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이 부처다

2019. 4. 7. 10:3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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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이 부처다

6. 자기의 무명(無明)이 본래 '부처'이다

- 대우거사님



이제 우리는 조심스럽게 스스로 <'공'이 이루어지고 '행'이 찬>(功成行滿) 경지에 대해서

당당히 자증(自證)할 수 있는 시기를 성큼 앞당겨야 합니다.

즉 '남(生)이 없는 도리'(無生法忍)에서 시작해서,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얻어,

'성품 없는 도리'(無性之理)를 굴리면서, '시간 없는 법문'(無時之門)에 이르기까지

종횡으로 자재하게 운용할 수 있는 채비가 충분히 갖추어졌습니다.

이제 '인과법'(因果法)도 손아귀에 틀어쥐고 '시작'과 '끝'을 '한 때'와 '한 곳'과 '한 성품'으로

 꿰어서 두루 원만히 운전하는, 걸림 없는 '법계'(法界)에 성큼 들어서야 하는 겁니다.

망설이는 자는 결코 '법계'에 들지 못합니다.

'입법계'(入法界)의 요체(要諦)는 다만 지금 <있는 이대로일 뿐>,

결코 달리 변화하기를 기다리거나, 바꿔치기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일입니다.


유마경(維摩經)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이 천녀(天女)에게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하니, 천녀가 말하되, 「내가 십이 년 동안을 여인의 상(相)을 구하여도 마침내 얻지 못하였거늘,

마땅히 무엇을 가히 바꿀 바이랴?」 했으니, ···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만법이 본래 스스로 체성(體性)이 여여(如如)하거늘

무엇을 가히 바꿀 것이 있으랴?』라고 했습니다.


대개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에는, 마치 흐린 물을 맑히는 것과 같아서,

조촐히 닦아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고요해지고 움직이지 않게 되면,

이것은 마치 흙의 앙금이 가라앉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단계에서, '본성'(本性)을 등지고 밖으로 떠도는, <티끌 수같이 많은 번뇌>

(客塵煩惱)를 조복(調伏)하는 것과 같지요. 이 때까지는 앙금이 비록 가라앉긴 했으나

흔들면 다시 흐려지기 때문에 능히 세속의 티끌경계(塵境)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겁니다.

― 그러나 결국은 아무리 흔들어대도 결코 다시는 흐려지지 않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겠어요? ― 그렇게 되려면 당연히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 가라앉은 앙금을

말끔히 버려 버리고 순수한 맑은 물만 남도록 해서, 다시는 흔들어도 결코 흐려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죠.

 여기까지가 범부나 이승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수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은, 그 '물'이 비록 겉보기에는 흐려진 것 같지만,

'물' 자체는 일찍이 더러워진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만법의 '성품 없는 도리'를 깨치고 보면, '물'도 '앙금'도 '흐림'도 '맑음'도 이

모두가 다만 '빈 말'일 뿐이니, 무엇을 다시 버리고 말고 할 게 있겠습니까?

이것이 곧 처음에 '지혜'가 나타나서, 그 '지혜'가 점차로 익어감에 따라 '근본무명'

(根本無明)을 '영원히 끊는 것'(永斷)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功)이 이루어진 보살이 이른바 '보현행'(普賢行)을 운전하면서 세속에 들어서

뭇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짓는 일도 없고(無作), 그치는 일도 없으며(無止),

의도하는 바도 없고, '나'(我)도 없어서, 일체가 오직 평상한 자재행(自在行)일 뿐이므로

이를 '항상한 도'(常道)라고 하는 겁니다.

범부들은 세간에 물들어서 능히 벗어나지 못하고, 이승들은 비록 여의기는 하지만, 능히

세간에 들어서 세간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이 '진짜 여읨'이 아니지만, ···

그러나 발심한 첫머리에 몰록 '일승의 불과'(一乘佛果)를 얻은 '일승의 보살'은 공부를

지어감에 따라서 애쓰지 않고도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자라나서, '자비'로써 능히 세간을

따르지만, '지혜'로써 능히 물들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도 이미 '성품의 여읨'(性離)을 깨쳐서 일찍이 만법을 여의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겁니다. 즉 지금에 와서 새삼 깨치고 나서야 비로소 만법을 여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도무지 '깨끗한 지견'(淨見)조차도 없는데, 어찌 하물며

