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마음 |…… 혜천스님설교

2019. 3. 31. 11: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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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불기 2556년 2월 5

진실한 마음 

 

 

아, 우선 공지사항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법회를 9시 반에 시작합니다. 9시 반에 시작해서 10시 반에, 끝난 건 같습니다. 30분 축소. 이야기가 늘어져 가지고 줄여야 돼. 다음 주부터는 9시 반입니다. 그걸 카페의 공지사항에 올려주시고. 그리고 다다음 주부터 반야심경 강독을 할라 그럽니다. 마, 지난 여름에 우리 석두께서 강독을 하자 그랬었는데, 그 때 내가 강독을 구상했다가 마, 몬했습니다. 다음 주는 너무 급할 것 같고, 다다음 주부터, 아 그러니까 20, 21, 22, 23, 24일 이렇게 되죠. 아 그렇다고 매일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에~ 그 주부터 시작할건데, 월화수목금에서 우리 선우님들이 고르세요. 에, 강독시간은 저녁 7시에 할 겁니다. 시간은 고르시고, 그리고 에, 이번 반야심경의 강독은 저번에는 교리 측면에서 전에는 했는데...이번에는... 나는 반야심경이라고 하는 것은 대념처경의 재구성이라고 나는 보는 사람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 측면에서 반야심경을 강독하기로 하겠습니다. 월화수목금에서 가장 좋은 날을 고르세요. 못 고르시겠거든 동전을 던지셔도 좋고. 이번 반야심경 강독은 간단 명료하게 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이라고 하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도 행심반야라고 하고 있걸랑요. 심심미묘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라고 했으니까, 수행의 측면에서, 오직 그것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마 수행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리고 석두선우님께서는 헌수님하고 그 따님을 모시고 오세요. 다른 분을 모시고 와도 좋고, 1명이 되었든, 100명이 되었는 숫자는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칙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반야심경 강독은 첫날 온 사람만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한번 빠졌으며는 그 다음에는 오지 말 것. 이상입니다. 이거는 한 번 안들으면, 그 다음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첫날 참석한 사람만 같이 가고,  한 번 빠진 분들은 스스로 나오지 말 것. 길어봐야 뭐 두달 하겠습니까?  하여간 뭐, 오래할 건 없어요. 수요일 날이 괜찮으신가요, 어떤가요? 그럼, 수요일날 하기로 하죠. 예 2월 22일날.

 

그리고 반야심경의 한문부분은 문혜선우가 뽑아 오시고. 내가 칠판에 쓰면서 할라고 그랬는데,  칠판에 쓸라면 시간이 걸리니까 내 그날 그날 할꺼는 써서 줄테니까, 문혜선우가 고고를 인터넷에서 이쁘게 해가지고, 반야심경은 여러 장 뽑아 가지고 오시면 좋고. 원문을 뽑으셔도 되고, 아니면 두 줄씩 하고 밑에 필기하도록 해도 좋고.  아, 그리고 마 요거는 우리 개인적인 부탁이고 선우님들 부탁인데, 문혜선우는 반야심경 하는 동안 절대 빠지지 말 것. 그래서 반야심경을 잘 필기를 하셔가지고, 보리도량에도 올리고, 소책자를 만들어서 한 권씩 볼 수 있도록. 공지사항이었습니다.

 

에, 그러며는 이건 지난 두 번에 이어서 이야기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하라고 그랬죠. 왜 부처님께서 진실하라고 하셨을까요? 진실이 진리이기 때문이예요. 진리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진리인거죠. 우리가 익숙한 단어를 쓴다며는, 진실이 다르마다는 얘기예요. 다르마이기 때문에 진실인 것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진실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청정심淸淨心과 염오심染汚心을 이야기 하죠. 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염오심라고 하는 것은 거짓된 마음이죠. 부처님은 염오심을 제거하고, 청정심을 회복하라 그랬죠. 거짓된 마음을 진실한 마음으로 전환시키라는 이야기죠. 그레서 불교에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라는 말을 씁니다. 파사현정. 한문으로다가는  破파할 파자, 邪삿될 사자, 顯나타날 현, 즉 드러낼 현자, 正바로 정자. 파사현정을 이야기하죠. 파사라고 하는 말은 거짓을 깨트린다는 하는 말이예요. 거짓을 깨트려서 현정, 정을 드러낸다는 거죠. 파사라고 하는 것은 거짓을 깨트린다고 하는 것은 거짓된 마음입니다. 즉 염오심이죠. 현정은 청정심입니다. 진실한 마음이죠. 파사하고 현정하라!    

