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마음으로 느끼라|…… 혜천스님설교

2019. 4. 14. 11: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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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불기2556219






경전, 마음으로 느끼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경전, 마음으로 느끼라!" 입니다. 우리는 경전을 보통 읽지요. 경전을 읽은다 그러는데, 또 독송하고. 경전은 읽고, 독송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겁니다. 마음으로 느껴야만이 부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담아지고, 그래야만 내 삶이 변하죠.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마음으로 느껴야 되냐면, 우리 장면 하나를 보자구요.

 

어느 날 이교도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 해요. "내 손에 새가 있습니다. 이 새를 내가 살릴까요? 죽일까요?" 실질적으로 그의 손에는 새가 파닥거리고 있었죠. 이 때 우리가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요? 아마 살린다고 하면 그는 죽일 것이고, 죽인다고 하면 그는 놔주겠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문지방을 딱 걸쳐서서 말하죠. "내가 나가겠냐? 들어가겠냐?"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느껴야 되는가요?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어떤 느낌을 받냐 하면요, 무섭다는 느낌이요. 정말 무섭구나! 왜 무섭다고 하는 마음의 느낌이 드느냐며는 부처님이 그의 창으로 그를 찌르고 있걸랑요. 그가 말하잖아요. 내 손에 있는 이 새를 내가 죽이겠습니까? 살리겠습니까? 부처님이 그의 논리로 똑같이 말하죠. 내가 나가겠냐? 들어가겠냐? 바로 이것은 그 사람의 창으로 그를 찌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거를 읽을 때마다, 굉장히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무섭구나! 이 보다 더 무서울 수 있을까? 적의 창으로 적을 찔러 버리다니.

 

우리는 언제나 나의 창으로 그를 찌르려고 하죠. 우리는 내 창으로 그 사람을 찌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찌르지 못해요. 그 사람을 찌르르면 반드시 그 사람의 창으로 찔러야 해요. 그래야만이 그를 제거할 수가 있죠. 우리가 이 장면에서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무서움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왜 마음으로 느껴야 되느냐며는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면 직해주의에 빠지게 되거든요.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마음으로 느껴야먄 이해가 되걸랑요,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단순하게 느끼죠. 무엇을 단순하게 느끼냐면, 부처님이 참 지혜로우시구나! 우리가 통상적인 이해 방식이예요. 만약에 시험을 요런 식으로 보시며는, 모법 답안, 딱 100점입니다. 거기서 그치죠. 100점에서 뿌라스 알파가 될려면, 그 마음으로 느끼면 돼요. 굉장히 무섭구나! 그의 창으로 그를 찔러 죽이다니!   

 

다른 장면을 하나 보죠. 부처님이 성도한 직후에 마가다에서 가장 유력했던 종교 지도자였던 우르빌라 가섭을 찾아가죠. 그리고 그를 굴복시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와 그의 형제들 제자 1,000명을 이끌고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하는 산 위에 올라가요. 이것을 경전에서는 산상 설법이라고 그래요. 상두산에서 무엇을 설하시냐면,  이런 주제로 말씀을 하셔요. " 비구들아,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대상을 향해서, 네 눈이 붙타고, 네 귀가 불타고, 네 마음이 불타고 있다."라고 설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느껴야 되냐면, 우르빌라 가섭과 이 제자들은 본래 불을 신성시하고, 불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불을 모셨던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불이라고 하는 주제루다가 설법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이 사람들에게 불이라고 하는 단어보다 더 강렬한 단어는 없어요. 왜 그러냐며는 그들은 불을 섬기던 사람들이걸랑요. 그런데 부처님이 불이라고 하는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대상을 향해서 네 마음이 불타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이 설법에서 무엇을 느끼냐며는 아름다움을 느끼죠. 이 보다 더 아름다울 순 없어요. 아까는 그의 창으로 그를 찔렀죠. 지금은 그들이 가장 신성시했던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그의 창으로 그를 찌르고 있는 거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오며는,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을 부정하고, 비판하고, 씻어 버리려고 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세척시키거든요. 그래서 세탁기에 넣고 돌리걸랑요. 세탁기에 돌리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요? 남루해지죠. 굉장히 지치게 되어 있어요.

