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마 질서의 회복|…… 혜천스님설교

2019. 5. 26. 10: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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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 불기 2556년 3월 25 









다르마 질서의 회복

 

 

오늘 주제는 다르마 질서의 회복입니다. 

 

다르마 질서의 회복, 네. 부처님의 가르침을 8만 4천 법문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하면 무량심이예요, 아파마나. 무량심은 세분화해서, 사랑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차별없는 마음, 그렇게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죠. 왜 부처님께서 무량심을 강조했을까요?

 

우리가 가끔 잊어먹는 게 있습니다. 무엇을 잊어 먹냐면, 부처님은 크샤트리아 출신이라고 하는 것을 잊어 먹죠. 지금으로부터 한 5,000년전 쯤, 지금의 러시아 남부의 카푸카스 지방에 아리안족이 거주하고 살았죠. 아리안족은 고귀하다는 뜻이예요. 또한 성스럽다는 뜻도 있고. 그 아리안족들은 초원에서 참 평화스럽게 살았어요. 근데, 어느 때쯤 부터 일군의 집단들이 등장했죠. 그들은 전사의 신 인드라를 추앙하면서 칼을 휘두르고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어요. 그  집단이 칼을 휘두르고 약탈을 시작하니까 초원의 질서는 깨졌죠. 이제 그 초원에서는 오직 힘을 가진 자만이 살 수 있는 그런 초원이 되었어요.

 

누군가가 힘을 가지고 약탈을 시작하게 되면, 다른 집단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같이 약탈할 수 밖에 없죠. 그것이 침략적인 약탈이 되었든, 방어적인 약탈이 되었든, 약탈은 끊임없이 약탈을 낳죠. 그래서 초원의 질서는 깨졌어요. 초원의 질서가 깨지며는 모두가 불안해 지죠. 어느 누구도 안전한 자는 없어요, 오직 힘과 힘이 충돌할 뿐이죠. 그들 집단 중 한 집단이 힌투쿠시 산맥을 넘어서 인도를 침략해 들어오죠. 그리고 그들은 인도의 펀잡주에 거주하고, 끊임없이 동진을 거듭하죠. 그리고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하고. 바로 그 크샤트리아 전사들이 말이예요. 붓다는 그 크샤트리아 전사 집단의 일원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출가했고.    

 

무량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마의 질서의 회복이예요. 약탈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요? 질서가 깨어진 거죠. 결국 무량심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질서가 회복되어야 되기 때문이예요. 무량심이 아니면, 질서를 회복할 수가 없죠. 나는 항상 의문이 있어요. 어떤 의문이 있냐면, 붓다는 그 시대를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붓다가 살고 있던 그 시대를 약탈이 종식된 선의 시대로 보았을까? 아니면 여전히 약탈이 진행되고 있는 불선의 시대로 보았을까요? 우리는 한번도 붓다가 그 시대를 어떻게 인식했을까를 의문을 가지고 질문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우리는 붓다의 깨달음만을 논하죠. 붓다가 무엇을 깨달았느냐, 붓다가 무엇을 가르쳤는가만을 이야기하지, 붓다가 그 시대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왜, 여기에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면, 모든 것은 그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거예요. 

 

붓다의 깨달음을 다르마의 특수성이라고 규정한다고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르마의 보편성입니다. 즉 일반적인 거죠. 왜 그러냐하면 그 시대의 사람들과 만날려면, 그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할 수 밖에 없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상황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일이예요. 근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적어도 부처님은 그 시대를 선(善)의 시대라고 인식하지 않았음은 분명해요. 왜 부처님이 그 시대를 선의 시대라고 인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냐면, 만약 부처님이 그 시대를 선의 시대로 인식했다면, 자비를 그렇게 강조해야할 이유가 없었을 거예요.

 

자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자비라고 하는 것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될 생각이라고 보면 맞겠죠. 그 마음. 내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약탈의식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자비로운 마음이 거기에서 깃들 수 있겠어요. 과거 붓다의 선조들이 끊임없이 약탈을 일삼았듯이, 그 시대도 그 시대에 맞는 약탈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죠. 부처님 시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어요. 경전에 국가 이름이 16개가 나오는데, 그 16개의 나라가 서로 쟁취하는 시대였지요. 이미 부처님의 생존 시기에 카빌라가 망했고, 강력한 국가였던 코쌀라도 마가다의 발굽 아래 멸망했고, 리차비족의 연합국도 역시 마가다의 발굽 아래 멸망했고... 부처님 시대에 말이죠.

