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삼박자|…… 혜천스님설교

2019. 1. 20. 16: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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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5116 

기도의 삼박자

 

 

지난 번에 수행에 대해서, 수행의 3박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주는 10일은 친구들의 수능이 있고, 12일에 임용시험도 있어 기도의 삼박자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존재했을 거예요. 왜 그러냐하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자연을 의지해 살면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 얻어서 생명을 유지했기 때문에, 반드시 내가 사냥을 나간다할지라도 사냥을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내가 무엇을 구하러 나갔다고 해서 반드시 무엇을 구한다는 보장이 없죠.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 사냥이 잘 되기를 기원했고, 채집이 잘되기를 기원했죠, 마 그것이 종교의 기원이죠. 후대에 오게 되면 단순한 것에서 좀 더 치밀해지고, 정밀해지죠.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손바닥에서 불이 나도록 빌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 아들이 요번에 대과에 급제할 수 있도록 봐주십시오.”하고 빌었죠. 기도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보면, 빈다는 거죠. 그저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 마 그게 기도죠인도에서는 바라문들이 이걸 굉장히 정밀화시켰습니다. 정밀화시켜서 주술이라는 하는 것을 개발했죠. 그래서 주문을 외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바라문들이 수술을 한 이유는 신에게 기도를 하는데, 그 주문을 외우면 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원래 옛날 인도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주술이죠. 사실 부처님은 이 주술을 비판했어요.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항상 기도를 하죠. 우리가 지지난 주에 봉정암에 올라갔더니 많은 분들이 올라와 기도를 하고 계셨어요. 어떤 할머니는 깔딱 고개에서 진짜 숨이 깔딱 넘어갈 뻔 했다고 하더군요. 같이 간 스님이 엎고 올라오다 시피 했다더군요. 어쨌든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우리가 기도를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고, 알고 기도하고 있을까?라고하는 의문과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죠.

 

불교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가 행해지는 것을 말해요. 무엇이 세 가지가 행해지는 것이냐? 하나는 마음이 행해지는 것, 또 하나는 몸이 행해지는 것, 또 하나는 입이 행해지는 것이죠. 첫번째는 심행(心行)입니다, 마음의 행. 두번째는 신행(身行)입니다, 몸의 행이죠. 세번째는 구행(口行)이예요. 입의 행, 우리의 요 입말입니다.

 

마음의 행이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그것은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은 마음의 행이예요. 우리가 신심라고 하는 말을 쓰잖아요? 믿는 마음, 그건 심행이예요.  믿음이 마음의 행이예요. 그거 우리가 믿는다고 할 적에 무엇을 믿는가? 단순하게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는 거죠. 천지신명을 믿고, 신을 믿고...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거죠.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거고, 동시에 내가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 그게 믿음이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 그런 뜻이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 거예요.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하셔.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냐? 우리는 보통 마음에 있다고 얘기해요. 부처님이 내 마음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처님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나는 언제나 부처님같이 살 수 있고, 나는 언제나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행할 수가 있겠죠. 그러나 부처님이 내 마음 속에 있진 않아요. 마음이 부처일리는 더욱 없죠. 단 부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왜그러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네가 있는 곳에 내개 있다고 했으니까.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죠.  

 

우리는 보통 여기까지는 믿음을 가져요. 여기서 한 발짝 나가서 내가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해야 되요. 그게 믿음이예요. 내가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내 자신이 확신하는 것, 그게 믿음이예요.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동시에 내가 부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 이게 믿음이예요.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확신이죠. 내가 부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  믿음은 확신이예요.

