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받침대 - 자신감|…… 혜천스님설교

2019. 2. 16. 09:5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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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2555. 12. 04 


마음의 받침대 

 

 

부처님께서 항아리가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지지만, 받침대가 있으면 쓰러지기 어려운 것처럼, 마음도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지고, 받침대가 있으면 쓰러지기 어렵다고 하셨죠. 아마 그 당시 인도에서는 항아리를 받침대에 고여서 놓았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그걸 비유를 들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어요. 항아리가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진다는 거죠. 쓰러져서 쉽게 깨진다는 거예요. 근데 받침대가 있으면, 쓰러지기가 어렵다는 거죠. 우리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받침대가 있으면 쉽게 쓰러지지 않지만,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진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마음의 받침대를 얘기하고 계세요. 

 

부처님은 8정도야말로 마음의 받침대라고 말씀하셨죠.  우리는 마음의 어떤 받침대를 지금 사용하고 있는가요? 콘단냐는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온전한 만족을 얻었다고 그랬어요. 그것이 콘단냐의 마음의 받침대죠.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 가르침만이 유일한 의지처라고 그랬죠. 그 또한 아난다의 마음의 받침대죠. 우리는 어떤 받침대를 가지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요? 나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받침대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의 받침대죠. 그래서 부처님께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보배는 자신감이다." 동시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보물 또한 자신감이라 그랬어요. 자신감은 인간이 지지고 있는 최고의 보물이고,  자신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보물이라는 거죠. 우리 마음의 받침대는 자신감이죠. 우리가 자신감이 없으면, 세상을 사는데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는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하는 것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죠.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망설이는 것은 사실 실패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고자는 하는, 그것을 성취하는 동력,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사실.     

 

우리가 자존감이라는 말도 쓰고, 자신감이라는 말도 쓰지마는, 우리가 자신감이 없으면 매사에서 끌려 다니는 삶을 살죠. 스스로가 삶을 이끌어가야 되는데, 스스로의 삶에 이끌려 간다는 거죠. 자신감이 없는 삶은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삶의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윤활유와 같죠.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죠.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는 것이 삶이다.  

 

감동을 주지 못하고 감동을 받지 않으면, 우리 삶이 상당히 매말르고 건조해 지죠. 우리가 감동을 만들어 낼려면, 자신부터 감동시킬 수 있는 무엇을 만들어 내야 됩니다. 자신이 감동을 하지 않는 드라마에 누가 감동을 해 주겠는가요? 스스로가 눈물을 흘릴 수 없는 드라마에 누가 눈물을 흘릴 것이며, 스스로가 기뻐할 수 없는 드라마에 누가 기뻐해줄 수 있겠어요? 감동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감 속에서 나옵니다. 자신감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의외로 자신감이 2% 부족한 경우가 많죠. 자신감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딱 2%가 부족해요. 2%를 채워야 마치 용암이 폭발하듯이 폭발해 올라오는데, 딱 2%가 부족하니까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미끄러지죠.

 

요새는 그야말로 여기도 시험, 저기도 시험, 엎어져도 시험, 뒤로 자빠져도 시험, 그저 시험이 곳곳에서 있는 그런 계절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요. 우리가 몰라서 적지 못할 답은 없다고 봐요. 우리가 몰라서 답을 적지 못하진 않습니다. 시험지를 덮고 문밖을 나오는 순간 생각이 나죠. 아차! 답이 이거였는데... 아니면 시험의 종료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기도 하죠. 우리가 무려 16년을 공부를 하는데, 모르는 것이 뭐 있겠어요. 우리는 모르는 것이 사실 없습니다. 단지 빨리 그것이 생각나지 않을 뿐이죠. 빨리 생각나지 않는 것은 과도하게 긴장하기 때문이죠. 두렵기 때문이예요. 잘못 썼다가 떨어질까봐.