'물든 모습'(染相)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세간을 따르는 일도, 세간을 여의는 일도 다 함께 없어야만> 비로소 바야흐로

그 이름이 <진정으로 세간을 여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에 이르기를,···

『세존(世尊)께서 어느 날 문수(文殊)가 문 밖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는 말씀하시기를, ···
「문수여, 어찌하여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가?」 하니, 문수가 대답하기를, ···
「세존이시여! 저는 한 법도 문 밖에 있음을 보지 않거늘,

어찌 저 보고 "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까?』 하였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생각'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즉,···

(1) 만약 <분명한 '기억'으로써 생각을 삼으면> 이것을 일러서 '염교'(念敎),

즉 <배운 바를 잘 기억해서 행한다>고 말합니다.

즉 그 동안 얻어들은 지식의 토막들을 잘 기억해 짊어지고 다니면서, 이것을 밑천 삼아서

마냥 허망한 생각을 굴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가령 「마음 속에는 본래 '생각하는 주체'(能念)도 없고, '생각하는 바'(所念)도 없다」고

알고 있으면, 이것을 일러서 <배운 바를 순히 따르는 것>(隨順)이라고 하며,

이것을 '염교'(念敎)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범부나 성문(聲聞), 연각(緣覺)과 삼승(三乘)의 보살들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조작 없는 천진한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하지요.

― 이 같은 말도 좋은 법문은 되지 못하는 것이, 곧 <지금의 자기 목소리>를 여의고는

<천진한 제 목소리>를 찾아서 두리번거릴 게 뻔하니까요. ― 이 말의 참뜻은 예컨대,

절간에서 기르는 앵무새가 "비었다"는 말을 하도 자주 듣다 보니, 이 '말'을 배워 가지곤

사람을 볼 때마다 "비었다"고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고 칩시다.

이것은 결코 앵무새가 그 말의 뜻을 알아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지 않겠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각은 그 모두가 오직 줏어들은 소리들을 망령된 업식(妄識)으로

그럴싸하게 엮어서 되 말아내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경책해서 하는 말인데, 그 참뜻을 알지 못하고, 이런 말을 들으면

곧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묘한 소리를 들으려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가,

또는 심한 경우에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른바 '자기 주인공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떠벌리면서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하는 무리들까지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결단코 <'마음'뿐>(唯心)입니다.

'마음' 안에도 '마음' 밖에도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부처'도 숨을 죽여야 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것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현재 면전에서 또렷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도 그 모두가 다만 인연 따라서 생멸하는

허망한 메아리와 같은 건데, 하물며 혼미한 망식(妄識)이 말아내는 환청(幻聽)이겠습니까?


(2) 이에 반해서 만약 <'생각 없음'(無念)으로써 생각하는 것>은 이것을 '염증'(念證)이라고

합니다. 즉 <바로 생각을 몰록 여의면 이것을 일러서 '증득하여 들어감'(得入)이라 하고>,

이것을 '염증'이라 하는 겁니다.


이 경우 '증득하는 때'(證時)가 매우 미묘해서, ― '생각 있음'이 그대로 '생각 없음'임을

깨달은 터이므로 ― 그저 늘 여여해서, '증득한 경지'와 '증득하지 못한 경지'를 별달리

가려서 '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봄(見)이 없고, 얻음(得)이 없어야 바야흐로

비로소 능히 '증득함'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때 '청정'(淸淨)이라는 말도 매우 미묘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 이미 '성품의 여읨'(性離)을 보았으므로, '성품'이 본래 온갖 번뇌를 여의어서,

'먼저'는 물들었다가 '나중'에 여의어서 깨끗해지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그 이름이 '성품의 청정'(性淨)이 되는 겁니다. ― 즉 본래 온갖 법을 여의지 않을

때가 없어서 언제나 고요하므로 이것이 바로 '성품이 청정한 열반'(性淨涅槃)인 겁니다.