 

두번째, 신행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예배죠. 절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배한다고 절하잖아요. 매일 108배 한다는 분도 있고, 매일 천배를 한다는 분도 있고... 예배한다는 것은 절한다는 것이지만, 절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몸을 굽혀서 절하는 것을 뜻하진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분들이 108배를 하고, 천배를 하고, 삼천배를 하고, 만배를 하고,  어떤 분은 10만배, 100만배를 했다고도 하는데, 참 그 노력이 가상스럽기는 하나 그저 굴신운동에 가깝죠.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절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면, 헌신하는 것을 말해요. 예배라는 것은 헌신하는 것. 무엇에 헌신하느냐? 부처님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것을 말해요.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면, 부처님이 나와 함께하는 사람을 말했잖아요. "어떤 사람이 천리, 만리 나와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내 가사자락을 잡고, 내 그림자를 밟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부처님이 얘기하고 있어요. 나와 함께하는 사람은 가삿자락을 잡고 있는 사람, 즉 부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몸이 부처님과 가까와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부처님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설사 몸이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죠. 예배한다는 것,  절한다는 것은 헌신한다는 것을 말하죠. 헌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그 삶을 따라 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행이라고 하는 것은 찬탄을 말하죠. 부처님의 권능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것, 그게 구행입니다. 찬탄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입 꾹 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을 말하는 거와 같죠. 옛날 분들은 평생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어요. 옛날 남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줄 몰라서기도 했지만, 동시에 실제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욕먹을 소리인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옛날에는 지금처럼 사랑해서 연애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즉 하트가 수없이 그려져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집안과 집안이 정략적으로 혼약을 맺고, 신랑과 신부는 초례청에서 처음 만나죠. 처음 만난 남자와 처음 만난 여자가 10시간도 안되어 신방에 들어가는 그런 체제죠. 그것이 풍습이고, 문화고, 그럴 수 밖에 없어서 살았던 것이지, 우리 현대인들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차이는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는 첩으로 두었죠.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는 정부인이 아니라 첩이었다는 거예요. 왜? 첩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골랐으니까요. 동양에서는 그랬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표현을 해야죠. 입 꾹 닫고, 자신이 가섭이라고 꽃을 드니 미소 짓는다(염화시중의 미소), 무슨 이신전심? 이런 건 아니죠.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여자와 남자 중 누가 더 사랑한다는 표현을 자주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오늘의 시험문제는 이겁니다? 남자가 사랑한다는 표현을 더 많이 했을까요? 여자가 더 많이 했을까요? 우리는 보통 여자가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미국의 예이긴 하지만, 무려 남자가 4배나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남자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하는 이유는 안봐도 뻔하죠. 남자는 사랑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잃을것이 없지만, 여자는 사랑을 잘못 선택하면, 잃을 것이 많죠.

 

마치 사랑도, 사랑한다고 하는 표현을 해야만이 감정이 격앙이 되요. 사랑이라는 것은 공감입니다. 사실. 마치 사랑을 표현하듯이 부처님에 대한  가르침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해 표현해 내는 것, 그게 구행입니다. 입으로 하는 거죠.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믿음, 예배, 찬탄입니다. 믿음은 확신하는 것, 예배는 헌신하는 것, 찬탄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예요. 

 

무조건 단순하게 무엇을 비는 것이 아니라. 물론 난 빈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겁니다. 아주 소박하죠. 그것이 아름답기는 하나 세련되지는 못했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으면, 안심 적요할 수 있죠.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심, 적요가 안되는 거예요. 확신이 안되기 때문에 안심이 안되고,확신이 안되기 때문에 적요가 안되죠.  안심이라는게 뭐예요? 마음이 편안한 거죠.  적요寂寥 란 것이 뭐예요? 고요 적 자, 생각 요 자. 생각이 가지런해서 동요되지 않는 것을 말하죠. 우리가 확신하면 안심 적요할 수 있습니다. 확신하지 못하면, 안심적요하지 못해 동요되죠. 동요되서 불안한 거예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는 것과 동시에 내가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확신하면 우리는 안심 적요할 수 있습니다. 불안하고 동요할 이유가 없죠. 내가 부처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나는 불국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뜻하죠. 부처님이 계신 땅에 내가 있는 것이고, 부처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는 곳이니, 그러니 무엇이 근심스럽고, 무엇이 걱정스럽고, 무엇이 두렵겠어요?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동요되는 거예요.

