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길|…… 혜천스님설교

2019. 2. 24. 16:0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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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2555년 12월 11일

마음의 길 

 

 

환절기라서 감기 걸리시 분이 여러 분 계시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배우려고 하지만, 정작 부처님의 사유는 배우려고 하지 않죠.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배우려고는 참 열심히 애를 써요. 부단히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정작 부처님의 사유, 즉 부처님의 생각은 배우려고 하지 않죠.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사유 속에서 나온 것이지, 깨달음이 부처님의 사유 속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사유 속에서 핀 연꽃과 같죠. 깨달음이 사유를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연꽃은 보려고 하는데, 그 연꽃을 피운 부처님의 사유, 즉 연못은 보려고 하지 않죠.  

 

사람은 절대,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냐며는 인간의 생각이라고 하는 거는 마음의 길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예요. 땅 위에만 길이 있고, 바다 위에 길이 있고, 하늘에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우리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길을 따라서 일어나고 움직이죠, 이동하고. 마음은 마치 도로와 같고, 생각은 마치 그 길 위를 걷는 사람과 같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낡은 믿음을 버리라는 거였어요. 여기서 말하는 낡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이냐며는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거죠.  그래서 생각이라는 말도 쓰고, 사유라는 말도 쓰고, 사고라는 말도 쓰잖습니까? 사실 뭐 단어는 단어는 다르지만 그것을 뜻하는 의미는 같죠.

 

부처님께서는 낡은 사고를 버리라는 거예요. 낡은 사고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낡은 길 속에서 나오죠. 부처님은 그것을 마음의 황무지라고 표현했어요. 경전에 보면, 마음의 황무지라고 하는 용어가 많이 나와요. 마음의 황무지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길이 황폐화된 걸 말하죠. 우리가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 상식적인 답 밖에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상식이라고 하는 말을 마이 써요.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답은 뻔해요. 상식적인 답이죠. 비상식적인 생각을 해야 비상식적인 답을 얻죠. 상식적이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누구나 공유하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죠. 나두 알구 너두 알구. 한 마디로 말해서 소도 알고 개도 알고.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것,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거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는 그 답은 뻔하죠. 모든 사람이 똑같은 답을 유추해내죠. 똑 같은 물건을 가지고 시장에 가서 팔면 똑같은 값을 받을 수 밖에 없어요. 하다 못해 막걸리집에서는 상식을 파괴하죠. 멀쩡한 놈의 주전자를 찌그려트리죠. 뭐 어떻게 알았냐 묻지 마세요. 여기 여기 여기 약사리고개 넘어가는데, 거기 막걸리집이 있는데, 요기 몸짓극장 맞은 편에 거기 바깥에 찌그러진 주전자 잔뜩 매달아 놨더만. 그것도 상식을 파괴하는 거예요. 반질반질한 양은 주전자야 흔히 볼 수 있죠. 그걸 찌그러뜨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오래 되었다고 하는, 오랜 정을 느끼게하기 위해서 그건 일부러 찌그러뜨린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상식적인 것에 불과해요. 상식적인 것은 상식적인 답 밖애 없어요. 즉 상식적인 결과만 만들어낸다는 거에요.  스티브 잡스를 이야기하는데,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은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죠. 그가 상식적인 사고를 했다면, 그는 상식적인 답밖에 얻지 못햇을 거예요. 그렇다면 뻔하죠. 그가 비상식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죠. 비상식적인 생각,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피카소예요. 우리가 상식적이다고 하는 용어는 그렇게 좋은 용어가 아닙니다. 누구나 통용되고 공유될 수 있다고 하는 데서는 긍정적이지만, 새로운 뭔가를 이룩하는데 있어서는 상식적이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죠.  

 