경에 이르기를,···

『세존께서 영산(靈山)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네 가지의 꽃비가 내리니,

세존께서 그 꽃을 들어서 대중에게 보였더니, 가섭(迦葉)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있는데 마하가섭

(摩訶迦葉)에게 부촉(付囑)하노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승천회(承天懷)가 이 화두를 들고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선서(善逝; 如來)께서 꽃을 들어 묘용(妙用)을 보이시니
음광(飮光; 迦葉)이 미소지어 천기(天機)를 누설했네.
이로부터 흘러흘러 동서에 전해지니
공연히 사람들을 시비에 빠뜨리네.


해회단(海會端)이 다시 이 화두를 들고 말하기를,···

『차례로 전하여서 끊이지 않게 하여 오늘에 이르렀거니와, 대중이여! '정법안장'이라면

석가노자(釋迦老子) 자신도 분수가 없겠거늘, 무엇을 분부했으며 무엇을 유포했으랴?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여러분의 분상(分上)에 이미 제각기 '정법안장'이 있어서,

매일 기상하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동서남북을 가리며, 갖가지로 하는 모든 일들이

몽땅 이 '정법안장의 광영(光影)'이기 때문이니,···

이 안목이 열릴 때엔 건곤대지(乾坤大地), 일월성신(日月星辰), 삼라만상이 그저 면전에

있되, 털끝만한 형상도 있음을 보지 않거니와, 이 안목이 열리기 전에는 모두 그대들의

눈동자 속에 있느니라.

오늘날, 이미 안목이 열린 이는 괜찮겠지만, 아직 열리지 않은 이가 있다면 산승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여러분을 위하여 이 '정법안장'을 열어 보이리라.』 하고는

손을 들어서 '두 손가락'을 세우고서 말하기를,···

『보라, 보라! 만약 보았다면 매사가 한 집안 일처럼 같겠거니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산승은 다시 게송을 말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고는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정법안장'은 천 성현이 감당할 수 없도다.
대중이 이미 재주껏 말해 마쳤거늘 어찌하여 상량(商量; 헤아림)할 구절이 없다 하는가?


일체 만유는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스스로는 체성이 없어서 남(生)이 없으며,

 따라서 만약 '작자'(作者)가 있어서 뜻을 세우고 생각을 내어서 애써 작용을 일으키더라도

이 모두가 전혀 성취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온갖 법에 공력을 들이는 일이 없이, 오직 인연을 따르면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증득하여 <작용하되 작용함이 없는 작용>(作無作作)을

자재하게 굴릴 줄 알아야 비로소 이것을 <'부처의 집안'(佛家)에 태어난

참된 '부처 자식'(佛子)>이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부처 집안'이란 여래의 '작용 없는 근본지'(無作根本智)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공용이 없는 도'(無功用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영겁의 세월을 두고 '육바라밀'

(六波羅密) 등 온갖 수행을 행하더라도 만약 이 '여래의 근본지혜의 집'(如來根本智家)에

나지 못하면, 그의 모든 짓는 바, 하는 바가 다 '공용이 있음'(有功用)에 떨어져서 그 결과는

모조리 허망으로 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따라서 그를 <'진실된 덕'(實德)이 없는 보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비록 '불성'(佛性)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 '공용이 없는 행'(無功用行)을 드러내서,

<'고요함'과 '작용'이 둘이 아닌 도리>를 자재하게 굴릴 수 없다면 오히려 그를 일러서

'가짜 보살'이라고 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엔 끝내 능·소가 다하지 못해서 여전히 범용한 '자아'가 허망한 '유위행'을

그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신령스러운 성품'(靈性)을 등지게 되는 겁니다.

'여래 지혜의 업'(如來智業)이 드러나면 '이와 사'(理事), '성과 상'(性相), '범부와 성인'(凡聖),

'참과 허망'(眞妄) 등이 홀연히 원융되게 서로 사무쳐서, 그 '자비'가 지극히 크지만 결코

애착하는 마음에 얽매이는 일이 없고, 종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도

도무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 근본지'의 '공용이 없는 행업'(無功用行業)인데, 곧 ― '공용'이 없으니

'고요함'(寂)이요, '행'은 바로 '작용'(用)이므로, 이것이 바로 <고요함과 작용이 둘이 없는

'지혜'의 업> (寂用無二智業)인 겁니다.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등 삼승(三乘)은 아직 방편의 가르침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어쩔 수 없어서 '수행'과 '증득'을 권한 거지만, 지금에 열심히 '인행'(因行)을

닦아서 훗날 그 공덕으로 '결과'를 '증득'하는, 이렇게 <'공용이 있는 것'(有功用)은 결코

실다움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루어져서, 잠시 머물렀다가, 허물어지면서, 사라져가는>(成住壞空), 이와 같은

현상은 인연을 따르면서 생멸하는 허망한 현상들이라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 아닙니까?

