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 국방부 원광사 환송법회 법문-2 (2018. 12.09) 녹취 by 하이얀마음
우주의 법칙, 공명의 법칙, 끌어당김의 법칙
내 마음속에 내가 깨닫겠다는 발심(發心)을 하면 저절로 우주법계가 내가 먹은 마음과 공명(共鳴)하는 같은 주파수의 파동을 우주로부터 끌어다 내게 가져다줍니다. 내게 선물해줍니다. 돈에만 마음이 관심있는 사람은 돈만 계속 눈에 띄겠지요. 출세간에 마음을 둔 사람은 출세간에 저절로 마음이 갑니다. 우주(宇宙)의 법칙은 공명(共鳴)의 법칙이에요. 같은 주파수 같은 진폭 같은 파장의 파동(波動)하는 에너지는 같이 모여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좋은 도반은 좋은 도반을 끌어당기게 돼있고, 법(法, 진리)은 법(法, 진리)을 끌어당기게 돼있습니다. 우주의 법칙, 공명의 법칙이라는 끌어당김의 법칙의 핵심(核心)이 뭐냐하면, 내 마음에서 연습하는 것, 그것이 우주로부터 끌어당겨지게 돼있는 것있니다.
이 우주의 법칙, 공명의 법칙, 끌어당김의 법칙의 힘은 매우 강력합니다. 강력한 정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끌어당김의 힘이 그렇게 강력하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깨달음을 발심하고 있으면, 그 발심한 마음이 동시간대에 우주 끝까지 전파됩니다. 그래서 그 힘에 의해서 나에게 좋은 스승을 가져다주고, TV를 켜면 좋은 법문이 나오게 되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면 거기에서 또 좋은 법문을 발견도 하게 되고, 서점에 가서 책을 들쳤는데 놀라운 책을 보게 되고, 친구가 책을 한 권 선물해주는데 아주 놀라운 어떤 감동적인 법보시를 받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자기와 거래하는 상대방 거래처 사장님이 나를 인정을 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정도의 중요한 거래처 사장님이었데요. 너무 긴장을 하고 그 사장님한테 어떻게 하면 잘 보여야 되나, 나름대로 되게 막 애쓰고 이러셨는데, 그 분이 그 사장님 사무실에 갔더니 제(법상스님) 책이 있더래요. 그래서 “아니 저 분(법상스님)을 혹시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잘 안다고 하더랍니다. 뭐 개인적으로 잘 안다기보다는 저도 이 분(법상스님)의 법문도 많이 듣고있다고 그러더래요. 그런 대화가 있기 전에는 일이 있을 때 몇 번 만나주지도 않더니, 그 후로는 한 두 시간을 앉아서 서로 너무 신나게 얘기를 하기도 하고 너무 친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어딜 가든 그런 좋은 도반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마음속에 깨닫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주법계가 그런 사람들을 내게 끌어당겨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닫겠다는 발심만 하면 됩니다. 깨달음에 발심을 하게 되면 깨달음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인연들을 이 우주법계가 그냥 공짜로 가져다줍니다. 내 마음이 공명을 해서, 진리와 진리가 공명을 해서, 유유상종으로 같은 파동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좋은 도반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깨달음의 반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전부를 성취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했던 겁니다.
세 번째는 알아차림 입니다.
알아차림이란 위빠사나 수행에서 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 봐라'. '관찰해라'.'관해라'.이런 말입니다. 서양에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 마음챙김, 명상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라고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이라는 요즘에 세계적으로 아주 주목받는 이런 명상, 이게 100% 그냥 불교에서 말하는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음이란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입니다. 내 방식대로 내 생각대로 해석해서 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겁니다. ‘난 잘 살았서 못 살았어’ 분별하지 말고 '나는 그냥 산다' 그것이 제일 아름다운 겁니다.