 

헌신하면 기뻐할 수 있죠. 헌신하며는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 헌신하면,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노동의 기쁨은 땀을 흘리는 거예요. 땀흘리고 나서 시원하게 샤워를 할 제, 그 기쁨. 헌신은 마치 노동과 같죠. 그것은 왜 러냐 하면 내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헌신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을 오르고, 달리기를 하고, 싸이클을 타고, 골프를 치고, 공을 차고 , 공을 때리고 이런 것은 다 몸으로 하죠. 다 땀을 흘리고. 그러고 나며는 상쾌해 지죠. 헌신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표현하면 행복하죠.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거예요. 표현하면 행복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표현하는 것이죠. 

 

우리가 꿀먹은 벙어리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입 꾸~욱 다물고 있으면 어찌 알겠어요? 고수는 고수가 알아본다고 하죠. 고수가 아닌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어요?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 고수들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고수가 아니예요. 이신전심한다고 하는 고수들은 우리가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 끼리 놀라고 놔두면 돼요.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사니까요.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은 뭐 눈만 꿈뻑꿈뻑해도 알아듣고, 이런다면야 얼마나 좋겠어요? "내맘 알제?" 니맘이 어떤지 내개 어떻게 알겠어요? 우리 속담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 속은 알지 못한다."고 그랬어요. 표현하지 않으면, 사실 알 수 없는 거예요.

 

표현해야만이 행복해 집니다. 우리가 음악을 즐겨 듣는 것, 노래를 즐겨 듣는 것은 그것이 표현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예요. 누군가의 감성이 표현되어지는 거죠. 지금 비가 내리고 있어요. 고은 시인은 <어제 내린 비>라고 하는 시를 썼죠. 고은 시인은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다고 했어요. 나는 <어제 내린 비>라고 시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몸이야 우산으로 가리 수 있지만, 사랑의 빗물은 가릴 수 없네." (어제 내린 비는 원래 최인호의 <정원사>라는 소설 작품을, 소설가 김승옥이 각색한 이장호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이장호 감독의 친동생, 이영호(당시 홍대 조각과 2년)이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한 영화로, 김희라, 안인숙 등이 출연한 영화이다.  한편 74년 제작된 이 영화는 영화 제목이 이미 73년 한수산이 문학사상에 발표한 소설 제목과 같아서 소송이 제기되기도 하는 등 화제를 뿌렸다. <어제 내린 비>는 그 주제곡을 가수 윤형주가 불렀다. 원작이 최인호여서 노랫말의 작사 역시 최인호인데, 스님이 고은 시인의 시로 착각한 듯 싶다) 표현하는 것은 사랑의 빗물과 같죠. 표현하면 우리는 행복해 지죠.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감성을 드러내는 거죠.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표현입니다.  기뻐하는 것도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분노를 참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왜 화가 나는데 참아야 할까요? 꼭 참는 것만이 좋은 것인가요? 분노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소리지르는 것은 아니죠. 싫은 것은 싫다고 하는 것, 그것이 분노이기도 합니다. 소리지르는 것은 감정이 절제되지 않는 거죠. 그러나 분노한다는 것은 내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즉 행동하는 거죠.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 내 감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 시? 나 자신을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불편한데, 입 꾹 닫고 앉아있는 것이 인내는 아닙니다.  방이 추우면,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는데, 참고 있는게 인내는 아닙니다. 추우면 부엌에 나가서 장작개비 하나라도 아궁이에 던져넣는 것이 필요하죠.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내 스스로가 내 모든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 마음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표현이죠. 우리가 표현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싫은데 참으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습니다. 확신하면 우리는 안심적요할 수 있어요. 헌신하면 기뻐할 수 있죠. 표현하면 행복해 집니다. 사실 안심적요나, 기뻐하는 것이나, 행복이나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죠. 다른 이유가 없어요. 그것이 물질을 구하는 것이든, 정신적인 만족을 구하는 것이든 마찬가지예요.