다만 지금에 새삼스럽게 여겨지는 건, 그 동안엔 말로써만 이해했고, 그런 경지를 실제로

체달하지 못했던 데서 오는 일시적인 불일치 현상일 뿐인 겁니다.

따라서 저 화신불(化身佛)이 49년 동안을 동분서주하면서 애쓴 보람도 결국은 그 성교(聖敎)를

대하는 중생이 능소의 자취를 쓸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곧, ― '설함'(說)이 있고, '들음'(聽)이

있는 한 ― 그것이 '방편의 가르침'(權敎)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답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게 소경의 탓이지, 어찌 '해'의 탓이겠어요?

따라서 <49년에 걸친 화신불의 가르침도 권교(權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결코

세존의 가르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헐어 내리기는커녕, 그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참된 뜻을 밝힘으로써, 오직 '말'과 '문자'에만

매달려서 <끝내 말로써 드러낼 수 없는 '성지'(聖旨)>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책하자는

것뿐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천명함으로써, '부처' 자신의 존재마저도 넘어선 경지를

드러내고자 한 점입니다.

결코 그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눈먼 가르침을 편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위대함이 만세에

떨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이르기를,···

『이 경전의 보배(珍寶)는 모든 <그 밖의 중생들>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오직 '여래 법왕의

참 자식'(如來法王眞子)이 '여래의 집안'(如來家)에 나서 '여래 종자'(如來種)의 모든 선근(善根)을

심은 자라야 하는 것이니, ― 따라서 불자(佛子)야! 만약 이와 같은 '부처의 참 자식'이 없으면

이 법문이 머지않아 흩어져 멸하리라.』고 했던 겁니다.


여기서 <그 밖의 중생들>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게 <그 밖의 중생>

일까요? ― 끝내 이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붙잡아 '나'로 삼고, 안의 육근(六根;

눈 귀 코 혀 몸 뜻)이 밖의 육진(六塵;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상대로 끊임없이

육식(六識)을 말아내는, 그런 중생들을 말합니다. ―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몰록 회심하지 못하고,

 끝내 '나'와 '내 것'에 얽매어 있는 한, 그 천 년 묵은 멍에를 어느 세월에 벗어 던질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일승 보살'의 가는 길은 세속의 정식(情識)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그 관행(觀行)은 범부의 그것과 전혀 다르고, 의지함과 청정함도 외도의 자존하는

무리들과는 다르며, 또한 그 공덕은 소승들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 '관행'(觀行)이란 곧 '일승 보살'의 '지혜 눈'(智眼)을 드러내는 것인데, 즉 범부들이 늘

면전에서 법을 취하는 것과는 달리, 이들은 '법의 있음' 도 보지 않고, '법의 없음'도 보지 않으며,···

△ '의지'(依支)함은 곧 '일승 보살'의 '지덕'(智德; 닦아서 얻는 지혜의 덕)이 드러 나는 모습인데,

즉 이미 '성덕'(性德; 본래 갖추어진 성품의 덕)을 갖추었기 때문 에 '육바라밀' 등을 닦아서

미혹을 조복(調伏)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 이며,···

△ '청정'(淸淨)함은 곧 '일승 보살'의 '단덕'(斷德; 끊음의 덕)의 나타나는 것 인데, 즉 이미

 '성품의 청정함'(性淨)을 얻었기 때문에, 저 외도들이 '견 혹'(見惑)과 '망상'(妄想) 등을

멸함으로써 비로소 '청정'함을 삼는 것과 는 같지 않으며,···

△ '공덕'(功德)은 곧 '일승 보살'이 만법의 '성품 없는 도리'(無性之理)를 보아서 '평등성지'