 

자신감은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주죠. 자신감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100% 폭발시켜 주죠. 근데 자신감이 부족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조차도 폭발시키지 못해요. 위축되기 때문이죠. 내가 가지고 있는 다이나마이트가 1톤가량 되죠. 그래서 다이나마이트를 폭발시키려고 불을 붙였는데, 한참 심지가 타들어가고 있는데, 아 이제 곧 폭 폭발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아니 누가 여기 불장난이야?" 그리고 소화기를 쭉 뿌려서 폭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거와 똑 같아요. 내가 1톤의 다이나마이트를 갖고 있어서, 엄청난 잠재적인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다이나마이트를 폭발시킬 수 있는 심지에 불을 붙여서, 그 도화선이 다이나마이트를 폭발시켜 주지 못하면, 그 다이나마이트는 있지만 없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것이 폭발시켜 줄 때 다이나마이트지, 폭발시켜 주지 못하면 그저 그것은 쓸모가 없죠.

 

우리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화약은 중국에서 제일 먼저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화약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써먹지 못했어요. 중국은 화약을 주로 어디다 써먹었냐며는 설날 폭죽 터트리는데다 주로 써 먹었죠. 화약은 징기스칸 군대와 함께 아라비아에 이르렀고, 또 아라비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갔죠. 유럽은 그 화약을 정말로 효과적으로 써먹었죠. 화약을 대포에다 걸어서 남의 땅을 빼앗고, 남의 것을 빼앗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었어요. 화약은 중국이 개발했지만, 화약을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었던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이었어요. 그저 중국은 기껏해야 밤하늘에 불꽃놀이 하는데다가 써먹어 버렸죠. 아마 중국이 화약을 가장 먼저 개발했으니까, 그것을 좀 더 개발해서 효과적으로 써먹었더라면, 전세계를 중국이 지배했을 게고, 지금 우리는 띵호와를 연발하는 중국말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죠, 전세계가. 우리가 효과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거죠.       

 

부처님은 마음의 받침대를 야길합니다. 마음의 받침대는 자신감입니다. 우리가 자신감을 폭발시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죠.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감을 폭발시키는 도화선과 같죠. 누구나가 잠재된 능력은 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노력이 좀 부족하죠. 우리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오늘은 따악 놀고, 내일은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써서 공부해야지.  오늘만 따아아악 쉬고, 내일부터는 열씨미 할거라고. 오늘만 딱 마시고, 내일부턴 딱 끊을 것이야. 오늘만 딱 피우고 내일은 끊을 거라 생각하고. 딱 오늘만! 우리가 딱 오늘만이라고 하고는 미뤄버리죠. 우리가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오늘만이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오늘 그 일을 해볼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죠, 사실은. 우리에게는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걸랑요. 내일 내가 숨을 쉬고 있으리라고 하는 보장은 사실 우리는 아무도 해주지 못해요. 단지 우리는 잠재적으로 내일 아침 해를 보리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기는 하죠. 자신감에 불을 붙이고, 자존감에 불을 붙일라며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해요, 우리에게는.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노력하라고 하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부처님의 말씀은 그거였어요. "방일하지 말고 노력하거라!" 방일(放逸)이라고 하는 말이 참 재미있는 말이죠. 방일이라고 하는 것은 놓아버리는 것을 말하죠. 우리는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며는 포기를 해버리죠. 방일이라고 하는 것은 놓아버리고 포기하는 겁니다. 단순히 뭐 게으름을 피우고, 그런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방일이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방일이라고 하는 의미가 작게 다가오는 거예요. 방일이라고 하는 것은 놓아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노력하는 거예요. 노력보다 중요한 것이 없죠. 우리가 정진한다고 하는 말도 노력한다는 말 아입니까? 아무리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1톤의 다이나마이트가 있어도,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노력이 없이는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하지 않죠. 우리에게는 2%의 노력이 사실 부족해요. 뭐 저는 목숨걸고 노력하자!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자! 조금만 더 해보자! 조금만 다가가다 보면 그 목적지지에 다가갈 수 있죠.

 

부처님은 마음의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진다고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마음의 받침대를 튼튼한  마음으로 마련을 해야 되죠. 튼튼한 마음의 받침대를 마련해야 삶이 감동있는 삶이 됩니다. 감동있는 삶을 연출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죠. 어느 누구도 감동있는 삶을 내 대신 연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감동시킬 때, 감동받는 삶이 되죠.   