 

옛날에 성철 스님은 복을 구하는 것을 비판했죠. 복을 구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요? 난 구복행위나 기복행위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만은 않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 동시에 정신적인 충족도 뜻하기 때문이예요. 배부른 돼지가 행복한가요? 물론 배고픈 돼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배 부른 돼지에는 +알파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복이라고 하는 개념은 물질적인 데에다가 정신적인 개념도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구복행위죠. 물질적인 만족,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예요. 그것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는 것이고요. 그것은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 물질과 정신은 행복의 필수조건이에요. 3일 굶고 행복한 사람 없고, 살찐 돼지가 또 행복하지는 않죠.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돼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동시에 포함하죠. 믿음, 예배, 찬탄은 기도의 3박자입니다. 이것이 갖춰져야 비로소 기도다운 기도라 할 수 있죠.

 

이 세 개를 행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이름붙일 수 있죠. 기도의 달인. 달인이라고 하는 것은 능통한 사람을 말하죠. 이 세 가지를 갖춰서 행하면 기도의 달인입니다.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죠. 우리가 기도를 너무 피상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죠.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면, 기도가 가지는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질문해본 적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답을 구해본 적도 없죠. 그저 남이 절하니까 함께 절하고, 남이 올라기니까 올라가고, 누군가가 하니까 나도 누군가처럼 했을 뿐이죠.  

 

기도의 본질은 행복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예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행복하기 위해서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데, 효과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따라야죠. 된장은 묵을수록 맛있다고 하죠. 그러나 맨날 똑같은 레시피를 가지고 , 식당영업을 수백년을 하고 있으면, 그 식당은 망합니다. 식당이 번성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나며는 사람은 그 시대와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맛을 느끼는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예요.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드릴까요? 김태호 전 경남지사가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했어요. 그건 뭐냐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복원하고, 이순신 밥상을 복원해서 돈을 벌자는 것이었어요. 관광객을 끌어들이자. 그런데 이순신 밥상 영업하던 식당 문 닫았어요. 왜 문을 닫았느냐면, 너무 맛이 없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먹었다고 하는 밥상의 반찬들의 가짓 수를 올렸지만, 먹어본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는 거예요. 사실 이순신장군이 먹었다고 하는 그 밥상의 반찬은 이름이 나와 있으니까 알 수 있죠.  그러나 반찬을 무엇을 넣어서 어떻게 맛을 냈는지는 사실 우리는 모릅니다. 알려면, 이순신 장군의 밥상을 차렸던 그 분을 불러와야 하는데, 그 분이 요즘 천국에서 편안해서 바빠, 남 뭐 밥 채려줄 정도로다가 그렇게 한가롭지 않아요. 이순신 장군 밥상 프로젝트는 수 십억을 들였는데, 쪽박차고 망했다는 거예요. 설사 그것이 과거에, 과거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해서, 현대인들도 좋아한다고 생각하며는 그거는 좋은 생각이 아니죠. 더군다나 무장의 밥상이 산해진미일리는 없잖아요? 뭐 임금님의 밥상이라면 산해진미가 올라가겠지마는, 3품 무장의 밥상이 얼마나 화려했겠어요? 그 당시에 보면, 진수성찬이었을지 모르죠. 그러나 현대인들이 보면, 그 밥상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요새는 먹는 것이 넘쳐나는 시대예요. 저녁에 걸으러 나가보면, 붕어빵집,  잉어빵집,- 뭐 붕어빵하고 잉어빵하고 차이가 무언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얼마나 길거리에 많은지 몰라요.  거기다 호떡집, 찐빵집, 거기다 와플, 아, 제가 도는 코스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는 먹을 것이 넘쳐나죠.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6.25때 못 먹은 얘기를 하면 손자가 이렇게 얘기하죠. "바보야! 슈퍼에서 라면 사다 끓여먹지 왜 굶어?" 우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어요. 과거에 그것이 그 시대 사람의 사고에 맞고, 옳았다 할지라도. 지금 현대인이 보면, 그것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죠.