(平等性智)를 얻었기 때문에, 달리 '공덕의 있고 없음' 을 가릴 게 없으므로,

저 소승들이 '법에 대한 집착'(法執)을 끊지 못해 서 '평등'을 얻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대체로 <'일승 보살'이 '미혹을 끊는 것'(斷惑)>은 범부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즉 범부들은 당연히 끊어야 할 '미혹'이 있기 때문에 능히 '끊음 없는 끊음'(無斷之斷)의 도리를

알지 못하지만, 이제 '일승의 보살'은 <'끊을 것 있음'(斷)과 '끊을 것 없음'(無斷)을 모두

보냈기 때문에> 이에 비로소 '참된 평등'을 얻었다고 하는 겁니다.

요컨대, <'미혹'을 끊는다>(斷惑相)는 것은 곧, 삼시(三時; 과거 현재 미래)에 끊을 것이

없어야 비로소 '참된 끊음'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성품이 없다'(無性)는 것은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없다는 것이며,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없는 것이 바로 '성품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처음과 중간과 나중을 끊을 수 있는 겁니다. 이건 또한 '인연'이기 때문에

'성품이 없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인연'이라는 도리와도 같은 겁니다.


경에 이르기를,···

『어느 날, 흑씨 범지(黑氏梵志)가 신통력을 부려서 양손에 합환 오동꽃(合歡梧桐) 두 송이를

들고 와서 세존께 공양했습니다. 이에 세존이 ···
「선인(仙人)아!」 하고 불러서 범지가 대답하니, 세존이 말하되, ···
「놓아 버리라!(放下着)」고 했습니다. 이에 범지가 왼손에 들었던 꽃 한 송이를 버렸더니,

 세존은 다시 부르면서, ···
「선인아! 놓아 버리라!」고 하니, 범지는 다시 오른손에 들었던 꽃 한 송이를 마저 버렸습니다.

그런데 세존이 다시 부르면서, ···
「선인아! 놓아 버리라!」고 하니, 범지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빈 몸으로 서 있거늘, 다시 또 무엇을 버리라고 하시나이까?」

했습니다. 이에 세존이 말하기를, ···
「나는 그대에게 그 꽃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니라. 그대는 밖의 육진(六塵)과 안의 육근(六根)과

중간의 육식(六識)을 일시에 모두 버려서, 더는 버릴 것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이것이 그대가

생사(生死)를 면하는 곳이니라.」 하니, 범지가 이 말끝에 홀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른바 '합리적인 사유'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이 '일승'(一乘)의 오묘한 이치를

미혹하면 곧 범부에 해당하는 것이고, 깨치면 바로 '부처'인 겁니다.

따라서 '일승'을 깨치고 나면 혹시 '남은 습기'(餘習)가 있더라도 '본래 지혜'(本智)로 대처하기

때문에 '대처'도 없고 '시간의 경과'도 없습니다. '지혜'가 열리지 않으면 그저 꺾어서 굴복시키는

것만을 능사로 알아서, 결코 '부처 지혜'의 이른바 '사수(駟水)의 흐름'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세월을 두고 헛수고를 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아 들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사수(駟水)라고 하는 것은 '급한 물'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돈증법'(頓證法)에 비유한 말입니다. '인과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부들은

<온갖 망상이 본래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시종 '찍어눌러서 굴복시키거나'(抑折), '가지런하게 다스리거나'(調伏), 아니면 기껏해야

회피하고 도망치는 것밖에 알지 못하는 겁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 '몰록 증득'(頓證)하는 '불법'의 '묘한 이치'(妙理)에 들지 못하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 뒤에야 겨우 '회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현정의 회상'(顯正會上)에서는 지금 당장에 '불과'(佛果)를 줍니다.

 '발심'(發心)이 그대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발심했을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루어서>

(初發心時便成正覺), 더는 차례도 계급도 없기 때문입니다.


화엄론(華嚴論)의 논주(論主) 이통현(李通玄)은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부처는 이 중생심 가운데의 부처라
자기의 근기로 감당함을 따를 뿐, 다른 물건이 없도다.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고자 하거든
다만 자기의 무명(無明)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라.


 
  김광석 다시부르기 1(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