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몰며 밭을 간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

2019. 4. 7. 10: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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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몰며 밭을 간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



육조혜능 선사가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문득 깨닫게 하는 조사선을 주창한 이래

중국선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합니다. 육조혜능 선사의 2세손인 마조도일에 이르러

수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9세기에 이르러 조사선이 꽃을 피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주름잡던 선사가 임제의현(臨濟義玄, ~867))과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

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따 ‘임제할(臨濟喝), 덕산방(德山棒)’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그만큼 조사선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덕산선감과 임제의현 선사는 여성도인들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덕산선감은 떡을 파는 노파와 선문답을 계기로 알음알이를 떨쳐버리고 자성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공부의 일대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임제의현 선사는 고안대우와 황벽희운

선사 사이를 오가며 깨달음을 얻은 후 행각을 떠나게 되는데 이 와중에 여성도인과 만나

공부를 다지는 인연을 갖게 됩니다.

임제의현 선사가 평전보안(平田普岸) 선사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평전보안 선사는 홍주 사람으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백장회해 선사에게서

깨달음을 얻은 뒤 천태산의 빼어난 경치에서 성현이 가끔 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가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띠집을 짓고 숲 밑에 조용히 살면서

공부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소식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나중에 큰 절을 짓고

평전선원이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말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아서 만고에 빛나니, 이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

사찰의 일주문 주련으로 많이 쓰이는 구절입니다. 본래마음의 빛이 언제나 어둡지 않아서

어디서나 항상 빛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깨달았다면 어떠한 알음알이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금의 알음알이가 있어도 이 빛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평전선사가 평전선원을 열고 학인들을 지도할 때 형수도 함께 생활하며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임제의현 선사가 평전보안 선사를 찾아가는 길에 밭에서 소를

모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평전수(平田嫂)는 평전안(平田岸) 선사의 형수이다. 임제가 안 선사를 방문하는 길에

형수가 밭에서 소를 모는 것을 보았다. 임제가 물었다.
“평전으로 가는 길이 어디입니까?”
형수가 소를 한번 때리고는 말했다.
“이 짐승이 이르는 곳으로 가십시오. 길이라면 알지 못합니다.”
임제가 또 물었다.
“평전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형수가 말했다.
“이 짐승은 다섯 살인데도, 오히려 쓸 수 없습니다.”
임제가 마음으로 말했다.
‘이상하군. 이 사람. 쉽게 못과 쐐기를 뽑게 하려는 뜻이 있군.’
안 선사를 만나게 되었다.
안 선사가 물었다.
“조금 전에 나의 형수를 보지 못했는가?”
임제가 말했다.
“이미 받아 마쳤습니다.”

-선여인전, 우바이지, 오등회원, 지월록

평전(平田)는 보안 선사가 거처한 지역이기도 하지만, ‘평평하여 좋은 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대화에서 평전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임제는 평전 보안 선사가 있는 곳을 물었을 것입니다. 이에 보안선사의 형수는

선문답으로 응대합니다. 임제의현 선사가 평전을 찾은 뜻은 본래 마음밭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니, 형수는 소를 한 차례 때리면서 곧바로 이 평등한 마음밭을 가리켜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눈앞의 소를 따라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소를 타고 있습니다. 본래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뗄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나도 이 마음으로 인해 드러나고, 나의 모든 행위나 생각, 경험과 눈앞의

모든 것이 이 마음으로 인해 드러난 모습들입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이 소를 타고 있습니다.

우습도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可笑騎牛子, 騎牛更覓牛.

소요태능(​逍遙太能)의 시처럼 우리 모두는 이 마음 가운데서 온갖 행을 하면서 다시 이

마음을 찾으려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문득 모든 모습의 본 바탕을 깨달으면 그동안의

어리석음에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가 분명해지는

것이지 지식이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형수는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분명하지만 본래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임제가 평전으로 가는 길을 묻자, 평전의 형수는 이 소는 다섯 살이 되었는데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마음은 이렇게 분명합니다. 한 살일 때나 두 살일 때나 다섯 살일

때나 백 살일 때나 늘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손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모습이 이것이지만, 이것을 따로 떼어내어 내가 통제하거나 손댈 수 없습니다.

손을 쓰려는 마음이 이것이고, 손을 쓰는 것이 이것이며, 손쓰는 대상이 모두 이것이지

분리된 어느 것이 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제는 이 말을 금방 알아듣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이 있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분별의

못과 분별의 쐐기풀들을 모두 뽑아버리게 하려는 뜻이 있음을 안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마음밖에 도라는 것이 여전히 따로 있고, 깨달음의 궁극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뽑아내게 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분별하여 따로 무언가 있다는 생각은 깊고 깊이 박힌 못, 뿌리를 뽑아내어 완전히

고사시키기 어려운 쐐기풀과 같습니다. 특히 궁극적인 깨달음에 대한 추구, 완전한 상태에

대한 갈망은 오래 남습니다.