우리가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 상식적인 결과밖에 얻지 못합니다. 그래 가지구는 뭔가를 만들어 낼 수가 없죠. 똑같은 물건을 똑같이 팔면, 특별할 게 없죠. 부처님이 낡은 사고를 버리라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거예요. 아무리 헌집은 수리해봐도 여전히 헌집이예요. 우리가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어야 해요. 새로운 마음의 길을 개설해야만이, 새로운 생각이 거기서 움직이죠. 새로운 생각이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불행하게도 수 천년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요. 현대 과학이 이렇게 휘황찬란하게 발전을 했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삶은 변한게 없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그 사람들과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요? 아마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할 거예요. 보통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노예가 만들었다고 알고 있으니까요.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팔죠.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팝니다. 그러면 현대인들은 무엇을 파는가요?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을 팔죠. 요새 정말 대학 입학을 앞둔 부모님들은 정신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머리가 컴퓨터보다 더 빨리 움직이죠. 어떤 대학을 보내야 될지, 어떤 과를 보내야 될지. 너무나도 참 복잡하죠. 그런데 우리가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서울대라는 것도 결국은 무엇인가요? 내가 가장 좋은 노예라고 하는 것을 증명시켜주는 기관에 불과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고대 이집트 노예는 파라오를 위해서 피라미드를 세웠죠. 그것을 만들었을 때, 그가 노예인가 주인인가는 어떻게 구별되는지 아세요? 어떤 멋진 건물을 지었다고 차자 이 말이예요. 그 건물을 지었는데, 누가 노예고, 누가 주인인 줄은 어떻게 가릴 수 있겠어요? 분명합니다. 그 집에 누가 사느냐 하는 것이지요. 피라미드에는 파라오가 누워있죠. 노예가 그 곳에 누워있지는 않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만들었을 뿐이고. 현대인들은 주인이 원하는 지식을 파는 노예에 불과하죠. 그것이 국가가 되었든, 그것이 대기업이 되었든.

 

역사는 진보한다고 그래요. 그러나 역사는 진보하지 않습니다. 진보할 수도 없었고. 고대 중국에서는 대동사회를 지향했죠. 불교에서는 쌍가를 지향했고. 유럽에서는 유토피아를 지향했죠. 유토피아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다 알고 있잖습니까?  존재하고 있지 않은 세계를 뜻하죠.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유토피아예요.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고대 유럽인들은 존재케 하고 싶어 했죠. 그게 유토피아의 이상이예요. 중국에서는 대동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누구나가 평화롭고, 누구나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했죠. 불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상가공동체를 만들어서 누구나가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고 했죠. 그것이 2500년에서 3000년 사이의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연 현대인들은 만들었는가요? 그 시대 사람들은 적어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진 않았어요. 고대 유럽인들도 유토피아라고 하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지만, 그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이 땅위에 존재케 하고 싶어했단 말예요. 중국 사람들도 차별적인 사회를 대동사회라고 하는, 그런 사회를 이루고자 했어요.  불교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쌍가 사회를 이루고자 했지요.

 

그런데 그 후대사람들은 어떻게 했는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요? 오직 이 한 마디로 면피를 하죠. 시스템과 제도.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았다,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죠. 지금 현대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제도와 시스템이라고 하는 두 말, 두 단어 이외에는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요. 물론 과학이라고 하는 문명을 만들어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학이라고 하는 문명 자체가 인간의 행복을 지금 보장해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왜 보장하지 못하느냐면, 본질적인 문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인거죠. 본질적인 문제를 잃어버리니까 현상적인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제도와 시스템이라고 하는 거. 제도와 시스템을 누가 만드는 가요? 인간이 만든다는 거에요. 제도와 시스템을 누가 운영하는가요? 인간이 운영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생각의 문제라는 거죠.  우리 생각의 문제예요. 우리 생각이 낡은 마음의 길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거죠. 마치 녹음기처럼 말이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 상식적인 답 밖에 얻지 못합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좋은 노예는 상식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주인 노릇을 하려는 사람은 비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만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중국 선종에서는 삼처전심이라는 이야기를 하죠.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말은 거기서 나온 말이예요. 제가 발음이 조금 시원치 않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이심점심이 아니고 이심전심입니다. 이심전심. 점심 먹자고 하는 점심이 아니라 전심. 제가 이 구강이 좀 이상한가 봐요. 발음이 좀 자꾸 새요. 아!제가 딱 들었는데, 점심으로 들렸어요. 삼처전심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염화미소, 다자탑전의 분반좌, 그리고 곽시쌍부, 이 세가 지를 말하죠.

 

부처님께서 영치산에서 설법을 하려고 하시니까,  많은 비구들과 많은 사부 대중들이 모였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법상에 올라서, 그 날은 아무 말도 안하고 다만 연꽃 한 송이를 보여줬다는 거죠. 그랬더니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의아해 했다는 거예요. '아니 왜 오늘은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고, 꽃 한송이만 저렇게 들어 뵐까? ' 그 때에 가섭존자가 미소를 지었다는 거죠. 부처님께서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하다. 그 뜻이 바로 염화미소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조계종의 조실스님 방에는 편액이 이렇게 걸려 있죠. 염화실. 

 

다보탑전 분반좌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다자탑이라고 하는 불탑앞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가섭이 늦게 와서 앉을 자리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가섭을 불러서 당신 자리를 반을 나눠서 앉게 했다, 이것이 다자탑전에 분반좌. 반을 나누어서 앉았다고 하는 뜻이예요.

