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8. 13:4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수시]
부처와 중생은 본디 차이가 없는데 산하와 자기가 어찌 차등이 있겠는가?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는 것일까?
만일 화두를 잘 다스리고 굴리며 요새가 되는 길목을 꽉 틀어 막는다면 조금도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실수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 어디에서라도 조금도
까딱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화두를 잘 다스리고 굴리는 것일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운문스님이 주장자를 가지고 대중에게 설하였다.
-때에 적절하게 교화하는군. 사람 죽이는 칼이기도 하고 사람 살리는 칼이기도 하다.
그대의 눈동자를 바꾸어버렸다.
“주장자가 용으로 변하여
-뭣하러 번거롭게 그러냐! 변하여 무엇할까?
천지를 삼켜버렸으니
-천하의 납승들이 목숨을 보존치 못한다. 목구멍을 막았느냐?
(운문)스님은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려는가?
산하대지는 어디에 있느냐?”
-시방에는 창도 없고 사면에도 문이 없다. 동서남북 사유(四維 : 사방) 상하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미친 소리다. 이를 어찌하랴?
[평창]
에, 그런데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주장자가 용으로 변하여 천지를 삼켜버렸으니 산하대지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니,
(산하대지가) 있다고 하면 눈먼 봉사이며, 없다고 하면 죽은 놈이다.
운문스님이 사람을 지도했던 뜻을 알았느냐? 나에게 주장자를 돌려다오.
요즈음 사람들은 운문스님이 뚜렷하게 보여준 것을 모르고서,
“색계(色界)에 의지하여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의지하여 이치를 밝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석가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심에 잘못된 논의가 세상에서 일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 못 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무엇 때문에 또다시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
가섭은 미소를 지었을까? 부처님께서 설명을 붙여 말하기를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대가섭에게 전하노라”
라고 하셨는데, 왜 다시 굳이 심인(心印)만을 전하였을까?
여러분이 이미 조사의 문하객이 되었는데 오로지 그것만을 전한 마음을 밝힐 수 있느냐?
가슴속에 한 물건이라도 있으면 산하대지가 들쑥날쑥 눈앞에 나타나겠지만,
가슴속에 한 물건도 없다면 밖으로 실오라기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치와 지혜가 그윽히 합하고, 경계와 회합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이유는 하나를 알면 일체를 알고, 하나를 밝히면 일체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장사(長沙)스님은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눈앞의
식신(識神)에 의지해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무량겁 동안 내려오는 생사의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본래인(本來人)이라 한다”고 하였다.
홀연히 5음(五陰) 18계(十八界)를 타파하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몸밖에 남은 것이 없다 하여도 그것은 절반밖에 얻지 못한 것인데 어떻게 색계에 의지하여
마음을 밝히고 사물에 의지하여 이치를 밝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제19칙 참조)이 말하기를 “한 티끌만 일어도 온 대지가 모두 생긴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어느 것이 한 티끌인가를. 이 한 티끌을 알 수 있다면 이 주장자를 알 것이요,
주장자를 들 수만 있다면 종횡으로 자재하는 오묘한 작용을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말하는 그것 자체가 벌써 언어문자의 갈등인데 하물며 또다시 용으로 변한다는
등의 말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경장주(慶藏主)는
“일찍이 5천48권의 모든 불경 어디에 이런 말이 있더냐?”고 말하였다.
운문스님은 주장자를 들어 모이는 곳마다 전기대용(全機大用)으로 생동감 있게 사람을 지도했었다.
파초(芭蕉)스님은 대중에게 말하기를 “납승의 본분은 모두 이 주장자에 있다”하였고,
영가(永嘉)스님은 “이는 겉으로 괜히 관직을 버리고[?]1) 출가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여래의 보장(寶杖)을 몸소 본받은 것이다”고 하였다.
석가여래께서 지난날, 연등(燃燈)부처님이 세상에서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고서 연등부처님을
기다리자 연등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곳에 범찰(梵刹)을 세울지니라.”
그때에 한 천자가 한 줄기 풀로 표시한 뒤에 말하였다.
“청정한 가람을 세웠습니다.”
여러분은 말해보라, 이 무슨 소식인가를. 조사(설두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방 얻어맞고 깨침을 얻고 일할(一喝)에 알아차린다”고 하였으니, 말해보라,
무엇을 알아야 할까.
혹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주장자야?”고 묻는다면, 이는 곤두박질치는 것이 아니겠으며,
한 차례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모두가 망상분별이다.
아뿔사! 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주장자가 건곤을 삼키나니
-무슨 말을 하느냐? 개를 때리는 데나 쓰겠다.
복사꽃 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하랴.
-향상의 한 구멍을 열어제치니 모든 성인이 일제히 아래에 서 있다.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천 번 만 번 말하는 것이
자기의 손발로 직접 한 번 잡는 것만 못하다.
