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 선사가 길에서 만난 할머니들 / 릴라님
임제종의 창시자인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선사는 당나라 말 사람으로 속성은 형(邢) 씨입니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고향도 같은 하남성 조주 남화(南華) 출신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선사의 선풍은 몹시 달랐습니다. 조주종심 선사는 온화한 남방인의 기질에 가까운 반면 임제 선사는 북방인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조주 선사의 선풍이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재치가 있고 언어적이라고 한다면, 임제 선사의 선풍은 남성적이고 거칠며 우직하고 행동적입니다.
임제 선사는 출가하여 처음에는 율이나 화엄에 몰두했지만 이런 공부가 불교의 진실을 얻는 도가 아님을 깨닫고 운수행각에 나섭니다. 황벽희운 선사를 찾아뵙고 공부하였으며, 뒤에 대우고안 선사를 만나 본성에 눈을 뜹니다. 뒤이어 위산영우를 뵈었고, 다시 황벽희운에게 돌아와 백장회해 선사의 선판과 궤안을 전해 받습니다.
임제의현은 스승의 법을 이은 후 선림의 여러 선사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대자환중, 마곡보철, 평전보안, 금우반통, 상전, 명화, 봉림(鳳林) 등 수많은 선승들을 참례하여 공부를 다졌습니다. 이런 행각의 과정 중에 깨달음에 눈을 뜬 여성 도인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알려진 사람만 해도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와 낙양에서 탁발하던 중에 만난 폐문파(閉門婆), 봉림(鳳林) 선사를 찾아뵈려던 길에 만난 봉림파(鳳林婆)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폐문파와 봉림파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합니다.
문을 닫은 할머니(閉門婆)
임제 선사가 서울(낙양)에 도착하여 교화하고 있었다. 한 집의 문 앞에 이르러서 말했다. “발우에 담을 것 좀 주십시오.” 한 노파가 말했다. “아무리 많아도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 임제가 말했다. “음식도 오히려 받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아무리 많아도 만족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까?” 노파가 곧 문을 닫고 문안으로 돌아갔다.
-우바이지
임제 의현 선사는 당시 서울인 낙양에서 교화하며 탁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 앞에 이르러 공양을 부탁했는데, 문을 열고 나온 할머니 말이 놀랍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만족할 줄 모른다.’ 그렇습니다. 부족함이 없이 늘 쓰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충분하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공양을 부탁하는 것이 이것이고, 만족할 줄 모른다는 말 자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머니의 말에 임제 선사는 음식을 받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하여 많아도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자마자 노파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임제의현에게 다른 빌미를 주지 않았습니다. 임제 선사는 허허 웃었을 것입니다.
이 일화를 두고 감산 덕청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감산이 평하여 말했다. 떠돌아다니는 식충이가 띠를 엮어 허리에 찼구나. 당초 결과는 어린아이 꼴이다. 마치 어떤 대인이 교묘한 솜씨를 발휘함에 겨우 노파를 보아 이렇게 말했는데, 곧 뛰니 밥상이 뒤집어져서 발우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반쪽짜리 눈을 갖춘 것과 같다. 가엾은 사람아, 도리어 노파를 향해 문밖에 서있구나. 한바탕 낯 뜨거운 굴욕을 받았으니, 어찌 하얘지기를 기대하겠는가. 기백이 없을 때 기백이 늘어나고, 풍류 다운 멋이 아니라야 풍류이다. 또한 괴이한 노파의 혀끝이 좋다고 잘못 알지도 마라.
-우바이지
탁발하는 임제의현 선사에 대한 평이 가혹합니다. 밥이나 축내는 사람처럼 돌아다니더니 끝내 어린아이 꼴을 못 면했다는 것입니다. 노파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어야 하는데, 생각을 따라 ‘밥도 받지 않았는데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말을 노파가 봐줄 리 없습니다. 곧바로 눈앞에서 문을 닫고 가버립니다. 임제가 학인들에게 거침없이 행했던 할(喝)을 노파에게서 보는 것 같습니다. 임제 선사가 어린아이(小廝兒)와 같다고 했는데, 이 말은 임제어록에 이미 나온 말입니다.
하루는 임제가 하양 장로, 목탑 장로와 함께 승당 화롯가에 앉아있을 때 말했다. “보화가 매일 거리에서 미치광이 짓을 하니, 그가 범부인지 성인인지 아십니까?”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화가 들어왔는데 그때 임제가 바로 물었다. “그대는 범부이냐 성인이냐?” 보화가 말했다. “그대가 먼저 말해보라. 내가 범부냐 성인이냐?” 임제가 곧 악! 하고 고함을 치니 보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양은 새색시 선이요, 목탑은 노파선인데, 임제 어린애(小廝兒)가 도리어 한 개의 눈(一隻眼)을 갖추었구나.”
-임제어록
감산덕청은 이 일화를 빗대서 폐문파(閉門婆) 앞에 선 임제를 어린아이에 반쪽짜리 눈 (半隻眼)을 갖춘 것과 같다고 평합니다. 임제종의 창시자가 노파 앞에서 당했으니 낯이 뜨거워서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면서 참된 기백(意氣)은 기백이라고 할 게 없을 때 늘어나고 참된 풍류는 풍류라고 할 게 없을 때 참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파의 안목이 더 낫다고 분별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 환상과 같은 것입니다. 기백이라고 할 것도 없고 풍류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분별된 모습이 기백이고 풍류이지만 실제 그런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볼 줄 알아야 참된 기백이고 풍류입니다. 온갖 분별이 다 있으나 실제로 그런 저런 모양이 따로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참 모습입니다. 임제가 노파 앞에서 황망한 일을 겪었지만, 모두가 지금 이 마음에서 일어난 환상입니다. 실제로 임제도 따로 없고 노파도 따로 없으며, 황망한 일을 겪은 일도 없고, 노파의 솜씨가 뛰어난 일도 없습니다.