이러한 추구와 갈망이 남아있는 한 그것을 바라는 자아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추구할 대상도 망상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나도 본래 허망한 존재감이라는 실상을 깨달아야

분별에서 훌쩍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임제가 평전을 만나자 평전 선사가 조금 전에 형수를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임제는

이미 다 알아봤다고 말합니다. 평전의 형수, 평전, 소는 모두 본래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본래마음입니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손닿는 곳마다 이것이고, 서있는

곳마다 이것’입니다(隨處作主, 立處皆眞) 

그러니 평전 선사는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물을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임제의현 선사가 이에 화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분별된

모습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매사에 밝아야

할 것입니다. 꺼릴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꺼릴 것 없음에 머물러서도 안되는 미묘한 길입니다.

뒤에 감산덕청 선사가 임제의현과 평전수의 문답을 들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산이 평하여 말했다.
이 짐승은 쉽지 않으니 본래 사나운 뿔에 무딘 발톱이네. 오늘 배고프면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잠을 자니 설령 깨쳤다 하더라도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다.

눈이 닳도록 등 가득 비추어 어리석음을 매질하고 어리석음을 매질하여도,

한 해 한 해 이 짐승을 쓰기가 어렵다.

노래하여 말하였다.
아침엔 평전을 갈고
저물면 평전을 타고 돌아오네.
바람이 불면 고기잡이 노래로 화답하고
달빛 받으면 덕석(牛衣)에 눕네.

-우바이지

이 짐승이란 바로 본래면목, 소를 말합니다. 오랜 세월 분별심에 사로잡혀온 마음은

쉽게 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런 분별도 없는 마음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오랜 세월 분별에 길들여진 마음은 시시때때로 사납게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분별의 물결을 진실하다고 여겨 그것에 안주하려는 마음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짐승과 같습니다. 마치 성난 황소와 같은 마음을 법답게 길들이는 일이 소를 모는 일

(牧牛)입니다. 평전의 형수가 밭에서 소를 모는 것이 바로 분별하는 마음을 분별없는

마음으로 길들이는 일입니다.

늘 이 마음자리에서 거친 쐐기풀처럼 일어나는 분별망상을 밝게 보아 그것을 진실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소를 길들이는 것이고, 이것이 마음밭을 개간하는 공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위해 달리 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평상시대로 삶을 살지만,

순간순간 분별망상에서 깨어있으려는 경종을 스스로 울리는 것입니다.

소가 엉뚱한 길로 들어가려할 때 소의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문득 본래마음을 체험하는 일은 소의 코에 코뚜레를 꿰어 고삐를 잡는 일이고, 코뚜레를

꿰었으면 이전의 잘못된 착각에 길들여진 습관을 벗어나 실상에 부합하는 습관으로

길들여져야 합니다. 이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늘 스스로 밝게 보아 분별망상에 밝으려 해도 결코 쉽게 되지 않는 일임을 감산 선사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을 체험하고 난 뒤의 공부가 엄중하고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마음밭(平田)을 깨달아야 소 키우는 일이 가능합니다. 세상 만물, 과거현재미래,

모든 공간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이 텅 빈 하나임을 깨달으면 분별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환상과 같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 사실에 익숙해지는 공부가 이어져야 망상을 진실하다고 여기던 습관이 교정됩니다.

사람이 소를 타고 있든 세상 만물 모든 것들은 늘 이 한결같은 마음을 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세상만물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의심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인연 따라 조화롭게 응할 일만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달빛, 즉 마음과 하나가 되어 소의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됩니다.

평전의 형수와 임제의현의 인연은 체험 뒤의 공부가 중요하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농부가 매일 밭에 나가 성실하게 밭을 갈면, 그 밭은 풍성한 곡식들을

부족함 없이 키워내는 옥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밭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버려두면

황무지가 되어 쓸모가 없어집니다. 바로 지금 이 마음뿐임을 깨달아 마음밭을 바로

확인했다면,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분별의 잡풀과 돌멩이들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옥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성실히 임하다보면 어느 순간

만물을 장애 없이 비추어내는 옥토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평전의 형수가 언제나 그렇듯이 밭에 나가 소를 몰며 마음밭을 개간하는 모습은

공부인들에게 감명을 주고 깨달음의 체험 이후의 공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김동률 B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