 

그리고 세번째는 곽시쌍부. 부처님께서 쿠시나가성 사라숲에서 열반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가섭이 헐레벌떡 쿠시나가라에 가니까 입적하신 부처님께서 가섭이 오신 걸 알고, 관 밖으로 두 발을 쭉 뻗어서 보여줬다는 거예요. 이게 곽시쌍부예요. 그래서 삼처전심, 영치산에서 염화미소하고, 다자탑 그 앞에서 자리를 나누어서 앉고, 분반한다고 하는 것은, 자리를 나누어서 앉는다는 것은 내 후계자라는 뜻이예요. 그리고 곽시쌍부, 가섭이 오니까 특별히 두 발을 내어보이셨다, 입적하신 부처님께서.  이것이 삼처전심이예요.

 

그래서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면, 이신점심이다. 꽃을 드니까 가섭이 미소를 지은 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다. 중국 선종에서 주장하는 거예요. 선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다는 거예요.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뭐 삼처전심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이심전심이라는 거였어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그 얘기는 뭔 얘기나며는 마음의 길을 따라서 마음의 길로 옮겨진다는 이야기예요. 실질적으로 현대 과학에서는 그거를 증명하고 있죠. 내가 맛있는 걸 먹고 있으면, 옆에 있는 친구가 그것을 먹고 싶죠. 그 때, 먹고 있지 않고 그 옆에서 침을 꼬올딱 꼬올딱 넘기는 그 친구도 그 뇌에서는 동일하게 먹는다고 느낀다는 거죠. 동일하게 느낀다는 거. 먹는 사람만 그 맛을 느낀다는게 아니라 그것을 먹고 싶어서 옆에서 침을 꼬딱꼴딱 넘기는 친구도 그 뇌 속에서는 동일하게 그 맛을 느끼고 있다는 거에요. 이신점심이라고 하는 것이 옛사람들에게는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알았던 것 같애요.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해요. 왜 스스로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느냐면, 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길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예요. 그 마음의 길을 따라서 이동한다 그 말이예요. 우리 마음에 길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맨날 똑같은 마음의 길로만 생각이 움직이니깐 맨날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패턴 속에서 움직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두려워서 움직이질 못해요.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나 있습니다. 고대 유럽인들이, 그리스인들이 꿈꿨던 유토피아 사회나 고대 중국인들이 꿈꿨던 대동사회나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쌍가사회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공통적이겠어요? 한 번 말씀해 보셔요? 네, 또 다른 분들 말씀해 보셔요. 아이 괜찮습니다.말씀해 보셔요. 우리 선우님들은 마, 수준이 높아 가지고 뭐 그런 시시껄렁한 걸 묻냐? 마 이렇게 생각하시는지 답을 안하시네. 우리 최은주 선생님은 평등이라고 그랬어요. 맞습니다. 평등사회를 지향하고자 했죠. 마 근데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며는...(이 때 앰프가 말썽을 일으켜 마이크 중단) 마 이 친구 또 파업하네. 마 쟤가 석용집에서는 똑똑한데, 장소가 바뀌어서 어리버리해 가지고 그래요. 마, 이해 하세요.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무엇이 공통적인 것이냐면, 그런 사회는 한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렇죠.  고대 그리스에 유토피아 사회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본래 존재하지 않던 세계라는 뜻이죠. 중국도 대동사회를 지향했지만, 대동사회는 없었어요. 그 이전에도 없었어요.  그런 사회는 없었어요. 불교도 쌍가공동체를 지향했지마는 예전에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아무도 그 길을 가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뜻해요. 안 그런가요?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 길을 가본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중국의 제자백가라고 하는 것은 약 400년에 걸쳐서 형성이 되는데, 춘추시대 말기에서부터 전국시대 말기까지 한 400년의 전란의 시기에 중국의 사상의 토대가 다 완성이 되었죠. 공자님도 그 시대 나왔고, 장자도 그 시대 나왔고, 노자도 그 시대에 나왔고, 묵자도 그 시대에 나왔고, 양자도 그 시대에 나왔고,  안자, 관자, 뭐 수없는 자자 돌림들이 다 그 때 나왔어요. 근데 여기서 제가 하나 의문이 있어요. 그 의문에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자자 붙이길 좋아하는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자를 싫어할까? 말자, 숙자, 마 이런 자자 싫어하잖아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마 중국 사람들은 자자를 좋아하잖아요. 이건 그냥 내가 웃자고 하는 조큽니다. 중국은 약 400년에 걸쳐서, 그 사상가들이 대동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서, 대동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사고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바로 제자백가입니다. 자라고 하는 것은 성인이라고 하는 뜻이니까, 성인들이 대동사회를 중국에서는 지향을 하는데, 그 대동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인간이 어떠한 사고를 하고, 그 사고에 따라 어떤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어떤 사고를 하느냐,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라고 논한 것이 결국은 우리가 보고 있는 공자님 말씀이고, 맹자님 말씀이고, 장자의 말이고, 묵자의 말입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그걸 경험해 봤을까요? 그 길을 가 봤을까요? 아니요, 그 길을 가지 못했어요. 플라톤도 유토피아를 이야기했지만, 유토피알 못가봤어요. 아무도 가 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 길을 따라서 가야된다고 하는 뜻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분모였다는 거죠. 우리가 마음의 새로운 길을 열어서, 개설해야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우리가 매일 똑같은 길을 똑같이 가면, 똑같은 생각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상식적인 생각을 하면 상식적인 답 밖에 못얻어요. 왜? 그건 뻔하니까.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니까 똑 같은 답을 얻겠죠. 그러며는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자구요. 히말라야의 최고봉에 올라가는데 있어서, 익히 알려진 루트는 80노인도 요새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내가 알고 있기로는 히말라야 최고봉에 올라간 최고령은 칠십 몇 세인가, 팔십 몇 세일까 아마 그럴 꺼예요. 왜? 많이 알려진 루트는 너무 안전해서 셀파 몇 델고 올라가며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되어 버렸다는 거에요. 왜? 처음에는 그 길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쭈욱 길이 다 깔렸껄랑.