 

우리나라 기도문에 보면, 그런 구절이 나와요. "부처님의 감응은 대천세계를 두루 덮는다."  부처님의 감응(感應)은 대천세계를 두루 덮는다는 거예요. 대천세계는 우주를 말하죠. 부처님의 감응은 우주를 두루 덮는다는 거예요. 감응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중생의 그 기도에 응답하는 것을 감응이라고 합니다. 감응이라고 하는 말은 감동 받고, 감동을 준다는 뜻이죠. 부처님의 입장에에서 보면, 기도하는 사람의 행복과 노력을 보고 감동하는 것이고,  감동을 받는 거죠. 또 그 감동에 응해서 감동을 주는 것이 감응입니다.

 

감동을 받고, 감동을 주는 것. 저는 전에 그런 말씀을 드렸죠. 인간세계는 오직 교환의 원리만 작동한다. 교환의 원리가 뭐예요? 받는 것이 곧 주는 것입니다. 또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죠.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주어야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줄 수 있어야만이 받을 수 있다.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가 주지 못한다면,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내가 주지 않았는데, 받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받는 계산은 참 확실해요. 뭐 저부텀도 받을 거는 안잊어 먹습니다. 근데 줄 것은, 전 대범한 사람이어서 잊어버리죠. 저는 받는 거에서는 굉장히 소심해요. 그래서 소심하기 때문에, 받는 것은 절대 잊어 먹지 않습니다. 혹시 저에에 줄 것이 있으며는 챙겨서 주세요. 전 소심해서 받는 거는 안 잊어 먹습니다. 그렇지만 주는 것에 대해서는 대범해요. 그래서 내가 주는 것은, 줄꺼에 대해서는 대범하기 때문에 잊어버리죠. 인간세계는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이예요. 아주 간단해요. 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다른 표현으로 하며는, 받고 싶으면, 주라는 얘기죠. 

 

왜 부처님이 자애심을 아파마나라고 하시겠어요. 아파마나라고 하는 것은  자애로운 마음을 주는 겁니다. 자애로운 마음을 상대의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가득채워 주는 것이 아파마나죠. 줄 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감동을 줄 때, 감동을 받을 수가 있죠.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은 감동을 주는 것이니까요. 동시에 감동을 받는 것이기도 하죠. 인간세계에서는 이것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뭐, 인간세계 밖에 가서 사실 양이며는, 뭐 개의치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치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아직 인간세계 바깥에 나가 살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어요. 아마 먼 미래에는 인간세계 밖에 나가 살 수 있는 그런 세계가 다가올지도 모르죠.  오죽하면 영국의 스티브 호킹 박사는 이런 말을 했죠. 인류의 생존은 우주를 식민지화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인류의 생존은 안타깝게도 불투명하다는 거예요. 이 지구촌이 그렇다는 얘기죠. 그러기 때문에, 이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주를 식민지화할 수 있느냐? 그 결과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했죠.  

 

여기 기쁜 소식과 나쁜 소식이 동시에 있는데, 기쁜 소식부터 알려 드릴까요, 나쁜 소식부터 알려 드릴까요? 어떤 소식부터 알려드릴까요? 기쁜 소식? 나쁜 소식? 기쁜 소식은 먼 미래에 우주를 식민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 나쁜 소식은, 안타깝게도 우주를 식민지화해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0.1%도 안될꺼라는 거예요. 그것이 나쁜 소식이예요. 그저 기쁜 소식은 그것이 가능하지만, 나쁜 소식은 그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손가락으로 꼽게 될거라는 거예요. 우리가 우주 밖에 나가서 살 수 없는 한, 이 지구에서는 지구의 법칙을 따라야 됩니다. 지구의 법칙에 불만이 있는 분은, 마 우주선을 타고 우주 밖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이 지구의 법칙은 교환의 법칙이라는 거예요. 주고 받는 관계, 받고 주는 관계.  