때(오염)가 없는 거예요. ‘좋다’ 이것도 분별에 집착하는 때입니다. 삻어하는 거에 집착하는 것도 분별인 때입니다. ‘착한 것은 도(道)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착한 거 못된 거 라는 분별은 도(道)가 아니라는 겁니다. 착한 거에만 너무 사로잡혀 집착하는 사람도 자신의 인생이 괴로운 법입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고 괴롭습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할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못합니다. 꼭 움켜쥐고 있느라고. 그게 진짜가 아닌 것이지요. 착한 거 나쁜 거, 잘 산거 못 산거, 그거는 오염, 때입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게 진짜 '청정한 자리' 입니다. 때 한점 낄 자리 없는 공(空)한 자리, 텅~빈 자리 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 없는 게 진짜배기입니다.
그래서 절에 큰 스님들의 소임의 이름을 한주(閑主)라고 불러요. 한도인, 한가하게 지내는 주인공이다, 이 소리에요. 한가하게 노는 주인공이다. 한가하게 놀 수 있는 사람이 진짜 큰 스님입니다, 진짜 도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놀고 있느냐 하면 몸은 부지런히 일하지요. 그럼에도 마음은 항상 한가하게 쉬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 쉴뿐이지, 몸이 노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소유(無所有)라는 게 애써 벌어서 갖고있는 돈이나 재산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 열심히 벌라는 거예요. 사는 것과 그 결과 거기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소유(無所有)의 뜻입니다. 무소유(無所有)의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돈을 벌라는 겁니다. 불교를 공부하면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소외받고 아웃사이드가 되고 그냥 다 버려야 되니까, 이건 정말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에요. 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겁니다. 돈을 벌되 집착 없이 벌라는 것이고, 노력하되 거기에 과도한 집착 없이 노력하라는 겁니다.
무소유(無所有)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했을 때 더 큰 힘이 붙고, 더 큰 삶의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알아차림' 이 세 번째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겁니다. 분별하지 말고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무엇을 바라보던 그저 텅 빈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간들을 선물해주는 것이 '알아차림' 입니다.
네번 째는 '내맡김'입니다.
아까 먼저 말씀을 드렸듯이 내 안에 있는 근원(根源), 참 지혜, 무분별지(無分別智), 반야지혜(空의 지혜)에게 모든 것을 턱 내맡겨버리게 되면 내 사량분별하는 생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근원,참 지혜, 무분별지, 반야지혜가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그냥 내 생각대로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그 생각이 문제입니다. 이 말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생각을 하되 그 생각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바 없이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사실은 사량분별을 하는 생각도 내 안에 있는 근원, 참 지혜, 무분별지혜, 반야지혜 자리에서 나온 겁니다. 생각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 하나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강력한 어떤 생각이 났으면 그 생각대로 하면 됩니다. 그 생각이 일어난 것도 인연(因緣) 따라서 일어난 것이니까요. 또 어떤 영감어린 창의성이나 번뜩이는 뭔가가 일어났으면 그냥 저지르면 됩니다. ‘저질러라'라는 표현이 깨달음의 지름길이다 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뭔가를 아무 생각 없이 저질렀었던 일들이 이제 그 목탁소리 카페 있잖아요. 그거를 제가 그냥 안하려고, 안하려고 생각했어요. 저의 홈페이지 조그만 한게 있으니까 그것만 그냥 하면 돼지 생각하고 카페는 따로 안 한다 안 한다 하고 계속 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냥 갑자기 문득 한 생각이 그냥 강하게 일어나서 그냥 이것저것 계산 안 하고 그냥 카페 하나 만들어 놨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뭔가 이렇게 제가 책을 쓸 때도 그렇고, 뭔가를 할 때 보면 그냥 문득문득 일어나는 하나의 강력한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 남들에게 크게 피해주지 않는다면 그냥 저질러 해버리면 됩니다. 많이 고민하고 막 스트레스 받고 이걸 하면 좋아질까 나빠질까 너무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내 안의 근원에게 모든 걸 그냥 턱 내맡기게 되었을 때 그때는 지식(知識)이 나라고 하기보다는 가슴에서 뭔가 영감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창의성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 번뜯번득 거립니다..