 

부처님을 추종했던 코쌀라의 파세나디(Pasenadi:王)왕, 또 마가다의 빔비사라((Bimbisara)왕이 공교롭게도 둘 다 아들에 의해서 제위가 찬탈되고, 죽었다는 거예요. 파세나디도 굶어죽고, 빔비사라도 굶어 죽었죠. 빔비사라는 아들 아자타삿투(아자타사투(Ajatasatru)의해서 유폐되서 굶어 죽고, 파세나디는 아들 비두다바(Viḍũḍabha)란에 피해서 마가다의 자기 조카인 아사세(Ajatasatru))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새벽에 성문 밖에서 지치고 분노하고, 그 마가다 성밖에서 새벽에 그렇게 죽었죠. 아사세는 조카이기도 했지만, 외삼촌인 파세나디와 끊임없이 전쟁을 했던 사람이예요. 어느날 파세나디는 전쟁에서 승리해서, 아자세를 포로로 잡았지만, 조카를 죽이지 않고 석방해 주기도 했어요. 아들에게 제위가 찬탈되자 조카이자, 지난 날 적이었던 그를 찾아갔다 그렇게 죽었죠.

 

왜 파세나디와 빔비사라는 둘 다 아들에게 찬탈을 당했을까요? 나는 그렇게 보죠. 그 둘은 그 당시에 인도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양대 국가의 왕이었어요. 긴데 아마 그들은 붓다에게 귀의하고 칼을 놓았겠죠. 더 이상 약탈 전쟁은 그만 두었겠죠. 경전에서 왕은 포악한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니까야에서는 왕을 호의적으로 그리지 않아요. 왕은 강도와 약탈자와 같다라는 표현도 나오죠.그것은 붓다의 표현이예요. 적어도 붓다는 그 시대를 선의 시대로 파악하진 않았어요. 붓다는 그 시대를 비판했으니까요. 빔비사라와 파세나디는 칼을 놓았겠죠. 더 이상의 어떠한 약탈 전쟁은 없었겠죠. 그것은 그의 젊은 아들들에게는 무기력한 왕으로 보였겠죠. 또 크샤트리아 전사들은 그 왕들이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르죠, 젊은 왕자가 혼자 아버지를 쫓아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반드시 그 왕자를 지지하는 군대가 있었을 것이고, 그 군대는 젊은 크샤트리아 전사로만 구성 되었죠. 인도사회는 오직 크샤트리아 전사만이 칼을 들고 전쟁을 하죠. 농민이나 상인은 전쟁에 나가지 않죠. 

 

약탈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전쟁터에 나가는 크샤트리아만이 피해를 보는 건 아닙니다. 전쟁에는 많은 물자가 필요하죠. 크샤트리아 전사만이 칼을 들었겠지만, 보급은 평민들이 했겠죠. 크샤트리아 전사들이 직접 쌀가마니를 메고 전쟁터에 나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결국은 모든 보급은 평민들이 했겠죠. 언제나 전쟁은 가난한 자에게만이 재앙으로 다가오죠. 미국에서도 이라크 전쟁은 부자의 전쟁에 가난한 자가 동원된 전투라고 하죠. 부자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익을 보지만, 전쟁에서 총을 쏘는 것은 가난한 자죠. 가난한 자의 자식들 밖에 없다는 거죠. 이라크 전선에 참여한 군인들 중에 부자나 권력자의 자식은 없다는 거예요. 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죠. 전쟁은 언제나 힘없는 자에게 재앙을 가져와요. 가난한 자를 위한 전쟁이라는 거는 없죠.  

 

언제나 돈을 대고, 사람을 대는 자는 가난한 자라는 거예요, 평민들. 그거는 어느 시대고 다 마찬가지예요. 빠사나디와 빔비사라는 부처님한테 귀의하고 그것을 멈추죠. 그래서 그들은 폐위되죠. 어느 시대든지 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의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의로운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내가 선이 정의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 선은 보편적인 선이 아니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 선은 오직 힘있는 자에게만 미치는 경우가 있죠. 우리가 중국의 인(仁)이라고 하는 것을 보편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말하는 인은 본래 군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어요. 평민들은 그 인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평민들은 그 예에 해당되지 않죠. 인의예지라고 하는 것은 오직 군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평민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어요.

 