 

아까 얘기 했듯이, 예불문에 나오는 부처님의 감응은 대천세계를 두루 덮는다. 감응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 감응이예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부처님이 감동받는다 말이예요. 그 감동을 받았으니까 또 우리가 감동할만한 선물을 주시는 거죠. 그게 감응이라고 하는 말이예요. 감동을 받아야, 감동을 주죠. 내가 감동을 줘야, 나 또한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을라면, 감동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죠. 이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화로 비유해서 이야기하면, 수 백억, 수천억 들여서 만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다 감동할 것 같지마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요? 작년엔가요, 그러껜가요? 정말 대박을 친 다큐멘타리 영화<워낭소리>는 달랑 1억원 투자했어요. 그렇지마는 300만인가 하는 관객이 왔죠. 사실 <워낭소리>라고 하는 영화는 제가 고백하건데, 저는 딱 두 번 밖에 안 봤어요.  한 번은 하두 <워낭소리> 해서 혼자 살짝 가서 봤고, 한 번은 좋다니까 다른 분들이 같이 보자 그래가지구 안 본척 하고 가서 보고. 그래서 내 두 번 봤어요. 근데 스토리는 단순하지 않습니까? 그저 할아버지하고 소, 쉽게 말하며는 늙은 소하고, 늙은 노인 하나 딱 둘 나오죠. 아 물론 그 할머니도 나오고. 엑스트라 등등등 나오지마는... 그러지마는 많은 분들이 그걸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그래요.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 의도를 한다고 해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의도를 한다고 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가장 중요한거는 이거죠.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남을 속일 수 있다. 중국고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천하를 속이고 싶으면, 우선 너 자신부터 속이는 기술부터 배우라는 거죠. 네가 그것을 100%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100% 진실이라고 믿고 따라올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중국 고전에서는 100%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을 때, 세상을 속일 수 있다라고 이야길 해요. 그 이야기는 여기다 끌어다 붙이면, 이렇게 이야기가 되죠. 너 자신을 100% 감동시킬 수 있을 때, 타인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거예요. 스스로가 미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미치게 할 수 있겠어요. 스스로 입에 음식이 맛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맛있다고 권할 수 있는 건가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튼튼한 마음의 받침대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의 받침대가 있으면,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마음의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진다고 하셨어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 마음의 받침대는 나는 자신감이라고 봐요. 어느 날 빠세다니왕이 성루에서, 성루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죠.  세상에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은 무엇일까? 내 아이들일까? 내 사랑하는 아리따운 왕비 말리카일까? 빠사나디 왕의 왕비, 정비 마리카나는 그렇게 이뻤다는 거예요. 너무 이뻐서 그녀의 이름을 꽃에다 붙였는데, 그게 말리화예요. 내 아내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 아니면 자기가 다스리는 이 국토일까?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귀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에 미쳤다는 거죠. 그래서 마침 누각에 올라온 말리카에 그 이야길 하죠.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은 나 자신밖에 없는 것 같소. 왕비에게는 참 미안스럽소" 그랬더니 왕비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그러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대왕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저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소중한 것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우리 생각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르니까 부처님께 가서 여쭤 봅시다."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두 사람의 생각을 이야기하니까, 부처님께서 긍정하셨죠.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것은 너 자신밖에 없다고.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씁니다. 이 우주에 비하면, 인간 개인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냐는 표현을 종종 우리가 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도 있고, 그렇게 글을 쓰는 분도 있습니다. 이 우주에 비교한다면, 한 개인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보잘 것 없다는 거. 정말 그럴까요?  이 우주에 비하자며는 우리 한 사람의 생명은 보잘 것이 없을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 우주보다 귀한 것은 내 자신의 생명입니다. 이 우주는 내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존재하죠. 그러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가 도대체 나한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까요?  이 지구상에 많은 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사막에서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죽어간다면, 그 많은 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우주보다 귀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논하죠. 그러고 1등만 박수받는다고 한탄합니다.  근데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잊고 있느냐? 이 인간 세상에는 1등만 태어난다는 겁니다. 1등을 하지 못하면, 태어나지 못하죠. 태어날 수 없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경주에서 1등한 사람만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 1등이라는 얘깁니다. 본래 1등으로 태어났죠. 우리 인생은 1등 인생입니다. 우리가 1등으로 태어나서, 1등 인생인데, 왜 갑자기 스스로가 열등하다고 생각해서, 자존감을 잃고, 자신감을 잃을까요? 