 

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선이죠. 선이 청정심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천이 조소 도림선사에게 가서 물었죠.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선을 행하는 것이라네." 조소 도림선사는 붓다의 가르침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부처님도 일관되게 선을 강조하죠. 선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즉 진실한 마음이 선이죠.

 

우리가 선이라고 하며는 도대체 선이 무엇이냐고 보통 의문을 제게하죠. 도대체 선의 기준이 뭐냐?  선은 자비입니다. 자비가 선이죠.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자비의 행입니다. 자비의 행은 동시에 지혜의 행이죠. 자비가 지혜입니다. 지혜가 자비죠. 자비로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롭지가 않으며는 자비로울 수가 없어요. 자비롭지 않으면 지혜를 행할 수가 없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아파마나를 늘 강조하시지 않습니까? 아파마나는 가없는 마음, 한량없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 속에 사랑이 가득차 있고, 사랑은 자慈죠. 내 마음 속에 아파하는 마음이 가득 있고, 그것이 자죠. 기뻐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그리고 차별없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 우리가 아파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차별없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할 수 없죠. 자비야말로 선이죠, 자비야말로 지혜입니다.

 

자비의 행, 지혜의 행 하며는, 우리가 어렵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자비의 행과 지혜의 행은 어려울 것이 없죠. 내가 고기 한 점을 덜 먹고, 내가 술 한 잔을 덜 먹는다면, 그것이 자비의 행이고, 그것이 지혜의 행입니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자비의 행이라고 그래서 너무 크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이뤄지는 거예요. 처음 계단을 밟지 않고는 가장 마지막 계단을 밟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처음 계단을 밟지 않고 마지막 계단을 밟는 자는 없어요. 자비의 행과 지혜의 행은 내가 고기 한 점을 덜 먹고, 내가 술 한잔 덜 먹는데서 출발하죠. 그것이 선입니다. 선이야말로 진실한 마음이죠. 진실만이 다르마이죠. 다르마를 애 삶 밖에서 얻으려고 하지 마세요. 내 삶 밖에 다르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의 천태 덕소선사는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는 말을 쓰죠. 마음 밖에 다르마는 없다.  왜 마음 밖에 다르마는 없다고 이야기할까요?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이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죠. 우리 인간이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동물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시작이죠. 마음을 떠나서 우주가 존재하고, 마음을 떠나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나는 전에도 일관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와 대상이라고.  이 땅위에 수십억 인구가 살지만, 오직 '나'라고 하는 한 사람만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우주가 있지만, 오직 하나의 대상일 뿐이죠. 하나의 대상과 하나의 나만이 존재합니다. 근데 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것. 다시 부연해서 설명하면, 우리가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특별한 존재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발견해서, 그 마음을 진화시켰기 때문에 우리를 특별하게 인간이라고 부르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문명이라는 걸 만들어 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행과 불행을 논하기도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 진실하라는 한 말씀을 하신 이유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돼요. 진실하라는 것은 진실한 마음을 이야기해요. 그것을 청정심이라고 부처님은 이야기를 하고 있죠.  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깨끗한 마음아닙니까?  물들지 않은 마음.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길들여진 인간이죠. 인간은 길들여진 인간일 뿐입니다. 애완동물과 가금만이 길들여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 또한 길들여졌을 뿐이예요. 지난번 강론에서 내가 추사선생의 불이선란도를 보고,  그 말 그 불이선란도 앞에서 서있었던 분들의 이야기를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예요. 인간은 길들여진 인간이라는 거죠. 길들여져 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우리는 그 앞에 서죠. 우리가 백지상태에서 선다면, 어떨까요?  

 

화가이자 가수인 조영남 선생이 초등학생에게 끊임없이 물었죠. 어떤 가수를 좋아하느냐고? 그 아이는 끝까지 고집했어요. 어떤 그룹을 좋아한다고. 죽어도 조영남이라는 소릴 하지 않더군요. 우리가 불이선란도 앞에 서서, 불이선란도가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이선란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역시 추사의 대표작이다", "그 작품은 위대한 작품이다" "혹여라도 그 작품 앞에서 무식한 티를 내서 멸시되는 아픔을 겪지 마라." "저게 불이선란도야! 별거 아니네" 이렇게 입밖으로 내는 순간, 100명중 99명은 그것도 눈이라고 달고 다니냐는 소릴 듣겠죠. 그 작품이 위대하고 위대하지 않은가를 논하는 것이 아니예요, 제가.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즉 그것은 길들여져 있는 것이예요.