봉림의 할머니(鳳林婆)
임제 선사가 봉림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임제가 말했다. “봉림으로 갑니다.” 할머니가 말했다. “마침 봉림 스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임제 선사가 말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할머니가 그냥 가자 임제가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 머리를 돌리자, 임제 선사가 곧 한 대 때리고는 말했다. “누가 없다고 말하는가?”
-우바이지
<임제어록>에는 이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 임제가 할머니를 부르자,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임제가 곧장 가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바이지>에는 임제가 한 대 때리며 “누가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결말은 앞의 폐문파(閉門婆)와 사뭇 다른 모습을 연출합니다. 마치 임제 선사가 폐문파에게 뺨 맞고 봉림파에게 화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임제 선사가 봉림 선사를 찾아뵙는 길이었습니다. 봉림 선사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임제 선사가 뒤에 참례하여 문답을 나눈 내용이 <임제어록>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름 있는 선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는 봉림(鳳林) 선사가 출타 중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임제가 어디로 가셨는지 묻자 노파는 그냥 가버립니다. 이를 놓칠세라 임제 선사가 노파를 불러 세웁니다. 가던 길 그냥 가도 되는데, 부르는 소리에 노파가 뒤돌아 봅니다. 임제 선사가 한 대 때리고는 ‘누가 없다고 말하는가?’ 하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봉림은 봉림 선사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뒤에는 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봉황은 신령스러운 새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마음은 정해진 모양이 없지만 온갖 모양을 드러냅니다. 신령스럽고 불가사의합니다. 이것은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 때 늘 한결같은 본성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여기에서 보며 여기에서 행동하고 여기에서 생각합니다. 봉림 스님이 계시지 않다는 말에 임제는 노파를 불러 세워 한 대 때리고는 누가 없다고 말하는가 묻습니다. 바로 봉림, 우리 자신의 본래 마음이 말하고 있습니다.
산닭과 숲의 봉황은 차이가 없으니, 천리에 같은 바람이 한 가족을 이루었네. 좁은 길에서 만나도 서로 알지 못하니, 영조가 단하를 속인 일을 가히 짐작할 수 있구나.
-감산덕청, 우바이지
봉림의 노파나 임제 선사는 모두 마음 바탕을 밝힌 사람으로 스스로가 법인 사람입니다. 모습은 노파이고 승려이나 모습 아닌 것으로 하나입니다. 한바탕 열띤 문답이 있었으나 본래는 나눈 일이 없습니다. 하나의 마음이고 하나의 법일 뿐입니다. 좁고 가파른 길에서 서로 만났으나 서로를 알아본 일 없이 마음 하나만 보았을 뿐입니다.
단하천연 선사가 방 거사의 집을 찾아와 방 거사의 딸 영조와 문답한 일이 있습니다. 단하 선사가 영조에게 방 거사가 집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나물을 씻던 영조는 나물 바구니를 내려놓은 채 손을 모으고는 가만히 섰습니다. 단하 선사가 똑같은 질문을 하자, 영조는 나물 바구니를 들고나가버렸습니다. 그러자 단하 선사도 바로 돌아갔습니다.
방 거사가 있느냐고 물으니 나물을 씻던 영조가 손을 모은 채 가만히 섰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이자 ‘방거사의 진면목’입니다. 또한 영조의 진면목이기도 하고 나물의 진면목이기도 하고 단하의 진면목이기도 하며 세상 만물의 진면목입니다. 앉아도 이 일이고 손을 모으고 가만히 서도 이 일입니다. 단하가 영조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물 바구니를 들고나가버립니다. 단하도 일이 없었다는 듯 돌아갑니다. 둘은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방거사의 안부를 묻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시종일관 만난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으며 안부를 묻고 대답한 일이 없습니다. 모습으로는 모든 일이 일어났으나, 그 모든 모습이 바로 마음 하나를 벗어난 일이 아니므로 아무런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영조가 단하를 속인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온갖 말을 하고 행위를 다했으나, 이것은 겉모습이 그러할 뿐 본래 말을 나눈 적도 없고 어떠한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든 이 마음 밖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조가 단하를 속인 일이고, 이 세계의 속임수입니다.
행복과 불행, 옳고 그름, 고요하고 시끄러움이 펼쳐지나 본래 그런 일이 없는 것이 삶의 속임수이며, 우주의 유희이며, 인생의 커다란 농담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알리기 위해 문을 닫아 버리고, 고함을 치며, 한 대 때리기도 하고 나물 바구니를 들고나가버립니다. 모습에 떨어지면 삶의 커다란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온갖 모습이 펼쳐지더라도 그 모습에 매이지 않으면, 모든 모습이 하나이고, 하나라는 물건도 따로 없어서 온갖 모습이 비었습니다. 스스로 명백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말을 하고 듣든,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막히는 게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