 

옛날에는 설악산 봉정암 갈라면요, 비 좀 오며는 생명 걸어야 했어요, 솔직히. 왜 비 좀 오며는 생명을 걸어야 했느냐면, 계곡을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계곡 옆, 바윗길인데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옛날에 조난사고가 많이 났던 것은 그 이유였어요. 비가 오면 바윗길이 미끄러우니까 아차하면, 미끄러진다 말이예요. 미끄러지며는, 한 번 떨어지며는 계곡에서 못 나와요. 실제적으로 내 설악산에 살 때, 여대생이 하나 계곡에 휩쓸렸는데, 마침 수학여행을 왔던 남고생이 있었는데, 그 여대생을 건질려고 들어갔는데, 둘이 다 죽었어요. 계곡에 휩쓸려 못 빠져 나왔어요. 나중에 그 대학생 부모가 남고생 부모한테 너무 미안해가지고, 영혼 결혼식을 하자 그래 가지고 둘이 영혼결혼식을 시켜 줬어요. 여대생 부모도 마음이 무너지지마는 자기 딸을 위해서 수학여행 와서 뛰어든 고등학생, 그 부모 그 얼마나 미안하겠어요. 그 자리에서. 내 딸 죽은 것도 억장이 무너지지만, 이건 뭐 그 이야길 들었을 때, 어떻겠어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길이 너무 좋아. 나는 깜짝 놀랐어요. 경춘고속도로인줄 알았어요.

 

누군가가 간 길은 쉽다는 거예요. 누구나 갈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상식적인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은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지,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몬하는 거 아니예요. 우리는 새로운 일에 대해서는 두려워 하죠. 그래서 새로운 길을 가지 못해요.  우리가 상식라고 하는 것을 상식이라고 하고, 비상식인 것을 비상식이라고 하는데, 상식과 비상식의 차이가 뭔가요? 상식은 다수가 생각한다는 거죠. 비상식은 뭐예요? 다수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예요. 거기에 상식적이고 상식적이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미안한 얘기지만, 숫자 놀음에 불과해요.

 