 

근데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가장 신성시여겼던 불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가르침을 주고 있거든요. 1,000명의 비구가 그 날 다 눈을 떴다는 거예요. 왜? 불이라고 하는 주제였기 때문에. 아마 그들의 마음 속에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주 강렬한 느낌이 왔을 거예요. 마치 머리 위에서 핵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그 강렬함 말이예요. 경전을 마음으로 느껴야 되는 이유는 그거예요. 이거는 그 그림을 그리면서 느껴야 되요. 1,000명의 비구가 불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불을 주제루다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마음으로 느껴야만이 이해가 되고, 이해가 돼야 삶이 새로와 지죠. 근데 우리는 문자로 읽걸랑요. 마음으로 느낀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거,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거죠. 내가 1,000명의 비구가 되어서 붓다의 말씀을 듣는 거예요. 1,000명의 비구를 향해서 불을 주제루다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마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거예요. 오죽하면 경전에서는 천명의 비구가 미망에서 깨어나서 눈을 떴다고 했겠어요. 불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불이라고 하는 것은 밝은 거죠. 태양도 불이잖아요.

 

우리가 살아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우리가 살아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내 몸 속에 불이 있다는 거죠. 즉 체온이죠. 우리 몸 속에 체온이 없으면, 정확히 얘기해서 우리 몸이라고 하는 단백질의 분자가 분해되며는, 우리는 썪은 나무토막보다도 소용이 없죠.  썪은 나무토막은 사랑받습니다. 왜냐하며는 썪은 나무토막은 줏어다가 불이라도 때고, 썪은 나무토막이 썪어서 거름이 돼서, 숲을 풍성하게 만들죠. 그래서 썪은 나무가 숲을 아름답게 한다고 하죠. 근데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요. 인간은 죽는 순간 기피의 대상이예요. 빨리 갖다 버려야 되거든요. 빨리 갖다 묻든지. 빨리 갖다 태우든지. 산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것은 우리 몸속의 체온이예요.

 

그 참 이상해요. 숨이 딲 끊어지며는 체온이 완전히 식어버리거든요. 그 때 느낌이 어떤 줄 아셔요? 솔직히 섬뜩해요. 뭐 그렇게 기분 쌉쌀하게 좋은 거 아니예요. 특히 그가 숨을 거둔지 모르고 만졌을 때, 그 느낌. 그거 알고 싶으세요? 그저 나중에 그런 기회가 되며는 스스로 알 수 있을 겝니다. 결국은 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사를 가르는 가장 기준점이예요. 뭐 뇌사냐, 심장사냐 그런 건 다 필요 없어요. 체온이 있느냐 없느냐예요. 식물인간 상태에서도 체온이 유지되면요, 우리는 그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아요. 근데 그가 체온이 싹 식어버리면요, 굉장히 두려워져요. 제가 아까 표현이 좀 과했는데, 빨리 갖다 버리고 싶어해요. 

 

부처님이 왜 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들에게 설법을 했는가를 우리가 마음으로 느껴야 돼요. 마음으로 느끼면, 느끼는 순간 책에 박혀있는 문자가 살아서 나오게 되죠. 안 그러면 그건 죽은 문자일 뿐입니다. 마음으로 느낄 때, 그것은 살아있는 가르침이 되죠. 우리가 다른 장면을 하나 또 보죠. 

 