 

사마천은 역사는 일치(一致)와 일란(一亂)이라고 그랬죠. 한 번의 평화와 한 번의 혼란. 그것을 개인의 삶, 개인사에 적용하며는 한 번의 성공과 한 번의 실패죠. 어떤 인간도 평생 1등만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조선조 때 영의정을 우리는 이렇게 불렀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영의정조차도 2등이죠. 그러면 왕이 1등이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왕은 언제나 천명을 받들어야 했죠. 지진이 일어나면, 거적떼기를 깔고 궁궐밖에 나가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가뭄이 들어도 거적떼기를 깔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어요. 왕의 위에는 천(天)이라고 하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거죠.  출세를 거듭해서, 조선시대 때는 출세를 거듭해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영의정 아닙니까? 그래봐야 2등이죠. 억세게 운이 좋아서. 나는 왕자로 태어난 사람들을 억세게 운이 좋아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억세게 운이 좋아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태어나서, 설사 왕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또한 1등은 되지 못했어요. 폭풍우가 몰아치고, 가뭄이 들고,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신하들은 왕을 겁박했죠. 지진이 일어나는 건 너 때문이야!  가뭄이 든거 너 때문이야!  왕조차도 표면적으로는 1인자였지만, 자연의 재해만 일어나도 왕은 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하들이. 그 이야기는 뭐냐며는, 지구상에는 1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죠. 나는 그렇게 봐요. 이 지구상에는 1인자는 없다.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죠. 부처님이 천상세계나 인간세계에서 1인자다, 그런 뜻이죠. 내가 1인자다. 요새는 개그맨들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죠. 인간 세계는 본래 승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승자처럼 보이는 것 뿐이죠. 누가 승자일지는, 우리는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승자처럼 보이는 사람, 승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 뿐이죠. 아까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1등만이 이땅에 태어난다는 거죠.  우리가 1등으로 태어났는데, 무엇 때문에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고 동요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을 말씀하셨죠. 열반이라고 하는 말의 본래 어원은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죠. 동요되지 않으면 되죠. 우리가 동요되는 것이 문제지, 동요되지 않으면 문제가 될게 없습니다. 각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능력이 있죠. 집을 짓는 것은 목수를 따라갈 수가 없고, 보일러를 고치는 것은 보일러공을 따라갈 수가 없고, 머리를 다듬는 것은 미용사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우리 미용사만 말씀드리면, 마 우리 이용사 아저씨들이 서운해 하니까 이용사. 각자가 어떤 부분에서는 최고죠. 근데 우리가 그것을 면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세밀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거예요. 미용실의 3대 요소가 뭔줄 아세요? 펴고, 말고, 다듬고. 펴고, 머리를 펴잖아요, 곱슬들은 빳빳하게 펴고,  다듬고, 다듬는 건 자른다는 이 말이예요, 자르고.  그리고 말고, 뽂잖아요, 보글보글하게. 우리가 세밀하게 파악을 못해서 그렇죠, 세밀하게 보며는 모든 것에는 그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특징을 파악하고 보며는, 참 감동을 받게 되죠. 참 재밌구나! 저런 특징이 있구나! 

 