 

우리는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중국의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이 도킹을 성공했다고 그러죠.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의 사람들은 인간이 달나라에 간다고 하는 생각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옛날에는 달나라에 사람이 산다고 생각했죠. 아주 이쁜 여자를 항아님이라고 했습니다. 월궁항아. 달나라 여자는 그렇게 이쁘다는 거요. 제가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달나라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죠, 요새  달나라 여자들이 너무이뻐서, 온 우주에서 달나라 여자들을 다 데려가 버려서 달나라가 비었겠죠. 

 

적어도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달에 간다고 하는 것은 꿈에서조차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린 지금 달나라에 가고 있어요. 달나라에 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데 우리는, 몸은 지금 이 시대, 이 자리에 있는데, 의식과 사유는 과거 속에 아직 남아 있죠. 우리는 아직도 의식세계는 아프리카 초원을 뛰놀던 시대의 의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행하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죠.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도도 마찬가지죠. 과거에 해오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죠. 사실 옛날에는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외우라니깐 외우고, 목탁치라니깐 치고, 그저 시간이 되었으니까 올라가고, 끝났으니까 내려오는 것에 불과했죠.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는데, 지금 이 순간에  삼각산 도선사에서, 팔공산 갓바위에서 아마 우비를 입고 절을 하고 있을 겁니다. 열심히.  나는 그것이 그릇되다, 잘못되다 그런 뜻은 아니예요. 얼마나 소박합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비가 쏟아지는데, 그 팔공산에 올라서 절하는 그 간절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거는 값을 메길 수가 없어요. 이 가륵한 어머니의 마음은 돈으로다가 환산되어질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며는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값을 놓을 수가 없죠.

 

그러나 이것은 아름답기는 하나, 생명력이 없어요. 이런 기도는 좀비의 기도죠. 이런 거는 좀비들도 합니다. 좀비 아시잖아요? 80년대는 강시의 시대였는데, 마 요새는 강시가 다~아~~ 좀비한테 쫒겨났어. 80년대만 해도, 강시 영화, 강시 만화가 판을 쳤는데, 요새는 강시보다는 좀비가 더 이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더 강하죠. 이러한 기도는 아름답기는 하나, 이것은 좀비의 기도다. 기도란 것은 본질적으로 보면, 믿음과 예배와 찬탄. 이것이 결합된 것이 기도예요. 믿음과 예배와 찬탄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하고 헌신하고 표현하죠. 그러기 때문에, 안심적요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행복한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기도예요. 이것이 정말 기도라고 할 수가 있죠. 다른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이, 기도라고 하는 것이 구복이냐 기복이냐 이야기하는 것은 일본말로  표현해서 나쓰메로, 그저 흘러간 옛노래죠.

 

제가 이 일본말 나쓰메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제가 옛날에 일본 마이니찌 신문 덴세이 징고라는 칼럼을 독해를 했는데, 아이 이 나쓰메로라고 하는 단어가 나와가지고, 내가 독해를 해야 되는데, 아무리 사전을 찾아도 나쓰메로라고 하는 것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 가지곤 제가 기억은 안나는데, 하여간 사전을 찾아가지고 나쓰메로를 해석해서 찾아갔어요. 뭐 저는 해석 못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독해를 해서 해석을 했더니, 선생이 깔깔깔 웃더만. "아니 스님, 그 기발한 발상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쓰메로라고 하는 것이, 나쓰라는 흘러갔다고 하는 뜻하고, 멜로디라고 하는 영어가 결합된 '흘러간 옛노래' 마 그런 뜻이라네. 그래서 다른 건 다 잊어먹어도 이건 안 잊어 먹어요. 아주 얼마나 얼굴이 뜨겁던지. 흘러간 옛노래죠.