바카리라고 하는 비구가 옹기장이 집에서 투병을 하고 있죠. 바카리는 자기가 병석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그래서 그는 자기를 간호하고 있는 스님에게 말했죠. "나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데, 나는 머지 않아 죽을 것이다. 근데 내가 마지막의 하나의 소원이 있다. 죽기 전에 그 분을 한 번 뵙고 싶다. 근데 내가 붓다를 뵈오러 갈 수가 없구나. 내가 죽는 것은 한스럽지 않지만, 그 분을 뵙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 간호하고 있던 비구는 바카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먼 길을 가서 붓다에게 그 말을 하죠. "붓다시여, 바카리가 임종의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근데 그는 붓다를 간절히 뵙고 싶어 합니다. 근데 그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바카리를 만나기 위해서 그 곳에 가죠. 바카리가 문안으로 들어오는 부처님을 보고 일어나려고 하죠. 마음은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미 몸은 쇠할대로 쇠해져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카리가 말하죠.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예배하고 싶은데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바카리야, 누워 있거라! 장차 죽어서 썩을 이 몸을 보아서 예배한다고 해서 무엇이 특별할 것이 있겠느냐? 누워 있거라!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가 진리를 볼 것이니라. 바카리야, 그냥 편히 누워 있거라."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끼는 가요? 나는 거창한 명제를 던지고 싶지 않습니다. 자비니, 사랑이니, 그런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진 않아요. 내가 여기서 느끼는 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봄날의 햇쌀같은 그 따뜻한 마음요. 아파 누워 있는 아기를 어루만져주는 그 엄마의 마음 말입니다. 난 여기서 엄마의 마음을 느끼죠. 바카리는 숨을 거두면서 행복했을 거예요. 붓다가 나와 함께 한다고 그는 생각했을 거예요. 부처님께서 그에게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가 진리를 본다고 할때, 그는 이미 그의 마음 속에 붓다가 있었고, 그의 마음이 이미 붓다의 가르침 속에 있었을 거예요. 그는 아마 아주 어렸을 때, 그의 이마를 어루만져주던 엄마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는지도 모르죠. 우리가 이 바카리의 이야기 속에서, 단순히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가 진리를 본다고 하는 그 글만 떼어 가지고 나오며는 이 가르침은 온기가 없어져요. 아주 건조해지죠. 마음을 담을 수가 없게 돼요.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모든 것의 출발점은 마음이라고. 모든 것은 마음이 출발점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인간이 아니예요. 그저 동물일 뿐이죠. 그저 우리는 원숭이일 뿐이예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인간의 출발점이예요. 마음을 담는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사람을 담는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예요. 

 

우리는 항상 경전을 읽고 공부한다고 이야기 하죠. 읽고 공부하니까 직해주의에 빠지게 되죠. 아주 건조해 져요. 나는 마음을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 이런 분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요, 마음은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마음공부, 마음공부 하는 분들이 많아요. 단언적으로 이야기 하건데, 이 사람은 수행하지 않는 사람을 말해요.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 마음을 공부한다고 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어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지만, 어떠한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형체가 있어야 분석하죠.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분석한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마음을 담아야만 느낄 수가 있어요.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느낀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죠. 살아있는 사람만이 느끼는 거예요. 살아있는 동물만이 느낄 수 있어요.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체는 느끼지 못해요. 우리는 금붕어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고통을. 그래서 기꺼이 낚시를 던지고, 낚시바늘을 꿰죠. 우리의 보통 통설은 물고기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연구 결과에 의하면, 물고기도 고통을 느낀다는 거예요. 인간과의 차이는 있을 뿐이죠.

 

인간만큼 강렬한 느낌을 가진 동물이 없어요.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은 굉장히 좀 특이한 동물입니다. 어떻게 보면 특별한 동물이고, 어떻게 보며는 발달이 덜 된 동물이죠. 즉 진화가 덜 됐어요. 진화가 덜 됐다고 하는 표현은 지나치게 민감하걸랑요. 햐~ 인간이라는 동물은 너무 진화가 되어서 그런지, 진화단계여서 그런지, 아니면 진화가 덜 되어서 그런지, 굉장히 민감해요. 인간만큼 민감한 동물은 없어요. 그 느낌은 말이예요. 것도 만져 줘야 좋아해요. 인간은 피부와 피부의 접촉을 통해서 그의 사랑을 느끼죠. 우리가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말을 쓰잖아요. 마음과 마음으로 느낀다고. 미안하지만, 일반적인 현실 세계에서는 그러거는 존재하지 않아요. 설사 마음과 마음으로 느낀다 할지라도 유효기간은 딱 6개월입니다. 그 이상이 자나가며는 우리 뇌에서 그 호르몬이 분비가 잘 안돼요.

 

그럼 그 호르몬 주사를 놓으면 될 거 같죠. 참 아쉽게도 첫눈에 불이 붙으며는 그 호르몬이 나오는데, 6개월이 지나버리면 그 호르몬이 팍 줄어 버려요. 그러면, 인위적으로 그호르몬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전에처럼 눈에서 불이 붙을까요? 안 붙어요. 눈에 불이 붙으며는 그 호르몬이 생성되는 거는 틀림없어요. 근데 이상하게도, 그 유효기간이 지난 뒤에 그 호르몬을 똑같은 양을 채워도 절대 그 마음의 느낌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마만큼 민감해요. 마음으로 느끼고, 그것을 담아야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마음으로 느끼지 않는한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아요. 마음으로 느낄 때만 행동으로 옮겨가죠.  