내가 애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어냐면, 자기 자신을 세밀하게 파악해 보라는 얘기예요. 나 자신도 잘하는 것이 없는 거 같지마는 뭔가 하나는 특출하게 잘하는 것이 있죠. 하다 못해 잠을 잘 잘다든가. 잠 잘 자는 거 축복입니다. 오죽하면 부처님께서 법구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잠 못든 이에게 밤은 길다" 잠을 못 자면 그것보다 고통스러운게 없어요. 잠 잘 자는 것도 그 사람의 능력입니다. 소화 잘 시키는 것도 능력이고, 건강한 것도 그 사람의 능력이죠. 나는 마 아부를 잘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봐요. 왜 아부를 잘하는 게 능력인지 아세요? 참 그것 낮이 간지러워서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철면피라고 하는 말은, 그래서 나왔죠.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죠. 어떤 사람이 상관 앞에서 얼마나 아부를 떠는지, 그 상관이 차~암 자기 앞에서 아부를 떠는데, 너무 그러니까 상관이 그게 역겨워가지고 화가 나가지고 부채로다가 그 사람 얼굴을 때리면서, 이랬다는 거예요. "이 철면피같은 인간아! 어지간히 좀 해라." 그랬더니 그 사람이 얼굴을 맞고서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세요? "때려 주신 것이 너무 시원합니다." 철면피라고 하는 고사는 거기서 나왔죠. 아부를 떠는데, 면전에서 아부를 떠는데 얼굴이 두꺼워서 꺼리낌이 없다고 하는 뜻이예요. 우리가 아부를 떠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만, 아~ 그거 어렵습니다. 생각보다 그거 어려워요. 내가 아부를 떨면서도 내가 내 자신한테, 그거해서 못해! 아부를 떠는 것도 능력이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죠. 근데 우리는 그 능력을 스스로가 깎아 내리기 때문이예요. 내 능력을 시원찮게 여기기 때문이죠. 우리가 학습능력이 좋은 것만 능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미래가, 스티브 호킹이 말하듯이, 우주를 식민지화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면,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공부 잘하는 쌘님이 가장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2006년도에 지구상에 석유의 정점이 끝났다고 그러죠. 지금 내리막길이라는 거죠. 비관적인 학자들은 앞으로는 석유를 기반으로 한 문명은 종말을 고할거라고 하죠. 아마 그럴겝니다. 아마 석유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명은 종말을 고하겠죠. 그 때는 소로다 밭갈이를 해야 될게고, 자동차니 뭐니 다 무용지물이 되겠죠. 물론 전기도 없겠죠. 비관적인 학자들은 그 시대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얘기하죠.  스티브 호킹이 우주를 식민지화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전제를 한 이유도 거기에 있죠.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그래도 위기는 겪겠지만, 안전하죠. 그나마 다 다음 세대에게는 정말 그런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죠. 그 시대에는 힘이 좋아서, 농사 팍팍 지을 수 있는 사람이 1등 신랑감이 될 겁니다. 지금은 팔등신 미인이 각광받지만, 그 시대에는 일 팍팍 할 수 있는 여성이 신부감 1호로 등장하겠죠.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단순히 무엇이 우위에 있고, 무엇이 열등하다라고 하는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우라는 얘기예요. 우리는 그 생각 때문에 마음의 받침대를 잃죠.

 

마음의 받침대는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은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죠. 그리고 자신을 폭발시켜 줍니다.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예요. 뭐 우주선 타고 오는 것 아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스스로가 이끌어내는 거죠. 마치 빠세나디 왕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술회하듯이 말이예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주보다 귀한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어떻게 우주가 나 자신보다 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신감을 잃어야 할 이유가 없죠. 우리가 자신감을 이끌어내는데 좀 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는 것도 바로 그거죠. 자신의 마음의 내면을 보고, 자기 잠재되어 있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수행입니다. 나는 수행이라는 것이 그 이상의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그 이하의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 인간 세계는 특별히, 특출한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고, 특별히 열등한 인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스스로가 그리 여길 뿐이죠. 아마 이렇게 반문을 하실지 모르죠.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잖아요? 세상이 나를 저울대에 올려서 나의 가치를 다는 것보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저울대에 올려서 스스로를 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세상에서 자기 가치를 저울대에 다는 것에 대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죠. 오직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가 달았죠.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환경을 이야기하고, 제도를 이야기하고, 시스템을 이야기하죠. 시스템과 제도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시대 시대에 맞는 제도와 시스템이 만들어 졌습니다. 지금도 시스템과 제도가 나빠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스템과 제도를 활용하는 인간이, 그 시스템과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제도를 완벽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학적, 과학적 하지만, 과학에 100% 정답은 없습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정답은 근사치죠. 거기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지, 그것이 정답이라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과학에서. 과학에서도 근사치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근데 하물며 제도와 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을 완벽하게 변화시킬 수 있겠어요. 나는 제도와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변명이라고 보죠. 인간의 변명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못하니까 변명을 하는 거죠. 제도에게 그것을 돌려버리고, 시스템에게 그걸 돌려 버리는 거죠. 인간이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거기에 돌려버리는 거예요. 제도가 나빠서? 시스템이 없어서? 그건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예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겁니다. 인간의 문제라는 거예요. 정확히 이야기하며는 생각의 문제고, 마음의 문제죠. 우리가 생각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습니다. 제도를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것이 환경과 제도와 시스템의 탓이다라고, 거기에 돌려버리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염치없는 짓이고, 자기 기만이라는 거예요. 생각을 바꿔야죠. 