옛날에는 모든 것은 다 소수에서 출발했어요. 지금 수 십억이 믿는 기독교, 이슬람, 불교 이런 것도 첨에는 다 몇 사람이 둘러 앉아서 시작한 거예요. 그 때는 다 비상식적인 거예요. 아 저 또라이들, 저 미친 놈들. 쟤내들 뭔 소리 하는거야? 부처님께서 나는 최후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이러니까 부처님을 제일 처음 만났던 아지비카 교도였던 우파카가 뭐라 그랬어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갔다고 그러잖아요. 경전에 기술된 얘기를 그대로 하는 거예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거예요. 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까? 너무 감탄스러워서? 너무 존경스러워서? 우리, 붓다의 눈으로, 붓다를 따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지 말고 그 당시 우파카의 눈으로 보자구요. 하이구 미친 놈, 나두 저런 놈 처음이네. 솔직히 그게 솔직한 심정 아니었을까요? 만약에 그가 그 말을 듣고 감탄했다며는 이렇게 이야기 했겠죠. '저두 좀 가르켜 주세요' 부처님께서 나는 승리자요, 최후의 진리를 얻은 자라고 했을때, 우파카가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갔다고 그랬어요. 그 이야기가 뭐예요? 긍정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비상식에서 출발한다는 거예요. 비상식적인 생각을 해야 새로운 뭔가가 창안되고 만들어지죠. 똑같은 생각을 한다며는, 나는 그것은 노예의 생각이라고 봐요. 내가 아까 이집트의 파라오를 얘기하고, 서울대를 얘기한 것은 그래서 그런 거예요. 서울대와 이집트 파라오를 만든 노예와 차이가 뭐냐는 거예요. 차이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1%의 주인들을 위해서 훌륭한 노예임을 증명하기 위한 그 증명서를 받기 위해 서울대를 가는 거죠. 내 말이 틀렸습니까? 작년인가요, 올해인가요? 재벌가 SK 매값 사건 일어난게? 작년인가요, 올핸가요? 작년인가요? SK그룹의 그 형제, 사촌인가 누구 중의 한 명이  매값 이천만원을 주고 팼다고 그러잖아요. 야구 방맹이로. 근데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나는 그 사람을 탓하지 않아요? 아, 내가 이천만을 주고 패겠다는데 뭐 어쩔겨? 그 자리에는 그 회사의 임원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근데 아무도 그걸 말린 사람들이 없다는 거예요. 왜 안말렸을까요? 주인님의 눈 밖에 나서 쫒겨날까봐, 노예들이 감히 주인님의 그 부당한 짓을 말리지 못한 거예요. 아마 그 노예들은 집에 가서 자식들에게 정의를 이야기 했을 거예요. 너는 똑바로 살아라. 그 회사의 임원 정도 될라면, 아마 많은 것을 좀 쌓았을 게요. 우리가 말해서 똑똑한 사람일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서울대나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상위권 대학에서 증명서를 떼 온 친구들이겠죠. 고대 파라오의 노예와 그 그룹의 임원들이 무엇이 다른 가요? 다른 것 하나도 없어요. 나는 그렇게 봐요. 그들도 노예일 뿐이예요. 주인의 눈 밖에 나면,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 질까봐 그 불의를 보고도 모르는 척 했던 노예나 주인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피라미드를 쌓았던 노예나 다를게 하나도 없죠. 그 사람들은 가장 상식적인 사람들입니다. 상식적인 판단을 한 거죠.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아니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낡은 사고 속에서 마음의 길을 움직였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고 개설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미래는 별로 그렇게 밝지 못해요.

 

스티브 호킹은 지지난 주에도 말했지만, 인류의 미래는 우주를 식민지화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거라고 그랬어요. 스티브 호킹이 요새 한 말이에요, 강연에서. 근데 이거 어디서 마이, 좀 어디에서, 뭔 그림이 딱 떠오르지 않아요? 우주를 식민지화해야 한다고 하는 이 스티브 호킹의 말이, 그 생각이 그림이 쫘악 오잖아요? 유럽이 세계를 식민지화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나 근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해야만이 살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한론과의 차이가 있는가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에 중국을 식민지화할려고 들어간 것과 차이가 있는가요? 없습니다. 스티브 호킹이 그 분야에서는 천재일지 모르지만, 그의 사고는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통해서 부를 만들었던 것과 동일하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해서 유럽의 부를 쌓아올렸던 것과, 그것이 무엇이 다른가요? 스티브 호킹의 이 말이. 틀릴 거 하나도 없습니다. 스티브 호킹도 낡은 시대의 사람일 뿐이죠. 그가 과학적으로 천재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할 만한 그런 자질은 없다는 야기예요.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생각을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나는 봐요.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우주를 식민지화했다고 치자 이 말이예요.  몇 사람이나 혜택받을 수 있는데요? 아마 극소수에 불과할 겁니다. 나한테까지 그런 혜택이 돌아온다고 하는 거는, 그거는 꿈 속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아주 세계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우주를 식민지화해도 혜택을 받을 거예요. 유럽이 세계를 식민지화할 때는 어중이 떠중이 다 혜택을 받았지만, 유럽 백이들 중에서 말이예요.

 

마 오늘 강론은 생각이 안나는게 문제가 아니고, 제가 제일 힘드네요. 유럽의 백인들은 세계를 식민지화해 갈 적에 어중이떠중이 모두가 다 혜택을 받았지만, 우주를 식민지화할 때는 극소수만이 혜택을 받을 수가 있어요. 본질적으로 인간이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죠. 인류의 미래 말이예요. 지금 우리가 덜 행복하거는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본질적으로 인간의 생각의 문제죠.  