 

그래서 우리가 장면 4를 봐야 돼요. 어느 수행자가 깨딸음을 얻기 위해서, 그야말로 맹렬히 수행하는 수행자가 있었죠. 그는 풍문에 고타마 싯타르타라고 하는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어서 붓다라고 불리고, 모든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끈다고 하는 풍문을 듣게 되죠. 그래서 그 수행자는 붓다를 만나기 위해서 길을 떠났죠. 그가 머무르고 있다고 하는 그 곳을 향해서 그는 여행을 따났죠. 그러다 그는 중간에 어느 집에 묵게 됐어요. 근데 그 곳에는 수행자보다 붓다가 먼저 와서 묵고 있었죠. 그리고 날은 샜고, 그는 풍문의 붓다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어요. 그는 붓다와 같은 방에서 하룻 밤을 유숙했지만, 그는 붓다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끼는가요? 나는 이 장면에서 벽을 느끼죠. 그 강고한 벽 말이예요. 중국의 남전선사는 병속의 새라고 하는 화두를 던지죠. 병 속에 새가 있는데, 병을 깨트리지 않고 이 새를 어떻게 꺼낼 수 있느냐고 묻죠. 플라톤은 동굴 속의 알레고리를 이야기 하죠. 동굴 속에 죄수를 가둬서, 처음부터 누구와도 접촉시키지 않고 사물의 그림자만 비춰 보여주면, 그는 동굴 속에서 나와서 진짜인 사물을 보더라도 사물을 거짓으로 여기고, 동굴 속에서 사물의 그림자를 본 것을 진실로 여긴다. 이것이 플라톤이 주장하는 동굴 속의 알레고리예요. 영화 메트릭스를 보면는 거기 통 속에 갇혀 있는 건전지 인간이 등장하죠. 그는 통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하죠.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사랑하고. 뇌의 전자 신호가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렇게 보내지걸랑요. 그는 컴퓨터를 가동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뽑기 위한 인간 건전지죠. 근데 그 인간 건전지를 조종하기 위해서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의 뇌에 다양한 전자신호를 조작하죠. 그래서 그는 일상의 활동을 하고, 연애도 하고, 모든 것을 다 해요.

 

붓다를 만나기 위해서 떠났던 수행자가 붓다를 만나고도 그를 알아보지 몬하죠. 병 속의 새, 동굴 속의 알레고리, 메트릭스 세계의 통 속의 인간 건전지, 공통적이죠. 그건 뭐냐면,  벽이예요. 강고한 벽 말이예요. 나는 이 수행자가 아마 오늘도 풍문 속의 붓다를 만나기 위해 헤메리라고  생각해요. 그가 만나고자 하는 것은 풍문 속의 붓다예요. 실제의 붓다가 아니라는 야기예요. 왜 실제의 붓다가 아니냐면, 그가 들은 풍문 속의 붓다는 마치 벽처럼 그를 강고하게 둘러싸고 있껄랑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설사 붓다라도 그 벽을 깰 수가 없어요. 마치 병속의 새와 같죠. 나는 이 수행자를 보면, 이 이야기를 읽으면, 그 수행자에게서 강고한 벽을 느껴요.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밑으로 기지도 못하는 그 강고한 벽 말이예요. 그가 알고 있는 붓다라고 하는 것은 풍문 속의 붓다예요. 마치 플라톤이 말하는, 그림자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죠.  

 

우리가 이 4 가지 장면에서 마음으로 느껴야 돼요. 그 4가지 장면에서 마음으로 느껴야 돼요. 나는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꼈고, 그 다음에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다음에는 따뜻한 엄마의 마음을 느끼죠. 그리고 네번 째에서는 벽을 느껴요. 우리가 경전이라고 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껴야 되요. 다른 표현으로 하면, 마음의 느낌으로 읽어야죠. 마음의 느낌으로 읽지 못하면 그건 사어예요, 죽은 거죠. 마음으로 느낄 때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내가 그 가르침이 나의 가르침이 되죠.

  

제가 전에 거울 명상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거울을 한번 봐보라고. 우리는 거울 본다라고 이야길 하죠. 내 표현 맞습니까? 거울 본다 그러잖아요? 이 표현이 맞습니까? 사실 이거는 잘못된 표현이죠. 우린 거울 보지 않습니다. 나를 보죠. 내가 거울 앞에 서는 것은 나를 보기 위해 서는 것이지, 거울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서지 않습니다. 근데 우리는 거울을 본다라고 이야기 하걸랑요. 거울을 본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지 못해요. 정확한 표현은 거울 앞에 서 나를 본다예요. 그래야 그게 맞아요. 거울 앞에 서서 한번 나를 보세요. 거울 속 인간이 나인지? 아니면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이 나인지?

