리고 싶으면 문득
내리면서 호랑이 머리에 올라타기도 하고 호랑이 꼬리를 잡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스님과 앙산스님 두 사람 모두 이러한 기풍이 있었다.
“실컷 웃어제치고 어디로 갔을까?”라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그가 웃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는 곧 맑은 바람 늠름한 경지인데, 무엇 때문에 끝에서 갑자기
“천 년이 지나도록 자비의 바람이 진동한다”고 말하였을까? 이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조문도 안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일시에 주해를 붙여주어버린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한마디하려 해도 지껄이지 못하고 귀결처를 모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 산승도 귀결처를 모르겠는데 여러분은 아시겠는가?
<벽암록>(송찬우 역, 장경각) 중에서
1) 삼성본에는 ‘慧’자가 ‘惠’자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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