그래서 가슴 뛰는 삶을 살라는 말은 사량분별하는 생각, 즉 머리가 주도하는 삶을 사는 대신 이 가슴이 뛰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힘든 사람을 보면 내 가슴에서는 ‘도와주고 싶은데’ 머리가 ‘야 도와주면 너는 어떻게 살려고’ 하는 등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잖아요. 그러지 말고 그냥 가슴을 존중해주는 삶을 살면 직관(直觀)이 오히려 더 무분별지에 가까울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그래서 내 안의 근원에 모든 걸 온전히 맡기고 살면 그게 말도 안 되는 인생 같지만, 되게 속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저는 20때부터 제 모토(motto:신조)가 그냥 맡기고 산다, 였어요.
제 아무리 괴로운 일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 괴로운 일은 생각으로 하면 괴로운 건데 그 괴로운 일 이면(裏面)에는 내 안의 근원, 법신 부처님(法身佛)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겉으로는 물론 좋고 나쁜 분별심에 이렇다 저렇다 다 반응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서는 나는 언제나 한 번도 법신부처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자리에 맡기고 사는 데 뭐가 두려울 것이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마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자기의 내면에게 자신의 부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면 정말 맘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완전히 맡기고 살 수가 있어요.
그러면 무리수를 과도하게 두지 않게 돼요. 삶을 살면서 뭐 아무리 욕심이 있어도 욕심나는 게 있으면 최선은 다하지요. 최선을 다하지만 과도한 욕심은 안 부리는 거지요. 그리고 남들에게 피해주면서까지 혹은 어떤 흐름을 거스르면서까지 막 그렇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지혜롭게 즐겁게 사는 방식입니다.
다섯 번 째로 사랑과 자비입니다, 즉 나눔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근원에서 볼 때는 어떻게 되었던, 제가 아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돈을 많이 벌었어요. 많은 신실한 불자들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도취해있다 보니까 돈을 많이 벌어도 내가 나를 위해서 돈을 막 쓰는 거 이걸 되게 죄의식을 갖고 써요. ‘내가 이렇게 과도하게 사는 건 좀 너무 사치스러운 게 아닐까’ ‘내가 진정한 불자가 아닌 거 아닐까’하면서 말입니다.
‘주윤발이 처럼 내가 돈을 아무리 벌어도 올 해 한 7만원만 쓰고 좁은 집에 살고 뭐 이래야 되는 게 진짜 불자가 아닐까’ 이런 두려움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요. 주윤발의 삶은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요. 그건 그것대로 복 짓는 일이니까,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누리고 싶다. 누가 봐도 내가 열심히 번 돈인데, 나도 누리고 싶어. 나도 좀 좋은 차도 하나 사고 싶고, 나도 좋은 집하나 사고 싶어, 그런 마음이 생겼다. 그러면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그걸 죄의식을 가지고 할 필요는 없단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석가모니부처님도 그렇게 법문하셨거든요. 장자(長者)들에게는 부자 되는 방법을 설명했고요. 임금에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설명해줬습니다. 농부에게는 농사짓는 방법을 설명해주었고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돈을 버는 사람은요, 돈을 버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 경제 쪽에 뛰어든 겁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것을 통해 삶의 진실을 깨달아가기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저마다 자신이 처한 곳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돈을 벌어 돈을 좀 누리고 싶을 때가 있으면 죄의식 없이 누려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돈 쓰는 것을 누려본 사람은 이제 누려봤기 때문에 돈에 집착이 없어질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 베푸고 나누는 것도 더 잘 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려보는 것을 통해 삶의 지혜를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배울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무엇을 해도 사실 괜찮습니다. 마음껏 여행을 가고 싶다면 여행을 가도 좋습니다. 왜냐면 이 세속적인 삶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파도가 크게 치나 작게 치나 그게 뭔 의미가 있습니까, 바다가 진짠데. 그마찬가지로 돈을 많이 버나 적게 버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안의 근원, 법신, 참 지혜, 반야지혜, 무분별지혜가 진짜인데... 