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혜천스님설교

2019. 2. 10. 12: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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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천스님 일요강론 : 2011.11.27

조금만 더

 

 

어저께 마하밧가를 읽다가 안냐 꼰단냐(Aññākondañña, 憍陳如)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온전한 만족을 얻었다'라는 대목이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콘다냐는 부처님 최초의 제자 다섯분중 한분으로 제1제자임. 그 다섯 제자는 안냐 꼰단냐, 밥파,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로 붓다의 성도 후에 초전법륜을 듣고 최초로 붓다에게 귀의하여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고 '온전한 만족'을 얻었다라는 안냐 꼰다냐의 대목에서 아주 오래전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록키라는 영화입니다. 참피온 아폴로와의 대전을 앞두고 주인공은 두려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자 그의 애인이었던 에이드리안은 그에게 시합을 포기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시합에 져도, 머리가 터져도 상관없어, 그저  15회 종소리가 울릴때까지 내 두발로 서 있을 수 있다면 내 인생에 처음 뭔가를 한 것으로 기억될 거야..'라는 말을 합니다. 그 다음날 시합은 벌어지고 둘은 피튀기는 경기를 15회 내내 합니다. 그리고 종이 울리고 주인공은 근소한 차이로 판정패를 당합니다. 관중들은 열렬한 환호를 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챔피온 아폴로와 싸워서 두발로 서 있던 선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록키가 처음이었습니다. 록키 눈은 부풀어 올랐고,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록키는 관중의 환호를 들으며 자기 애인 에이드리안에게 외칩니다. '내가 해냈어~, 15회까지 두발로 서서 버텨냈어~'하고 말입니다.

 

아마 콘다냐가 얻었다고 하는 '온전한 만족'은 이런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록키는 한물간 복서로 30이 넘어서야 챔피언전에 나서는 찬스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상대는 너무 강했습니다. 두려움을 느꼇습니다. 우리 누구도 록키의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두발로 종이 울릴때까지 버텨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전한 만족을 얻었습니다. 콘다냐의 만족이 형이상학적이요, 록키의 피튀기는 버팀은 형이하학적이었을까요? 어떤 것이 고귀하고 어떤것이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두 장면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콘다냐는 부처님과 같은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하에서 깨달음을 얻고 강에 나가 몸을 씻고 우유죽을 먹은 부처가 바라나시로 그들을 찾아갑니다. 콘다냐는 그자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온전한 만족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이 말을 듣고, "콘다냐가 법에 눈을 떳다"고 기뻐하십니다. 수행은 자신의 몸을 한계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고행은 자신의 몸을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콘다냐는 바로 이런 고행을 생활로 알던 수행자 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극한의 길을 찾던 그가 중도의 길을 얘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고행이든 쾌락이든 내몸을 한계까지 끌고 가 본적이 없습니다. 한계지점은 온 몸으로 느낌을 얘기합니다. 티벳의 불교는 몸을 한계까지 끌고 갑니다. 라싸 포탈라궁으로 가기위한 수천리의 오체투지를 합니다. 우리는 삼천배, 만배, 백만배를 얘기합니다. 어느 스님은 툭하면 백만배를 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렇지만 티벳의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발바닥의 떄만도 못합니다. 절이나 중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체투지로 수천리 포탈라궁으로 향하는 고행은 콘다냐의 고행이나 록키의 버티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한계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추론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코나냐도 그런 고행이 있었기에 중도의 가르침을 접하고 받아들일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얘기합니다만 그전에 온전한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만족이 없이는 깨달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깨달음을 선언한 수많은 사람들은 왜 현실에서 꽃피우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의 조작된 관념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만족을 얻고 있는가. 스스로 마음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보고, 또 비춰질 자신을 비교해 보십시오. 마음의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과거 마음의 거울에 비춰진 모습과 현재에 비춰진 모습과 미래이 비추어질 모습에 나는 어떤 만족을 얻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하밧가를 읽다가 이구절 '온전한 만족'이 가슴 깊이 들어 왔습니다. 로키의 대사는 우리 삶을 대변합니다. '시합에 져도, 머리가 깨져도 경기가 끝날때까지 두 다리로 버티면 된다'는 각오로 실제로 그는 그일을 이루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뭔가를 이뤄 냈다는 순간, 그런 순간이 있었던가? 콘다냐는 온전한 만족을 얻었고, 그의 인생에 뭔가를 얻은 것입니다. 붓다도 이를 두고 진리에 눈을 떳다라고 얘길했습니다. 로키도 그의 애인 에이드리안에게 '내가 해냈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목적한 것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사실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면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힘들어겠다는 것만을 알수 있을 뿐입니다. 온전한 만족이 없이는 나머지 존재는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콘다냐는 온전한 만족을 얻었습니다. 누구나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특수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특수한 것이지만 온전한 만족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한 만족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울에 비춰질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해 나가야 합니다. 지난 번에 미래의 행복을 팔아 현재의 행복을 사지말라 고 해씁니다. 현재 비춰진 거울은 현재의 것입니다. 현재의 행복없이는 온전한 만족을 얻기도 힙듭니다. 우리는 남을 보고 땀 한방울까지 짜내라. 최선을 다하라라고 하고, 게으르고 무력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시면, "혜천은 참 시간도 많다, 뭐가 저리 여유가 있느냐, 재만 보면 답답하다"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제가 미얀마에 있을때 저랑 동갑내기 스님이 있었습니다. 뭐 별로 맞는 것도 없었지만, 단지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냈는데 수행하는데 자꾸 빗나가는 겁니다. 아신 코살라 사야도님이 지도를 하다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천장을 보고 한숨을 세번 내쉽니다. 일반 사람들은 퇴출시킬수 있지만, 비구는 누구도 퇴출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것처럼 부처님이 나를 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미래로 나가는 존재입니다. 인류는 이동의 역사입니다. 정주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이동하고 미래로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먹을 것, 살길을 차장 이동을 하다보니 멈추고 싶은 것입니다. 정주에 대한 욕구가 커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의 흐름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오죽 쉬고 싶었으면 아파트 이름도 休라고 짓겠습니까. 休는 쉰다는 뜻도 있지만, 편안한 휴, 기뻐할 휴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동의 역사입니다. 조금 더 우아하고, 품격있게 가고 싶어합니다. 아프리카 동물의 이동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널때는 동료 몇이 희생을 합니다. 남극의 바다표범은 펭귄의 이동 시기가 되면 몰려와 있습니다. 그러면 펭귄무리중에 누군가 밀어뜨립니다. 그 몇의 희생으로 무리는 이동을 하게 됩니다. 시간의 이동을 따라 이동을 하는데 종착지는 미래입니다. 현재, 과거라는 말은 미래가 없다면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시간을 따라 미래로 갑니다. 온전한 만족을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온전한 만족을 얻을 미래, 온전한 만족을 얻기위한 투자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필연이었든 우연이었든 우리는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하려면 온전한 만족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로키는 '내가 해냈다'라는 온전한 만족을 얻었습니다. 콘다냐의 온전한 만족과 차이가 있다고 해도 굳이 그것을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한전석(滿漢全席)은 중국의 황제가 먹는 만민족과 한나라의 음식을 모두 차려놓는 음식상입니다. 한끼마다 다른 요리를 먹어도 몇달이 걸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도 우리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청도 운문면에 짜장면 요리를 잘하는 집이 있습니다. 물론 운문사 스님들이 주고객이니 짜장의 맛을 내는 돼지고기 기름과 향긋한 맛을 내는 양파를 빼고 조리가 됩니다. 그래도 맛있습니다. 