 

나는 부처님의 위대하심은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은 것이라고 봐요. 부처님은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었기 때문에, 그 새로운 마음의 길을 따라서, 새로운 말씀이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새로운 생각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말씀이 나온다 말이예요. 그래서 제일성이 뭐예요? 낡은 사고를 버려라! 낡은 사고를 버리라는 것은 낡은 마음의 길을 최소한이라도 정비하고 보수하라고 하는 뜻이예요. 

 

의사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 세상에서 다 빌릴 수 있어도 빌릴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고. 그걸 뭐라고 그러겠어요, 의사 선생님들이. 뭐 한의사 선생님이나 양의사 선생님들이 빌릴 수 없는 거? 그 분들은 건강이라는 거예요. 건강은 빌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건 뭐 의사 선생님들이 강연할 때 항상 하시는 말씀이예요.  건강은 빌리지 못한다. 그렇지마는 나는 의사가 아니래서 생각이 달라요. 건강은 빌릴 수 있습니다. 왜 건강은 빌릴 수 있냐구요? 요새는 하두 의술이 좋아져서, 건강을 적어도 의술이 많은 부분을 채워 주걸랑요. 옛날에는 아프면, 그냥 속수무책으로 죽었습니다. 참 이거 한의사 선생님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마는 나무뿌리, 풀뿔리 삶아 먹다가 그냥 죽잖아요, 옛날에. 뭐 별 수 있어요? 요새는 수술이라고 하는 기법도 있고, 여러가지 기법이 있잖아요. 그래서 적어도 일정 부분의 건강들은 의사선생님들이 채워 준다, 난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적어도 의사선생님이 일정 부분은 건강을 채워줄 수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건강은 빌릴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빌려서 쓸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절대 빌릴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죠. 뭣을 빌릴 수 없을까요? 나는 마음은 빌릴 수 없다고 봐요. 마음은 절대 빌릴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을 누구한테 어떻게 빌릴 수 있는가요? 마음 좀 빌리자 할 수는 없잖아요? 마음은 안 빌려줘요. 샤일록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영혼을 팔죠. 결국은 그로 인해서 파멸하구요. 우리는 내 마음을 빌려 줄 수도 없고, 누구에게서 마음을 빌려 쓸 수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절대 빌릴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마음이라고 봐요. 적어도 100년전에는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이 딩동댕, 정답이었어요. 그러나 현대사회에는 적어도 건강은 일정 부분 빌려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거, 나는 여기 딩동댕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러나 마음은 빌려 쓸 수가 없어요.

 

먼 미래에 과학이 좀 더 발전해서, 인간의 마음을 콘트롤 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마음을 빌릴 수가 없어요. 그거는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죠. 인셉션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며는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바꿔 버리잖아요. 그것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죠. 현실에서는, 지금은 불가능해요. 왜 불가능한지 아세요? 아직 우리는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잘 몰라요. 아주 초기 단계에 불과해요. 지금 과학, 인문 여러 분야에서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서 협업해서 연구하지마는 아직은 마음에 대해서 겨우 실마리를 잡은 정도에 불과해,아직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몰라요. 우리의 뇌도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인해서 생각을 만들어내는지는 어느 정도까지는 알지만, 정말 모든 메카니즘을 해체하지는 못했어요. 다 몰라요. 우리의, 인간의 마지막 탐구 영역은 인간의 마음이 될거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우리 인간의 마음만이 인간이 마지막으로 연구할 수 있는 최후의 연구가 될거라는 거예요. 그마만큼 인간의 마음은 사실 어떻제 작동하는지, 정확히 다 알지 못하고 있어요. 먼 미래에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는 우리는 마음을 빌릴 수가 없어요.        

 