꼬리를 태운 놈이라 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하거늘
-좌지우지 하건만 노승은 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하나의 마른 나무 조각일 뿐이다.
뱃 속의 부레를 말리는 놈[曝2)? : 용이 못 된 잉어]이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쏘냐!
-사람마다 기상이 임금과 같은데 그대 스스로가 천 리 만 리 멀어질 뿐이다.
오싹하게 ?管좆? 걸 어찌하랴?
이로써 법문은 다했데.
-자비에 감사하노라. 노파심이 간절하다.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어리석은 짓 했네. 들어봐야 무엇 하려구?
깨끗하여 말쑥해야 하니
-먹다 남은 국물이며 쉰 밥이다. 건곤 대지를 어느 곳에서 찾겠느냐?
다시는 어지럽게 하지 말라.
-법령을 내세운 자가 먼저 범한다. 순서가 되어 그대의 머리 위에 이르렀다.
(원오스님이) 치면서 말한다. 용서해줘서는 안된다.
일흔두 방망이도 또한 가벼운 용서이니
-산승은 일찍이 이 법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법령에 따라서 집행하는구나.
산승을 만났기 망정이지.
1백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주기 어렵다.
-제대로 법령을 시행해야 하는데 어찌 이같이 끝내서야 되겠는가?
설령 아침에 3천 번을 치고 저녁에 8백 번을 때린다 해도 안 될 거 없다.
갑자기 (설두)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법좌에서 내려오니, 대중들이 모두 흩어졌다.
-설두스님은 용두사미였다. 무얼 하려는가?
[평창]
운문스님은 자세하게 사람을 지도하였고, 설두스님은 지름길로 사람을 지도하였다.
그러므로 “용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팽개쳐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만
“주장자가 건곤을 삼켰다”고 말하였다. 설두스님의 의도는 사람들이 망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없애주는 데 있다.
다시 말하기를 “복사꽃 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하랴”하였으니, 이는 또다시
용으로 변화시킬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저, 우문(禹門) 폭포에 세 단계의 폭포가 있는데,
3월이 되면 복사꽃이 피고 봇물이 크게 불어난다. 이때 물을 거슬러 폭포를 뛰어넘어가는
잉어는 용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설령 용이 되었다 해도 부질없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꼬리를 태운 놈이라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하거늘”이라는 말은, 잉어가
우문 폭포를 뛰어넘으면 자연히 번개가 쳐서 꼬리를 태워주며,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고서 날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설두스님이 말한 의도는 “설령 용이 되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한다”
는 것이다.
“뱃 속의 부레를 말리는 신세가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소냐”고 하였는데,
청량(淸凉)의 <화엄소서(華嚴疏序)>에서는 “수행을 쌓은 보살이라도 용문에서 부레를
말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의 대의는 화엄의 경계란 작은 덕[小德], 작은 지혜[小智]
로서는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는 마치 잉어가 용문 폭포를 뚫고 지나가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마에 점이 찍힌 채
다시 돌아와서는 썩은 물 모래 더미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뱃 속의 부레를 태워서 죽는 것과
같은 꼴이다.
설두스님이 말한 의도는 “어차피 이마에 점이 찍혀 되돌아왔으면 왔지 정신까지 잃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로써 법문은 다했네.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고하여 거듭 주석을 내리고 일시에 그대들을
위하여 말끔히 쓸어버렸다. 여러분은 곧바로 깨끗하여 말쑥하게 할지언정 다시는 어지럽게
하지 말라. 그대들이 또다시 어지럽게 한다면 주장자를 잃어버릴 것이다.
“일흔두 방망이 또한 가벼운 용서”라는 것은 설두스님이 그대들을 위하여 무거운 벌을
그만두고 가벼운 벌을 준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흔두 방망이을 두 배하며 1
백50 방망이가 된다”고 하였는데, 요즈음 사람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 숫자에 얽매여
계산하여, “일흔다섯 방망이어야 하는데 왜 일흔두 방망이냐”고 한다.
이는 옛사람의 뜻이 말밖에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일’은 언구(言句)
가운데 있지 않으니 후인의 천착을 없애주고자 이를 말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이 때문에 이를 인용하여 “설령 참으로 깨끗하여 말쑥해졌을 때 그대에게
일흔두 방망이를 때려도 오히려 가벼이 용서한 것이며, 가령 그렇지 않고 1백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주기 어렵다”고 하여 일시에 송을 끝낸 것이다.
그러나 문득 다시 주장자를 들고서 거듭거듭 차츰차츰 지도를 했다.
그러나 살 속에 피가 흐르는 놈이 하나도 없구나.
1) ? : 음은 馳이다.
~2) 曝 : 薄자와 報자의 반절. 음은 僕. 햇빛에 타는 것을 말한다. 暴자와 통용된다.
<벽암록>(송찬우 역, 장경각) 중에서
송창식 Be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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