 

흘러간 옛노래는 틀으며는 지금도 우리가 감동을 받죠. 그러지마는 다른 것은 다릅니다. 기도라는 것이 흘러간 옛노래처럼 되어서는 안 돼요.  기도의 의미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예요. 그것을 기복이니 구복이니 흘러가는 옛말로 단정지어서는 안되요. 내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며는 우리는 그런 사고가 남아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최초로 하신 말씀이 뭐예요. 낡은 생각을 버리라는 거예요. '새 술은 새 부대'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의미죠. 시 시대에는 새로운 사고가 되야죠. 새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사는 시대가 새로운 시대입니다. 다른 시대가 새로운 시대가 아니죠. 아까 달나라 이야기 했던 것도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우리는 과거의 의식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과거 의식의 잔재의 의식을 씻어내고 있지 못하고 있죠.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거의 의식이 나를 지배를 하게 되요.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검은 그림자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낡은 의식이죠. 낡은 의식을 새로운 의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우리는 항상 기도합니다. 저도 항상 기도하구요. 요새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저 살아있는 동안  기도하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 참 행복하겠구나. 난 요새 그런 생각을 해요. 나랑 가까운 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진 않아요. 뭐 그렇게 까지,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뭔 능력이 있어서 내가 모르는 사람까지 다아아아아아~~~~~~ 하겠어요. 저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잖아요? 왜그러냐며는 저는 내 분수를 알아요. 내 능력을 알아요. 적어도 나와 내 가까이 있는 분들을 위해서, 그 분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도 그때그때 달라요. 무슨 말이냐면, 행복이 주는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예요. 언제는 등 따시고 배부른게 행복이었죠. 근데 언제는 등 따시고 배부른 것보다 위장에서 쪼로록 소리가 나는데도 꽃길을 걷는 것이 더 행복할 때도 있어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분들은 모르겠어요. 항상 똑 같은지? 나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그때그때 달라요. 언제는 차 마실때가 가장 행복했을 때가 있고, 언제는 꽃길을 걸었을 때가 가장 행복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꽃은 고사하고 나뭇잎조차 달려 있지 않는 나목을 걸을 때가 행복한 때도 있죠. 중요한 거는 그때 그때 매순간 행복하면 된다는 거예요.

 

행복이라는 것이 한결같이 어어져 있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행복이라는 것이 염주와 같다고 보죠. 염주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개가 끼워져 있죠. 108개라고 하는 알갱이가 끼워져 있어서, 108염주가 되고,  1000개의 알갱이가 끼워져서 천주가 되고, 10000개의 알갱이가 끼워져서 만주가 되기도 하죠.  천주는 많죠. 만주도 더러 있어요. 나는 이 담에 100만주를 한 번 만들어볼까 이렇게 생각을 하죠. 왜 그러냐면, 우리나라는 크고 많을수록 행세를 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알알이 염주를 끼우는 것과 같아요. 108개와 천개가, 하나하나의 알이 결합해서 하나의 염주를 이루는 것처럼, 우리 행복이라는 것도 매 순간에 기뻐할 수 있는 우리의 감정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거죠.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든지,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사는 거죠.  특히 행복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행위가 기도예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가장 본질적으로, 가장 소박하게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몸과 마음과 입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기도의 행위는 행복을 추구하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꺼리낌 없이 드러내 놓는 것이기도 해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욕망이 충족된 것이 행복이다. 다른 것이 행복이 아니예요.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그 욕망이 충족된 것, 그게 행복이죠.    

 

기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규정하면, 나의 욕망의 표현이예요. 내 욕망을 표현해 내는 것. 이론적으로 좀 더 정제되고 세련된 것이 믿음과 예배와 찬탄이라고 하는, 이 기도의 3박자, 심행과 신행과 구행이라면,  이 세가지를 행하는 것이라면, 아주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내 욕망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 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이죠. 조금 전에 얘기 했듯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욕망, 물질적인 욕망이 충족된 상태를 말해요.  

 

지난 번 강론에서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나쁘기 때문에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니예요.  부처님의 말씀이지. 욕망은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그랬어요.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죠.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예요. 너무 사랑스럽다 이 말이예요. 사랑스럽기 때문에 탐착하게 되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애착하게 되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다가 꽁꽁 묶어서 올가미 짓잖아요. 우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요?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투망을 던지고, 올가미를 던지잖아요? 그리고 잡아 당기잖아요. 그리고 말뚝에다 매죠. 부처님은 욕망이라는 것은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했죠.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 욕망의 끈을 풀어줘야 된다는 거죠. 그럴 때 비로소 진전한 사랑이 실현된다는 거죠. 그럴 때 비로소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끈을 풀 제 비로소 사랑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전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좋은 이름 아래의 욕정이죠.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예요. 다만 그러나 경계해야 된다.  