 

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진실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이 내렸는데, 눈 내린 위에 발자국조차 없는 것과 같죠. 누군가가 눈위에 뭔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바닷가 백사장에서 연인이 나잡아봐라 놀이를 하고 있죠. 그리고 그 백사장 위에 를 그리고, 사랑해라고 하는 글씨를 쓰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백사장을 전체를 채워도 백사장이 좁을 정도로 자기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백사장 위에 수놓을 수 있죠. 그것이 염오심이라면, 백사장에 수놓아진 모양과 수없는 문자가 염오심이라면, 청정심은 바닷물은 그 연인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죠. 바닷물이 백사장을 한번 안아주고 돌아가면, 백사장 위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죠. 그것이 바로 진실한 마음입니다. 진실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죠.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것, 길들여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떤 선입견을 가지죠. 부처님께서도 진실하라는 한 말씀을 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바꿔 나가는 것이,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유이기도 하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제가 조금 전에 고기 한 점, 술 한 잔 덜 먹는 것이 자비고 지혜라고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죠. 고기 한 점 덜 먹고, 술 한잔 덜 먹는 것이 무슨 자비의 행이냐, 그것이 어떻게 지혜의 행이냐고 의문을 가지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의 행, 자비의 행 전부입니다. 왜 그서이 전부이냐면, 내가 고기 한 점을 덜 먹고, 내가 술 한잔을 덜 먹는다는 것은 내 삶이 전환의 단계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뜻하죠. 이미 문을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시작했다는 거를 말하죠.부처님께서 말씀하시죠.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으면, 너의 모든 감각은 움직일 수 없다."  고기 한 점을 안 먹고, 술 한잔을 덜 먹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나는 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계성을 뛰어 넘어서, 가능성을 열고 , 무한성에 이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했었죠. 고기 한 점을 덜 먹고, 술 한잔을 덜 먹는 것은 한계성을 뛰어넘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가능성을 열수 있는 열쇠를 내 손에 들었다는 것을 뜻하죠. 그 열쇠를 든 자만이 가능성의 열고, 무한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돈오돈수설의 세례를 받아서 그런지 뭔가를 한순간에 뒤집고, 뭔가를 한순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돈오돈수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정적인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 어떤 인간도 돈오돈수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는 돈오설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생지설하고 관계가 있다고 보죠. 중국 유교에서 말하는 생지설 말이예요. 생이지라고 하는 말.  성인은 생이지지生而知之다. 성인은 태어났을 때부터 안다. 나는 국림도서관의 책을 전체를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어떤 인간도 태어나면서 시를 읽고, 문장을 짓고, 이랬다는 인간이 있었다고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붓다도 학습했다고 했고, 붓다도 크샤트리아로서 무예를 배웠다고 했지, 붓다가 태어나자 마자 베다를 좔좔좔좔 이야기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칼을 휘둘르고, 적장의 목을 비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어요. 중국의 모든 성인의 기준이라고 하는 공자조차도 주막의 개소리를 들어가면서 권력을 얻고자 군주를 찾아다니면서 비굴하게 살았죠. 그가 더 이상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스승으로 산 것은 그의 생애 후반 노나라로 귀국했던 7년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인간이 생이지지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인간이 돈오돈수할 수 있겠는가요?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아마 내가 꿈 속에서 만나는 인간 밖에는 없을 거예요. 우리 현실에서는 그런 인간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자비의 행이 되었든, 지혜의 행이 되었든, 우리는 마음에서 시작하고 출발한다는 거예요. 거짓된 마음을 진실한 마음으로 바꿔 간다는 데에서 시작하고 출발하는 거예요. 아무리 우리가 진실하라라고 하는 부처님의 마음을 들었다고 해서,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루 아침에 진실할 수는 없는 거예요. 내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진실한 한 마음을 이야기했다고 해서, 염오심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너무 걱정하고 전전긍긍할 필요은 없다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살면서 몸에 때가묻었다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예요. 내 몸에 때가 묻은 것이 부끄러우시거든 좋은 밍크코트를 사서 몸에 걸치시지. 그것이 성에 차지 않으시며는 좋은 향수를 바르시든지. 내가 얘기하고자하는 것은 그것이예요. 설사 내 마음 속에 거짓이 있다 할지라도, 설사 있었다 할지라도, 꽉 차서 넘쳐 흐른다 할지라도 근심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을 내려고 노력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수행이지요. 