 

우리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는 거죠.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생각을 바꾸어 나가는 거죠. 우리의 마음의 받침대는 자신감이다, 이건 내 생각입니다. 각자가 생각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의 받침대는 팔정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팔정도를, 팔정도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도 우리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감만이 감동을 만들어내죠. 자신감이 없으면, 감동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감동을 줄 수도 없고, 감동을 받을 수도 없고.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세계에 존재하지만, 인간 세계에 속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하죠. 혹시 이런 말을 듣고 서운하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니 나도 지구에 살고, 나도 인간 세계에 사는데, 인간세계에 살지만 인간 세계에 속하지 못한다니? 아이구 저런 말이 있나?  그 곳에 머물른다고 해서, 그 곳에 속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노래방에서 템버린을 치고, 동료들과 노래 부른다고 해서, 거기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한 때 템버린을 치고 놀고 있는 것이지, 거기 속하고 있는 건 아니예요. 속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제가 늘상 쓰는 표현으로 역적 모의를 같이할 때 속하는 거예요. 오늘 저녁 왕을 쫓아내고, 우리가 왕 노릇 해보는게 어뗘? 했을 때, "좋은 생각이야!"하고 그 다음 날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아침에 출근했는데도, 조정에서 아무 일이 없을 때, 내가 비로소 거기에 속해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 날밤, 그렇게 맞짱구쳤던 사람 중에 밤에 밀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왕을 쫓아내자고 술 먹고, 노래방에서 템버린 치고 떠들었을 때, 그 다음 날 아침 조정에 나갔는데 아무 일이 없을 때, 비로소 나는 거기에 속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이 땅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것은 정말 잘 살펴야 돼요. 

 

부처님께서 항아리가 받침대가 있으면 쓰러지기 어렵지만,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진다고 하셨어요. 마음도 그와 같아서  받침대가 있으면 쉽게 쓰러지기 어렵지만, 받침대가 없으면 쉽게 쓰러진다고 하셨죠. 마음의 받침대는 자신감입니다. 자신감으로 내 마음을 튼튼히 받치면 됩니다. 자신감이 넘쳐 흐르면, 당연히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삶이 됩니다. 항상 새삼스럽게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지만 이 인간 세계는 아주 단순해요. 주고 받는 교환의 법칙만이 작동한다는거예요.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도 거기에 감응하시는 거예요.

 

오늘의 강론의 주제는 마음의 받침대입니다. 마음의 받침대를 아주 튼튼하고 건실한 놈으로, 뭐 비싸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비싼 것이 튼튼할거라고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기는 하나 옳은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어느 분이 기도를 이끌어 주실라는가요? 아이 마 청안 선우가 없으니까 기도를 이끌 분도 없네. 자 함께 합장하시죠.

 

자비하신 부처님 오늘도 서리를 밟고 법우들이 부처님의 성전에 함께 모였습니다. 콘다냐 존자는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온전한 만족을 얻었다고 했고,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 가르침만이 유일한 의지처라고 했습니다. 저희들도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온전한 만족을 얻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 삼아서, 이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도록 노력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들이 설사 자신감을 잠시 잃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부처님께서 저희들이 잠시 잃은 자신감을 붇돋아주시고, 저와 저희 가족에게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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