 

거울 명상이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죠.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말씀하시걸랑요. 네가 행동할 때, 네가 말할 때, 네가 생각할 때,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보라고 얘기 하거든요. 그 이야기는 너를 보라는 이야기예요. 메트릭스 영화의 통 속의 인간 건전지의 조작된 전자신호의 인간이어서는 안된다는 거죠. 내가 왜 '경전, 마음으로 느끼다'를 이야기하느냐며는 우리는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듣고 하죠. 근데 우리가 영화에서 말하는 뇌의 신호를 조작하는 것과 우리가 과연 얼마만큼 다르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요?

 

우리는 스스로의 전자신호를 조작하죠.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뇌의 전자신호를 조작한다는 이야기예요. 마치 그러고는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느끼고, 내가 이해했다고 이야기 하죠. 그러나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했다고 여기는 것이지, 전자신호에 의해서 말이요. 실제로 듣고, 실제로 느끼고, 실제로 이해하지 못해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는 입력된 정보 아래서만,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걸랑요. 그거는 누군가의 방식이죠. 그것은 누군가의 방식이지 나의 방식은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내가 오늘 주제를 경전 마음으로 느끼다라고 정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내 마음으로 느껴야 되요. 누군가의 눈을 따라 가서는 안되요. 명나라 초기 설선은 이렇게 말했죠. 주자가 한 글자, 한 이치도 해석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주자의 가르침만 따르면 된다고 그랬어요. 굳이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명나라 초기 설선이 주장했죠. 주자가 일이, 일자도 해석하지 않고, 이해시키지 않았음이 없어. 그러니깐 우리는 그가 해석하고, 이해한 걸 따라가면 된다. 우리나라도 송시열이가 설선의 말을 받아서 그걸 주장했죠.

 

내 마음으로 느껴야만 그것이 내 것이에요.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남의 돈을 세어주는 계산원이 되지 말라고 했어요. 남의 돈은 아무리 세어서 계산해줘도, 내 주머니의 돈이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번에 수요일 날 내가 반야심경을 할려고 하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어요. '반야심경, 마음으로 느끼다'라고 하는 그런 주제로 가지고 내 반야심경을 할라고 해요. 마음으로 느끼는 반야심경. 과거의 해석방식은 싹 쓸어버리고. 물론 나도 입고한 인물입니다. 과거의 전통 속에 있다는 거죠. 그 동안에는 입고했지만, 이번에는 출신해 볼라구요.

 

과거의 것은 싹 쓸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그래서 이번에는 가급적이며는 필기 같은 거는 좀 자제 하시고,마음으로 느끼시기를 바래요. 그래서 특별히 필기사를 한 분 모시잖아요. 어차피 필기는 한 사람이 해서 나눠서 가지면 돼요. 우리가 필기를 하다 보며는 사실 느끼지 못해요. 우리의 뇌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못합니다. 적게 되면, 듣는 것에 문제가 생겨요. 듣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예요. 우리 인간이 마음을 발견하긴 했지만, 아직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고, 이것을 동시에 다하지 못해요. 물론 여성들은 좀 더 진화가 되어서 이 부분을 조금 잘하죠, 남자보다는. 남자는 진화가 좀 덜 돼 가지구 동시에는 아무 것도 못해요. 물론 여성은 좀 더 나아요.

 

그러나 우리는, 인간은 뇌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집중해서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적는 것은 그저 필경사가 적으면 돼요. 그래 대부분은 그때 그때 중요한 것들은 내가 다 적어서 미리 배포를 할거예요. 그래서 그걸 보면 될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책상같은 것도 놓지 않습니다. 그냥 귀를 열고, 그저 문건을 보고, 듣고 이해만 하시면 돼요. 그러기 때문에 몇 분이 오시든지 그거는 관계가 없어요. 그래 저 먼저께 이야기했지마는 이거는 오래하지 않습니다. 오래할 것두 없구요. 이거는 뭐 인기 드라마가 아니래서 시청률을 의식해서 잡아늘릴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날, 수요일 날  오후7시에 오신 분, 첫날 오신분과 함께 갑니다. 그리고 한 번 빠진 분들은 나오지 말도록. 예.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좀 강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내가 이야기를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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