 

바닷물이 내가 연인을 위해 공들인 모래사장에 나 너 사랑해! ♡모양을 그림 것을 바닷물이 쓸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지는 않찮습니까? 그것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그것이 지워졌다고 해서 바닷물에 삿대질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진실로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이유는 나는 거기에 있다고 보죠. 바닷물에 삿대질 하는 것.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하고 바닷물에 삿대질하는 거 말이예요. 바닷물에 삿대질을 하지 마셔요. 바닷물에 삿대질 한다고 그래서, 바닷물은 그의 삿대질에 대해서 관계하지 않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나를 비난하든, 세상이 나를 칭찬하든 나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칭찬하는 것도 그의 일이요, 비난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내가 전에 그런 말씀을 드렸죠. 그의 일에 상관하지 마라! 내가 그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부처님의 이 말씀을 내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것은 그의 일을 나의 일로 만들지 말라는 얘기예요. 우리는 그의 일을 나의 일로 만들어서 힘들어 하고, 괴로워 하지 않습니까? 그의 일은 그의 일이고, 나의 일은 나의 일입니다.부처님이 아파하는 마음을 이야기했다고 그래서, 그의 일을 나의 일로 만들라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그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다고 해서, 너도 물에 빠져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부처님의 말씀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문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가장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은 직해주의입니다. 글자를 곧이 곧대로 읽는 거죠. 그리고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직해주의입니다. 직해중의의 함정에 빠지면, 정작 ㅂ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했던 그 뜻을 우리는 읽어내지 못해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하라고 말씀하신 그것도 우리가 깊이 새겨야 돼요. 왜 부처님께서 그 말씀을 했는가? 

 

조소도림 선사가 선을 행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니까 백낙천이가 깔깔거리고 웃었죠. 그거야, 7살 먹은 아이도 아는 거 아입니까?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라면, 뭐 대수로울 것이 있느냐 이 말이예요. 그러자 조소 도림선사는 이렇게 이야기 했죠. "그대의 말이 옳네, 그것은 7살 먹은 아이도 알지! 그러나 이것은 80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너무 어렵다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정담이라고 하는 것은 7살 아이도 압니다. 그러지마는 그 정답을 적는 것은 80먹은 노인도 잘 하지 못하죠.

 

백낙천과 조소도림선사의 문답 속에서 우리는 무한성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한계성을 뛰어넘어서,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것이라는 거죠. 선을 행하는 것, 즉 자비의 행과 지혜의 행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같은 겁니다. 자비하지 않으면, 지혜로울 수가 없어요. 지혜롭지 않으면, 또한 자비할 수도 없죠.                   

 

우리는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을 상기하셔야 돼요. "노력하거라!" 무엇을 노력해야 할까요? 자비를 행하고, 지혜를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예요. 그래야만이 무한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예요. 무한성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비가 나오고, 무한성에 이르렀기 때문에 지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가 있고, 지혜가 있기 때문에 무한성의 문을 지나가는 거죠. 무한성을 지나가는데 있어서 자비와 지혜는 통행료입니다. 통행료를 주지 않고는 그 문을 지나갈 수가 없어요. 자비와 지혜는 진실한 마음, 청정심에서 나오는 거예요.  

 

모든 것은 천태 덕소선사가 이야기 하듯이 마음에서, 마음 밖에서,  구하려고 하면 구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철저히 마음을 빼놓고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에게서 분리시켜 버린다면, 도대체 그 사람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 근대 서양에서는 좀비문화라고 하는 것이 생겼죠. 좀비라고 하는 것은 아이티 부두교에서 발원하는 거죠. 어떤 약을 먹여서, 사람을 뇌사상태로 빠트린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약을 먹이면 불평불만 없이, 오직 주인에 충성하면서 산다는 거예요. 거기에 자의지는 전혀 없다는 거지요. 이것을 좀비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좀비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라고 하는 의식이 없는 인간을 말하죠. 전통적인 한국식으로다가 표현하며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지칭하는지 아시죠? " 그 인간은 산송장이야" 산송장이라는 거죠. 인간은, 인간에게서 마음을 분리해버리면, 그저 산송장일 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일관되게 마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말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저 죽었느냐 살았느냐의 존재가 아닙니다. 설사 먹고, 자고, 뛰어놀고, 모든 것을 다 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분리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거와 같죠. 우리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판단하고, 스스로가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말하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요. 즉 말할 수 없는 거지요. 그 어떤 인간도 죽은 다음에는 산자가 결정하죠. 