부처님은 진정한 선을 이야기하고자 하신거죠. 그 가르침이 바로 무량심입니다. 무량심은 모두에게 싹이 트는, 즉 평화의 싹이죠. 그 평화의 싹을 키우는 것은 자비입니다. 자비야말로 그 불선의 시대를 종식할 수 있다고 보신거죠. 부처님이 집요할 정도로 자비를 이야기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봐야 됩니다. 시대가 불선하기 때문에, 시대가 선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고통 받죠. 모든 사람이 고통 받는데, 춘향전의 이몽룡이 변사또에게 읊어줬던 시처럼, 백성의 피와 고름을 짜내서, 그 주지육림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었죠. 부처님은 그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그랬어요. 그 대표자를 왕으로 꼽죠. 그래서 부처님은 왕이 갖춰야 될 덕목은 공평하게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했어요. 약탈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을 약탈하지 정신은 약탈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신은 약탈할 수가 없죠.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질이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물질을 골고루 잘 나누는 것이 왕이 갖춰야될 덕목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며는 왕은 약탈자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왕은 강도와 다르게 없다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왕은 도둑이라는 거예요. 결국은 이러한 사회가 무슨 사회인가요? 불선의 사회라는 것은 질서가 깨어진 혼돈의 사회예요. 질서가 깨어진 혼돈의 사회는 다르마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다르마는 질서가 회복된 사회입니다. 그것이 다르마입니다. 다르마를 우리가 추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돼요. 우리는 다르마 그러면, 아주 추상적으로 생각하죠. 다르마라고 하는 것은 내 개인의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르마는 질서가 회복된 사회죠.   

 

우리는 언제나 질서가 깨지는 위태로운 시대에 살죠. 누군가가 항상 그 질서를 깨트리고, 이익을 보려고 하죠. 붓다의 조상들이 질서를 깨트리고, 이익을 보았듯이요. 붓다는 그걸 후회해요. 붓다가 출가하고, 그 시대를 불선의 시대라고 비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불선의 시대를 만드는 크샤트리아의 일원이었고, 그 또한 크샤트리아의 전사의 지도자였기 때문이죠.   

 

후대에 징기스칸은 몽고 초원에서 칸으로다가 추대되었죠. 징기스칸이 칸으로 추대되었던 이유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징기스칸이 칸으로 추대되었던 것은 초원의 질서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징기스칸 이전의 몽고의 초원은 약탈의 시대였어요.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죠. 그러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거주할 수 밖에 없었어요. 집단적으로 거주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존을 위협했죠. 말은 소처럼 풀을 촘촘히 뜯어먹지 않는다는 거예요. 말은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뜯어 먹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초원이 아주 넓어야 돼요. 그런 면에서 보면 소는 참~~암 착한 동물이죠. 아주 풀을 모지랑 뜯어 먹걸랑요. 그저 풀을 깍듯이 뜯어 먹어요. 근데 말은 안 그래요. 여기서 한 잎, 저기서 한 잎. 그러기 때문에 초원이 넓어야 돼요. 그럴려면, 집단을 이루어서 힘으로다 초원을 확보하고, 쫓아내고 약탈하지 않으면 안 돼요. 

 