돈을 많이 쓰는 시기를 보내거나 적게 쓰는 시기를 보내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 그게 파도라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돈을 많이 벌어 많이 쓰던 적게 벌어 적게 쓰던 그거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그 이면에 진짜 이 바다에 뜻이 있느냐, 발심한 이 참된 진실의 뜻이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나와 네가 둘이라고 분별을 하기 시작하면 둘로 나누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부자가 돼야 되고 더 잘나가야 되고 이런 생각들이 들게 되다 보니까, 베풀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나눠줄 수가 없어요. 내가 당장 급해 죽겠는데 남들을 사랑할 정신이 있겠습니까. 남들에게 베풀 마음이 있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뭔가 남의 거를 어떻게든 내가 얻어야지 하는 마음은 가난하고 궁핍한 마음이 연습이 되서 더 가나해지고, 뭔가 나누어 줘야지 사랑이든 자비든 뭐든지 나누어주고 베풀어줘야지 하는 마음은 풍요로움이 연습이 되서 더 풍요로워집니다. 그래 더 나누어주면 나누어줄수록 점점 더 우주법계에 풍요가 저축이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좋은데, 그것이 될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었으면 좋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면, 그렇게 세상과 남들에게 베풀고 나누고 사랑을 한 명에게라도 베풀어주는 그런 삶을 살게 되면 그런 마음이 연습이 되어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중도(不二中道)가 연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거를 챙기는 마음은 집착과 삼독심(탐심, 진심, 치심)이 연습되는 마음인데, 나누는 마음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 라는 게 연습되는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이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 것, 복을 짓는 것이 그대로 지혜와 둘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제가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받아들임, 허용함, 섭수(攝受), 받아들일 수(受)
2. 내려놓음, 방하착(放下着), 놓아버릴 방(放)자를 썻습니다.
3. 알아차림,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관(觀)
4. 내맡김, 맡길 임(任)자, 내 안의 근원에 완전히 맡겨라.
5. 보시하는 삶, 나누는 삶을 살아라.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삶을 산다.
이것만 생각을 하셔서 이제 생활 속에서 누가 나한테 막 시비를 걸고 막 그냥 그런다. 아니면 내 자식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그럴 때 항상 이 다섯 가지를 한번 딱 적용을 시켜보는 겁니다. 괴로운 일이 생겼다, 누가 나한테 시비 걸고 욕을 한다, ‘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저걸 그냥 해석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TV속에서 막 맛깔스런 욕이 나올 때 우리 괴로워하지 않거든요. 똑같은 욕설이 나왔는데 TV에서 나오는 욕 소리에는 내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욕을 하면 우리는 반응을 해요. 저 사람이 나한테 욕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내가 반응하고 안 하는 내 문제지. 그러니까 저 사람이 나한테 욕하고 욕 안하고는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허용해줘 버리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건 자기 마음이지 내 마음이 아니거든요. 내 생각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딴 사람 말과 생각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허용해주는 것이지요. 아프면 아픈 걸 허용해주는 게 더 빠른 치유의 길입니다.
빨리 힘든 걸 없애 야지가 아니라 힘들 때 힘든 걸 허용해주는 게, ‘그래 마음껏 와라, 내가 마음껏 힘들어해줄게’ ‘마음껏 아파해줄게’ 그래서 이렇게 받아들이고 아, 그래 저 사람에 대한 미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바로 놓아버리고, 그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자. 있는 그대로 보면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해서 욕한 게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해석할 필요 없다. 그냥 그걸 있는 그대로 소리 파동으로만 듣자. 있는 그대로 관찰합니다. 그리고 내가 화나는 마음 저 사람 미운 마음, 모든 걸 부처님께 맡겨버리자. 내가 욕 얻어먹은 게 아니다, 나라는 게 없는데. 맡겨버리자, 부처님이 하는 일이다 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일이다 하고 탁 맡겨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비와 사랑을 그 사람에게 베푸는 거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뭐 좀 힘들게 해서 참 죄송합니다.” 하고 오히려 그 사람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오히려 더 미안해서라도 내게 더 잘해주고 그렇게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 식으로 마음씀씀이를 이렇게 다섯 가지 생활 수행의 길로 해주시면 조금 더 공부하시는데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께 정말 진심으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