스스로의 마음의 길을 따라 스스로의 생각이 일어나죠. 그리고 스스로의 그 생각이 스스로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고. 우리가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어야 하는 이유는 그 이유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요? 제가 제일 서두에 뭐라고 말씀 드렸는가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은 배우려고 하지만, 정작 부처님의 사유, 즉 생각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제가 이야기했었어요.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생각의 전환 속에서 나온 거예요. 부처님이 어느 날 갑자기 보드가야에서  동료들을 등지고 홀로 네란자 강에서 목욕을 하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해요. 고타마 싯타르타가 타락했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고타마 싯타르타를 비난했어요. 어떻게 저 자와 같은 공간에서 숨쉴 수 있는가하고 그들은 다 떠나 갔죠. 부처님은 그 전에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 얻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근데 부처님은 그거는 궁극의 깨달음이 아니라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그거를 다 뒤로 하죠. 그리고 부처님은 보리수좌에 앉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명상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명상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니까 고것만 열심히 흉내내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마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애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인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죠. 우리 안구가 정확히 모든 사물의 물체를 정말 100% 파악한다고 생각하셔요? 그렇지 않습니다. 얘요? 굉장히 부정확한 애예요. 얘가 굉장히 똑똑한 것 같은데, 안 똑똑해요. 얘? 참 헛것 잘봐요. 얘, 진짜 어리버리비리한 애가 얘요. 우리가 보여지는 건 보통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눈이 의외로 굉장히 어리버리하다는 거예요. 정확하지 않아요. 부정확해요. 우리는 드러나 보이는 것만 진실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명상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꼬고 앉는 것만 하잖아요. 미안한 얘기지만, 부처님이 명상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대사고의 전환이 왔기 때문이예요. 생각이 확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내 재밌는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요새는 사찰에 연꽃밭을 만드는게 유행이여. 근데요 재밌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맑은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은 향기가 별로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거 못 느껴 보셨죠? 아주 시궁창 썪은 냄새 팍팍나는 곳에 가야 연꽃향이 제대로 나죠. 전주에 가면 덕진 연못이 있습니다. 굉장히 큰 연못이죠. 덕진공원 있는데. 동네 하수구는 다 그 연못으로 들어와요. 그래가지구 가며는 아주 시금털털한 시궁창 냄새가 보통 나는게 아니요. 긴데 거기에 연밭이 엄청나게 커요. 근데 연꽃이 한창일 때 가며는 시궁창 냄새를 연꽃향이 밀어내 버려요. 굉장히 향이, 굉장히 진해요. 연꽃이 시궁창에서 꽃핀다고 하는 것이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예요. 연꽃이 향이 짙고 색깔이 좋을라며는 적당히 썪어줘야돼, 물이. 맑은 물에서 피는 연꽃은 사람으로 말하면 그저 영양실조가 걸려서 영양이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향이 별로 없어요. 근데 사람들은 이상하걸랑. 연꽃향은 좋아하면서 시궁창은 싫어해. 그래서 맑은 물에다 심죠. 그것은 연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요. 그것은 사람은 인권이라 그러는데, 연꽃은 연꽃권에 대한 침해여. 이거 인권위원회에 고발해야 할 일이여. 법적으로 시궁창이 아니면, 연꽃을 심으면 엄하게 벌해야 된다고. 연꽃이 시궁창에서 피어나서 향기가 짙고, 색깔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부처님도 사고의 전환이 왔기 때문에 깨달음이 온거예요. 아 뭐 쪼그리고 앉아서 올 것 같으며는 다 쪼그리게. 그러거 아니예요. 사고의 전환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요?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었다고 하는 걸 뜻하는 거예요.  

 

우리가 사추기라는 말을 써요. 사추기라는 말은 나이가 먹어서 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똑같은 길을 매일 반복해서 돌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매일 매일 새로와 봐, 사추기를 느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날마다 봄날인데, 뭣 때문에 그러겠어요. 가을이 되면 우울증이 증가한다는 거예요. 겨울이 되면 더 많아지고. 봄이 되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하고, 한 여름에 태양빛이 강해지며는 웬만한 우울증은 없어진다는 거죠. 굳이 풀어주는 약을 먹지 않아도. 인간만이 그런게 아니라 모든 동물은 낙엽이 지고 태양빛이 줄어들면, 아마 태양빛이 줄어드니까 낙엽이지는 거니까,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한겨울이 되며는 그것이 강해지고. 왜 북구라파에 싸우나라고 하는 것이 발달했겠어요? 인공으로다가 몸에 강한 열을 가해기 위해서죠.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그 쪽에는 겨울이 되면 햇빛을 보는 것이 거의 힘들어지잖아요. 우리가 사추기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동일한 길을 매일 왔다갔다 갔다왔다 하잖아요. 동일한 사람과 동일한 밥상에서 동일한 집에서 동일하게 살고. 사람도 매일 바뀌고 집도 매일 바뀌어 봐, 정신이 없어서도 뭐 그런 거 생각할 처지가 아니여. 매일 사람이 바뀌면 매일 그 사람한테 적응할려고 서로 노력해야 되니까, 고런 작은 일들은 생각도 몬해. 매일 이삿짐 싸서 이사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뭣이라? 아! 권태롭다구? 그런 생각 안들어요. 매일 주인이 방빼라는데 그럴 사이 있나? 이것은 비유가, 그저 지나친 비약이지만, 우리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도 맨날 마음의 길을, 동일한 마음의 길을 따라서 동일하게 움직이니까 맨날 똑같은 생각밖에 못하는 거예요.     