징기스칸은 그 초원에서의 그거를 종식시킨 사람이예요. 그래서 굳이 집단을 이룰 필요가 없게 만들었죠. 집단을 이룰 필요가 없으니까 듬성듬성 몽고 파오를 쳐놓고 방목하면 되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부처님이 보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약탈이 종식된 선의 시대라고 이야기할까요? 아니며는 약탈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그런 시대라고 이야기할까요?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현재를 비추어 봐야 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크게 다를 것이 없어요. 인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시대와 상황이 변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죠. 부처님의 시대가 불선의 약탈의 시대였고, 징기스칸의 시대가 불선의 약탈의 시대였고, 우리 시대는 아니다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요? 이 시대가 질서가 회복되어 있는 다르마의 시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크샤트리아 전사인지도 모르죠. 적어도 붓다 시대는 크샤트리아 전사는 크샤트리아 만이었습니다. 적어도 평민들에게 쌀은 지고 오라고 했지만, 활을 들고 나가서 싸우란 소리는 안 했죠. 근데 우리는 등에는 쌀을 지고, 손에는 칼을 들고,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죠.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면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그 시대를 불선의 시대라고 했지마는 적어도 등에 쌀을 지고,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어요. 2,500년 후에 우리는 등에 쌀을 지고, 손에 칼을 들고 싸우니 몇 배 힘이 들죠. 힘만 든가요? 더 위험하죠. 중국의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36계 놓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라고 그랬죠. 36계 줄행랑을 놓을라면, 등에 쌀을 지고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도망치고 싶어도 등에 무거운 쌀을 졌으니, 도망을 칠 수도 없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부처님은 적어도 그 시대에 약탈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제시했어요. 그런데 2,500년 후의 우리는 그 방법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이 시대를 선의 시대로 만들어야 되겠죠. 누군가가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런 시대를 만들어야 되겠죠. 우리는 눈군가가 만들어 주길 원하죠. 현재의 질서를 깨트렸던 자들, 과거의 질서를 깨트렸던 자들, 과거의 질서를 깨트렸던 자들과 손잡은 자들, 그런 자들이 지금 이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나와서 떠들고 있죠. 한 세력은 현재의 질서를 깨트린 자들입니다. 한 세력은 과거의 질서를 깨트렸던 자들입니다. 한 세력은 과거의 질서를 깨트렸던 자들과 손을 잡고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과연 그 자들이 질서를 회복하고, 질서가 회복한, 질서가 회복된 이 땅의 다르마의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꿈같은 얘길겁니다. 붓다가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강도와 도둑이라고 칭했던 것처럼 그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우리가 강변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무량심을 그렇게 강조했던 이유는 무량심이 아니면, 깨트려졌던 질서를 회복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 마음 속에 무량심이 없는데, 어떻게 깨트려진 질서를 회복할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시스템과 제도화만 정비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정말 그럴까요? 인간 역사 이래, 가장 완벽한 시스템과 제도를 가졌던 것은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었어요. 그 어떤 인간 사회도 소련보다 완벽한 제도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는 없었어요. 그러나 소련은 망했어요. 아무리 제도와 시스템이 완벽하다 하더라도, 그 시스템을 만든 것은 인간이예요.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인간이죠. 인간이 그 시스템을, 그 제도를 악용하는 한 그 제도와 시스템은 무력화된다는 거예요.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그 제도를 깨트린 것도 역시 인간이죠. 시스템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당연히 시스템과 제도는 있어야죠. 그렇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무량심이 없는 한,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자비희사(慈悲喜舍) 아닌가요? 사랑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차별없는 마음. 그 마음이 없는 한, 불선의 시대는 지속된다는 거예요. 나는 굉장히 유감이 많은 사람이예요. 굉장히 불만이 많은 사람이예요. 무슨 유감과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느냐? 나는 붓다의 제자라고 했던 과거의 분들과 현재 붓다의 제자라고 하는 분들에게 유감과 불만이 많아요. 적어도 붓다는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삶과 사회를 지향했어요. 붓다는 약탈이 종식될려면, 상가사회가 되야 된다고 했어요. 상가사회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되, 하나도 가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본래 무소유의 의미는 그것이었어요. 모든 것은 누리지만, 하나도 소유되지 않는 사회.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굳이 내 앞에 등기되어 있지 않아도, 내가 쓸 수 있다는 것을 뜻하죠. 만약 내가 살수 있는 집을 선택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굳이 집을 사서 내 앞에 등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집을 사서 내 앞에 등기하는 이유는 딱 하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 육신을 누일 곳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집이 언제든지 제공될 수 있다면, 무엇때문에 지긋지긋하게 그 놈의 집에서 40년, 50년을 살겠어요? 부처님이 삼시존(?)에 사셨다고 그러잖아요. 우기에는 시원한 집에서, 겨울에는 따땃한 집에서, 건기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집에서 살았다고 그러잖아요. 우리가 선택해서 살 수 있다면, 그렇게 골라가면서 살지 않겠어요. 뭣 때문에 집 하나에 그렇게 충성하면서, 연이어 충성을 외치면서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겠어요? 

 

적어도 부처님이 지향했던 상가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만큼 우리가 노력을 하고 있느냐는 거죠. 물론 우리가 이런 의문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회가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가능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 사회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회를,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붓다의 제자라는 거죠. 아니,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이 붓다의 제자라는 거죠.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참, 이 말씀은 안 하셨어야 되는데. 부처님의 이 말씀을 참 전할라니까, 참 얼굴에 열이 오르네. 말세가 되면, 나의 가르침을 도둑질해서 밥벌이하는 자들이 세상에 넘쳐 날 것이다. 아, 이런 뼈 아픈 말씀을 왜 했을까?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말법 세상이 되면, 부처님의 가사를 입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도적질해서, 부를 축적하는 자들이 세상에 넘쳐날 것이라고 그랬어요. 나는 지금의 이 시대가 말법시대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왜 지금 이 시대가 말법시대라고 규정짓지 못하냐면, 내가 이 시대를 말법시대로 규정지으면, 조금 전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속할까봐 두렵기 때문이죠.

 

우리는 부처님의 출신을 잊어먹으면 안돼요. 부처님의 출신은 크샤트리아 전사다. 요새 식으로 표현하며는 살인병기였다는 거예요. 그런 그가 무량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모든 것이라는 거예요. 다르마라고 하는 것은 질서가 회복되는 세계입니다. 오늘의 주제가 다르마 질서 회복입니다.  

 

뭐 강론은 여기까지 하고,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을 하실 분은 기탄없이 하십시요. 마, 괜찮습니다.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공부할 수 있고, 우리가 함께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지향하는 그런 것에 밑거름이기도 하죠. 뭐, 특별히 없으신가요?  

 

특별히 없으시며는 우리 부처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셨던, 무량심을 충만시키는 아파만 명상 수행을 좀 하죠. 제가 아파마나 명상 수행 좌선을 하는 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무량심으로 바꿔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늘의 주제를 새긴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딱.딱.딱.(죽비소리와 함께 입선하여 30분간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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