 

기도라는 것은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욕망을 실현하는 거죠.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도라는 것은 확신과 헌신과 표현입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이고, 부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것이고,  내가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헌신하고, 내가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권능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것, 그것이 기도예요.

 

우리가 이렇게 의미 깊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잘 안되니까, 이렇게 가르켜 줄랴며는 힘드니까. 이거 이야기하는데 1시간 10분 걸렸어요. 스님들이 단순하게 가르쳐주는 거요. 관세음이나 불러. 물론 편하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이왕 기도할 바에냐 기도다운 기도를 해야죠.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짜장면 한 그릇을 얻어 먹어도 얻은 먹은 거예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얻어 먹어도 얻어 먹은 거예요. 이왕에 얻어 먹은 소리 들을 바에야 짜장면 한 그릇 얻어 먹고도 얻어 먹었다는 소리 들을 바에야, 상다리가 뿌러지도록 베껴 먹자. 이게 마 내 생각이예요. 이왕에 기도할 바에는 제대로, 기도다운 기도를 해보자 이겁니다. 또 제대로 된 기도를 하자 이거예요.

 

세상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어떤 형태의 기도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저 아프리카의 부시맨부터 시작해서 이 땅의 코흘리개들까지. 모든 사람은 다 기도합니다.  나는 지난 여름에, 내 깜짝 놀랬어요. 여기 앞 마당에 사마귀가 많아요. 유식하게 말하면 당랑. 사마귀가 기도를 하더라구요. 나 놀랬어요. 사마귀가 앞 다리 두개를 막 비벼. 아 이것이 기도가 아니고 뭐겠어요? 인간만이 기도한다는 생각은 편견이여. 정말 기도는 사마귀가 하더라구요.

 

오늘은 기도의 의미와 그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예배와 찬탄인데, 믿음은 확신을 말하고, 예배는 헌신을 말하고, 찬탄은 표현을 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확신하면 안심 적요할 수 있고, 헌신하면 기뻐할 수 있고, 표현하면 행복해 진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3박자예요. 기도의 3박자. 박자가 짝!짝!짝! 맞아 떨어져야 돼요. 그래야 만이 멋진 멜로디가 흘러 나오는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의 강론의 주제는 기도의 3박자입니다.   

 

오늘은 10일날이 마 수능이고, 12일날이 임용고시고, 그래서 기도를 제가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 함께 합장 하시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이 달 12일날 임용고시를 보는 이다을 양과 수능 시험을 보는 김성림, 김수연, 정수진,  최수완, 김경길, 한재영에게 부처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등불을 밝혀주시고, 그들이 아는 문제를 놓지지 않도록  부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모르는 문제를 알게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기도한 그들이 모르는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아는 문제를 당황하고, 긴장 때문에 놓치지 않도록 부처님께서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번에 시험을 보는 이다을, 김성림, 김수연, 한재영에게 원하는 바의 소원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보유:

이번 강론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나름 속기라지만, 필기한 것을 정리해 올렸는데, 그러다 보니 이해와 정리는 잘되는지 모르지만, 강론의 생생함이 잘 살아나지 않더군요. 스님의 원음을 훼손하지 않고자 그대로 올렸습니다. 마치 법당에 있는듯이 생생하지 않나요? 어느게 좋은지는 선우님들의 평가를 듣겠습니다. 그래서 좋는게 좋다고 선재(싸두) 하는 쪽으로 정리해 볼까합니다. 예전에는 미안한 말씀이지만이라는 말을 자주 쓰셨는데, 오늘 보니 마 마 마 를 많이 사용하고 계시군여. 

 
[EBS스페이스공감] 160714 악동뮤지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