 

내가 오늘 드리고자고 하는 말씀은 뭐냐?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어라는 거예요. 그걸 개설하라는 거예요. 내가 저번에 몇 번 이야기를 했었는데,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지고 있는 자신, 마음의 거울에 비춰질 자신을, 내가 보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진 나는 과거의 납니다.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지고 있는 나는 지금 현재의 나죠. 거울에 비추어질 나는 미래의 납니다. 거울에 비추어진 과거의 나와 지금 거울에 비추어지고 있는 현재의 나와, 미래에 비추어질 나가 어떤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가를  내가 보라고 하는 뜻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한 번 봐 보세요. 어떤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가. 아까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아무도 새로운 길을 가본 사람은 없어요. 과거에 비추어진 나와 현재에 비추어진 나는 어떤가요? 우리는 그건 경험한 나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즉 우리가 그 길의 궤적을 따라서 왔기 때문에 그것은 경험한 나예요. 그렇지마는 미래에 비추어질 나는 아직 경험한 나가 아니예요. 우리는 아직 미래를 걷지 못했걸랑요.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새로운 마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비추어진 나와, 현재에 비추어지고 있는 나와, 미래에 비추어질 나를 보면서 마음의 길을 열고, 우리가 개설할 수가 있어요. 마음의 길을 새롭게 여는 거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마음의 길을 건설하는 거는 포크레인을 가지고 온다고 그래서 되는게 아니야. 본인 스스로의 마음에 비추어진, 비추어지고 있는, 비추어질 나를 봤을 때, 비로소 마음의 길을 내가 열수가 있죠. 아까 말씀드렸지마는 마음은 빌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 마음의 길을, 마음의 길은 우리가 빌려서 갈 수가 없다는 걸 뜻하죠. 내 마음의 길은 내가 건설하고, 내 마음의 길은 내가 개설하는 거예요. 그 유일한 건설장비는 거울에 비추어진, 거울에 비추어지고 있는, 거울에 비추어질 나 자신을 보는 거죠. 그러면 궤적을 알수가 있죠. 그러면 그 새로운 길을 어느 쪽으로 열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가 알 수가 있죠. 이것은 누가 가르켜주지 않아도 알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어요. 지혜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알 수가 있어요. 지혜라고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실 거 없어요. 우리 모두는 다 지혜를 가지고 있어요. 다만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쓰고 있지 못할 뿐이죠.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는데도 아껴두느라고 쓰지 않기 때문에. 지혜를 아끼실 필요 없어요. 과감하게 써셔도 되요. 그 썼다고 누가 와서 따지는 사람 없어요.  

 

오늘 이야기는 마음의 길입니다. 마음의 길. 땅위에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 마음의 길을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이동하고, 그 생각의 이동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도 나오죠.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여는데, 올 연말에는 한 번 시간을 좀 써 보세요. 중국의 어느 선사는 운봉 문열 선사에게 이렇게 말했죠. 왜 시간이 썪어 없어질까봐 걱정이냐? 시간은 썪어서 없어지는 거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도 닦으라는 이야기예요. 아! 대우수지 선사가 하신 말씀이예요.  마 이제 생각이 났습니다. 운봉 무열선사의 스승이 대우 수지 선산인데. 운봉 문열 선사가 자꾸 도를 가르켜 달라고 그러니까, 어느 날 대우 수지 선사가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왜 그 사이 도가 썪어질까봐 걱정이냐? ' 시간은 썩어서 없어지는게 아니예요. 시간은 썪어서 없어지는게 아니니까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여는데 시간을 좀 할애해서 써 보세요. 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 오늘은 어느 분이 강론을, 끝에 기도를 어느 분이 이끌어 주실라는가요? 아니 뭐 자세를 보면, 김은숙님이 딱 그 자세인데... (하하하 하하하) 그래요. 뭐 하실 분이 없으면, 제가 하지요. 다 함께 합장하세요.

 

자비하신 부처님, 오늘도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 하신 말씀에 낡은 사고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낡은 사고를 버리는 사고의 전환이 쉽지마는, 저희들에게는 어렵고 또한 어렵습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무엇을 버려야하는지 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버리고 싶으나 무엇을 버려야 할지 잘 모르겠고, 나에게 버려야 할 것이 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저희를 지혜의 길로 인도하시어, 저희의 지혜가 저희 앞날을 밝혀주도록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이  저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하는 저희 가족과 저희 이웃에게도 그와 같은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예 내려 가시죠. 

 
애절한 노래 20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