 

온전한 만족을 얻으려는 지향이 있을 뿐입니다. 온전한 만족 없이는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나는 완전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고 온전해지려고 합니다. 완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과는 모과입니다. 울퉁불퉁한 모과이면 되는 것입니다. 공자는 고기도 각을 내야 먹고 과일도 평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과일이 벌레 먹은들 그 자체가 완전한 모습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이 완전한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것이 콘다냐의 깨달음이지 무언가 터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자신을 발견한 것이라고 봅니다. 반드시 한계지점까지 간다고 훌륭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본래의 마음과 몸이 회복된 것입니다. 치열한 삶을 너무 스스로에게 강조하지 마십시오. 안되면 되게하라 따위는 없습니다. 너는 할 수 있는게 뭐냐..라고 스스로에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의 할만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자라고 합시다. 그것이면 온전한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것도 못해?하는 마음때문에 늘 불안하고, 동요하는 것입니다. 거북이보고 말처럼 뛰라, 거북이는 몇백년이 지나도 말처럼 뛰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역량 이상을 하라고 채찍질하지 마세요.

 

나는 수행은 한계성을 열고 무한의 가능성으로 가는 것이라 봅니다. 우리는 남에게 그것을 강요합니다. 이럴때 마다 그렇다면 나는? 이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스스로의 한계성을 넘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그것을 원하고 바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능성은 사람마다 다름니다. 쥐는 고양이를 못이기고, 톰슨가젤은 사자를 이기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속에 온전한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두발로 설수 있을때에야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서지도 못하는 사람이 걷는 것은 현실에 없습니다.

 

콘다냐는 이것을 알았고, 보았습니다. 더 이상 의심이 없었습니다. 의심없음은 의심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콘다냐가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강을 건너 이동했다면 우리도 강을 건너 이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구만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콘다냐가 온전한 만족을 얻었다고 찬양할 뿐 스스로 온전한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했다면 우리도 할 수있는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자산입니다.

 

마하밧가를 읽다가 콘다냐의 희열이 가슴 속 깊이 들어 왔습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 미래의 온전한 만족을 얻기 위해 강을 건너는 톰슨가젤처럼 한계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가능성을 열고 무한의 세계에 다다를수 있습니다. 오늘의 강론주제는 '조금만 더~ ' 입니다. 조금만 더 한계에 나서보고 조금만 더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왕창 더~가 아니라 '조금만 더~' 입니다. 오늘은 누가 기도로 이 강론을 이끌어주시겠습니까?    

 

 

마하밧가(Mahavagga, 大品) : 불전기록 중 가장 고대에 속하는 파알리어 성전 율장(Vinaya pitaka, 律藏)

 

 

아침 출근부터 펴놓고 정리하다 전화받고 일보고, 손님받고, 전화하고.... 정신이 없는데다 적어놓은 메모장도 오락가락, 기억이 날듯말듯, 알듯 모를듯... 조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문혜님이 펼쳐놓는 수려한 HD급 풀임글에 비하면 오히려 선우님들의 정신을 헛갈리게 할까봐 아예 포기할까도 생각했습니다만, 조금만 더~ 노력하자는 마음으로 그나마의 정리를 마쳤습니다. 아무래도 문혜님의 정밀한 정리가 뒤따라준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만, 그 역시 그분의 마음대로 이겠지요...

정신 헛갈리게 충실치 못하여 죄송합니다만, 대략의 문맥으로나 참고해주시고, 두루 이해를 바랍니다.    _()_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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