 

76년인가요?  8.15 광복절 날 세종문화회관에서 총성이 울렸고, 육영수는 총을 맞아서 죽었죠. 박정희는 79년도 안가에서 술을 먹다가 10월 26일날  김재규의 총을 맞아서 죽었죠. 그런데 죽은 다음, 두 사람의 장례식의 모습은 극명하게 갈렸어요. 육영수가 죽었을 때는 밤을 세서 호곡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넘쳐나서 빗자루로 쓸어버려야 될 정도로 많았죠. 정작 박정희가 죽었던 10월 26일날 그의 영안실에는 장례식이 끝나는 날 까지도 어떤 인간도 밤을 새우는 인간은 없었다는 거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육영수가 죽었을 때는 밤을 새는 인간이 너무 많아서 빗자루로 쓸어다가 청소차로 버려야할 정도로 많았는데, 왜 정작 박정희가 죽었을 때는 어떤 인간도 밤을 새우는 인간이 없었을까? 죽은 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예요. 육영수 빈소에서 밤을 새우며는 주는 자가 있지마는, 박정희 빈소에서 밤을 새우면 주는 자가 있는 것은 고사하고 박정희를 총으로다 사살했던 그 자가 권력을 잡는 순간,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아무도 그것이 두려워서 밤을 새지 못한 거예요.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내 몸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분리되는 순간, 내 빈소에는 호곡하는 인간조차 없다는 거죠. 아니, 도리어 무서워 하죠.

 

부처님 당시에 천하일색이었던 사람이 있었죠. 아, 그녀의 이름이 갑자기 또 생각이 안나네. 너무나 예뻐서, 너무나 예뻐서 기생을 만들었다 그러죠.  젊은 청년들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 칼부림들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녀를 기생으로 만들었던, 그녀를 보기 위해서, 인도 각지에서 황금을 싸들고 찾아왔죠. 처음 출가한 스님이 그녀가 그렇게 이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 집으로 탁발을 갔어요. 근데 그 때 그녀는 많이 아팠죠. 그녀가 아픈 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스님은 안 갔는데, 그 스님은 굳이 갔어요. 왜? 그녀를 보기 위해서요. 그 스님은 출가하지 않았으면, 그녀를 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죠. 그녀를 볼려면 돈이 있어야되고, 그녀를 볼려면 권력이 있었어야 되는데, 이 스님은 아마 그녀를 볼수 있는 그런 조건을 아마 갖추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출가하자마자 그 스님은 그녀를 보러 갔어. 어쩌면 그 스님은 그녀를 보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었는지도 모르죠. 뭐, 나라도 그녀를 보기 위해서 머리 깎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고요? 인도에서는 출가와 환속은 일상의 일입니다. 현재 동남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일과 같죠.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그 생각이 들었어요. 이 스님의 목적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출가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그녀가 아파서 누워 있다는데, 굳이 가서 그 집 대문에서 버텼을리가 있나?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가 말했죠. 어떤 비구스님이 탁발왔는데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픈 몸을 일으켜서 자기가 직접 나가서 그 스님 발우에 음식을 담았죠. 그래서 그님이 돌아갔어요. 문제는 그 스님이 그날 저녁부터 병이 났다는 거예요. 아파서 화장도 안하고, 씻지도 않고, 그 초췌한 모습조차 저렇게 아름다운데, 그녀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상념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상사병이 걸린 거요. 이 비구는 수행은 고사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죠.

 

어쩌면 후기 대승불교에 나오는 유마거사가 아마 이 스님의 모델이 아닌가? 마, 나는 그렇게 생각하죠. 유마 거사가 뭐라고 합니까? 유마거사가 병들어 있으니까, 문수보살이 문병을 가죠. 그래서 청한(淸閑안한가를 묻죠. 청한(淸閑한가는 괜찮은 건가죠. 그러자 유마는 이렇게 대답하죠. 내가 아픈 것은 세상사람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내가 병들었다는 거예요. 내 병은 세상 사람들이 그 병에서 일어날 때, 그 병이 난다는 거예요. 아마 이 비구가 병든 것은 그녀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쌍둥이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플 때 같이 아프다던가요? 그녀가 아프니까 이 스님도 아팠죠.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혹시 아내가 아픈데, 아프지 않은 남편이 있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으면 100% 맞습니다. 우리 남자 선우들께서는 아내가 아파서 누우면, 같이 앓으셔야 돼! 그녀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아! 그녀 이른이 생각났습니다. 시리마. 마, 나는 그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야,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 보니까. 시리마예요. 그녀는 죽었습니다. 빠사나디왕이 부처님께 와서 말했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기인 시리마가 오늘 죽었습니다. 왕이 그녀의 죽음을 부처님에게 알리 정도로 그녀는 국가의 중요한 인물이기도 했어요. 왜냐면 그녀가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땨문에 그랬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그녀의 장례를 지금 치루지 말라!  가서 그녀의 집안에 이렇게 붙여라. 그녀와 하룻밤을 함께하는데, 몇 냥. 그런데 그녀가 숨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요. 첨에는 만 냥에서, 나중에는 한 냥까지 내려갔죠.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요. 빠사나디왕이 찾아와서 말하죠. 그녀의 죽음이 알려진 순간, 한 냥을 걸어도 그녀를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 그녀가 죽은지도 모르고 있는 병든 비구를 부르죠. 그 비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리마 집에 가서 그녀를 만나게 하죠. 그 비구는 그녀가 죽은지도 몰랐어요. 그 비구는 그녀의 방에서 그녀를 만났죠. 그 뜨거운 인도에서, 요새처럼 냉동시설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방에 그대로 있었으니, 그녀의 시신이 얼마나 많이 변했겠어요.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갔던 그 비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경악했고, 그 다음에는 눈물을 흘렸죠. 그리고 그는 돌아와서 무상과 무아를 깨쳤죠.

 

내가 왜 시리마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 육신에서 마음이 분리되면 우리는 시리마와 같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진실한 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진실한 한 마음만 나와 함께한다고 부처님께서 이야기 하셨어요. 진실한 한 마음만이 오직 나와 함께 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시리마를 연모하다 못해서 밥도 먹지 못하고 몸져 누웠던 그 비구도 시리마의 죽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잖아요. 그가 무상과 무아를 체득했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논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은 바로 이거예요. 그녀 때문에 상사병에 걸렸던 그 비구조차도 그녀으 그 모습을 보고는 안아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녀의 몸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 말이예요. 그 비구가 사랑했던 것은 그녀의 육신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육신과 함께 작용하고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얼굴은 예쁜데 마음은 삭월같은 사람이 있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특히 진실한 마음. 진실한 마음이 없이는 무한성의 문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진실한 마음은 자비와 지혜를 만들죠. 

 

오늘은 부처님께서 하신 한 말씀만 기억하는 날입니다. 다른 것은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부처님의 말씀이 수없이 많지만, 그 수없는 말중에 오직 한 마디의 말만 골라 낸다면, 아니 그 한 마디의 말에 모든 말은 포함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한 마디의 말은 '진실한 마음'이예요. 진실.

 

서두에, 진실이 다르마라고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르마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생각을 전환시키는 것이죠. 전에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생각을 절대 벗어나지 몬한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생각은 스스로의 마음이죠.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안에 있을 뿐이죠. 밥을 먹을 때도 그 안에 있고, 연애를 할 때도 그 안에 있고, 내가 잠을 잘 때도 그 안에 있고, 우리는 오직 스스로 마음 안에서 있을 뿐, 스스로의 마음 밖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그것을 깨트릴 수 있다면, 그것이 무한성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어느 분이 아, 오늘 기도를 이끌어 주실라는가요. 마, 기도를 이끌어주시는 우리 담당께서 안오시니까...에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오늘도 저희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모야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진실하라는 한 말씀을 했을 뿐입니다. 저희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자비의 행과 지혜의 행으로 진실한 마음을  맑히고, 또 맑히겠습니다. 부처님 진실한 말씀 속에 무한성의 문을 열고,부처님의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노력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지켜보시고, 저희들을 이끄시고, 저희들을 가호하시고, 저희들을 격려하소서. 그리하여 부처님의 격려와 가호 속에 저희들이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얻게 하소서. 그리고 저와 함께 하는 저희 가족과 저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도 이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이 이르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싸아두 싸두 싸두.   





 

  
신중현과 뮤직파워 - 아름다운 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