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식을 잘라라|…… 혜천스님설교

2019. 6. 1. 16: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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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6년 4월 15 

기억의식을 잘라라

 

오늘 주제는 '기억 의식을 잘라라'입니다.

 

나는 의문이 좀 많은 사람이예요. 그 이유는 뭔지 모르겠는데, 의문이 참 많아요. 그래서 가끔 이런 의문을 갖죠.부처님이야말로 아리안의 원형문화의 진정한 상속자가 아닐까? 라는 의문이 가끔 들어요. 3,000년 전에 조로아스터는 이리안의 원형문화를 계승할려고 했죠. 그것처럼 붓다야말로 아리안의 원형문화의 진정한 상속자가 아닐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어쩌면 내 생각이 전통적인 붓다의 믿음을 지닌 입장에서 보면, 참 뚱딴지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의문을 가끔 갖습니다. 내가 그 의문을 갖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붓다가 왜 어느날 갑자기 크샤트리아 전사의 직위를 버렸을까?  경전에서는 붓다가 동서남북의 네 문을 나가서, 늙는 사람, 병든 사람, 죽는 사람, 이런 걸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얘기해요. 생로병사 때문에 결심했다는 거죠. 붓다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네 대문에 나가서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겨우 알았겠느냐 이 말이예요. 만약에 그랬다면, 붓다라고 하는 인물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난 근원적인 의문이 있죠.  왜 붓다는 어느 날 갑자기 크샤트리아 전사의 직위를 버렸을까?

 

내가 왜 붓다를 아리안의 원형 문화 유산의 진정한 상속자라고 이야기 하냐면, 고대 아리안족은 지금 러시아 남부인 카프카스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는 붓다의 선배인 조로아스터가 태어나기도 이전이죠. 아주 오래 전 아리안족은 카프카스 지역에서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약탈을 전문으로 하는 크샤트리아 전사들이 등장을 하죠. 남의 것을 빼앗고, 내쫒고, 죽이고 하는... 그것을 보고 조로아스터는 경악하죠. 그리고 그들을 증오합니다. 붓다는 바로 그들의 후예였습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그의 유전자 속에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던 그의 조상의 DNA가 있었어요. 그는 그 외형의 문화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입니다. 아리안족의 외형 문화를 말이예요. 그리고 그는 그 문화 속에 교육받은 사람입니다.

 

경전에서는 분명히 기술합니다. 그의 아버지 숫도다나는 고타마 싯타르타가 위대한 군주가 되길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그의 부족이 원했던 것은 붓다가 아니라 강력한 전차부대를 앞세운 카리스마 넘치는 인드라와 같은 군주였어요. 지금도 한국 불교 사찰에 가면, 신중단이라고 있죠. 그 신중단(神衆壇) 중간에 장군복장을 한 사람,그 사람이 바로 크샤트리아 전사들이 숭배했던 인드라입니다. 우리는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하는 인물이죠. 붓다의 부족과 그의 아버지 숫도다나는 고타마 싯타르타가 인드라 처럼 전차를 앞세우고, 이웃의 부족을 정족하고, 이웃의 부족을 약탈하는 그런 강력한 군주가 되기를 원했어요. 그러나 붓다는 그것을 거부하죠. 아리안족의 그 외형문화를 말이예요.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출가를 하죠. 우리가 붓다의 출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요?   

 

일본의 마쓰다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붓다의 출가는 크나큰 포기라고 이야기하죠. 마쓰다니 후미오 처럼 크나큰 포기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붓다의 출가는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낸 겁니다. 붓다는 말씀하시죠. 인간은 버리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습기(習氣: 註)산스크리트어 vāsanā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잠재력. 아뢰야식에 스며든,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의 기운. 종자(種子)와 같음)라고 그랬어요. 습기는 기억의식입니다. 특히 나쁜 기억의식이죠. 내가 강론에서 가끔 말씀하죠. 인간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생각이다. 어는 누구도 자기 자신의 생각 밖의 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자기 생각 안에서 보고, 생각 안에서 듣고, 생각 안에서 이해하고, 생각 안에서 느끼죠. 왜 그럴까요? 생각은 기억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억의식은 생각의 바탕입니다. 기억 의식은 의식의 퇴적이죠. 퇴적된 의식입니다. 쌓이고 쌓인 의식이죠. 마치 지층의 퇴적층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기억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나는 붓다의 출가는, 특히 그 중에서 나쁜 기억 의식의 잘라냄이라고 보죠.  

 

어저께 한겨레신문을 봤어요. 한겨레 신문을 본 것은 한겨레 신문이 들어와서입니다. 거기에 문성근씨의 인터뷰가 실렸어요. 제가 세 번을 무릎을 꿇고 읽지는 않았지만, 세 번을 제가 정독을 했어요. 그 기사를 정독을 해서 세 번 읽었던 것은 문성근이라고 하는 분이 기억의식의 늪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기억의식의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예요. 개인은 기억의식의 늪에 빠져 있으면서도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집단은 기억의식의 늪에 허우적거리면서도, 허우적거리는 줄 모르죠.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는한 인간은 원형 문화를 상속하지 못합니다. 원형문화는 고대 아리안족이 카프카스에서 평화롭게 살았던 시대죠. 모든 민족이 그랬던 시대의 유산이 원형문화 유산입니다.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으면, 경험의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게 되죠. 내가 그 분의 실명을 거론하는 거는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또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기억의식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기 때문이예요. 내가 생각하는 붓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붓다가 아니라, 중생의 이해를 실현시켜주는 것이 붓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이상을 실현해주는 것이 정치죠. 붓다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붓다가 아니듯이, 우리가 그 분을 붓다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분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이상을 실현해주기 때문이예요. 만약 그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붓다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나쁜 기억의식은 검은 그림자를 만듭니다. 검은 그림자는 모든 빛을 차단하게 되죠. 모든 빛이 차단되게 되면, 암흑의 세계가 됩니다.   

 

중국의 선사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4)는 말하죠. 칠흑같이 검은 산에 깊고 깊은 굴이 있는데, 그 굴속에 눈을 감고 들어앉아 있는 자가 되지 말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칠흑같이 검고 검은 산에, 그 산에는 깊은 동굴이 있습니다. 그 빛 하나 들지 않는 깊은 동굴 속에 누까지 감고 앉아 있으니... 대혜종고는 그런 자가 되지 말라라고 그랬어요. 검은 그림자는 내 경험의식을 왜곡시키죠. 우리의 마음은 기억의식과 경험의식의 결합입니다. 거기에 이성의식이 작용하죠. 나쁜 기억의식은 모든 빛을 차단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빛을 차단하게 되면, 우리는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지옥이 아닙니다. 모든 빛이 차단된 곳이 지옥이죠. 우리 의식 속에 빛이 차단되면, 그것은 이미 지옥에 사는 지옥 중생입니다. 

 

기억의식을 잘라내야 됩니다. 지혜의 칼로서 말이예요. 누구를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기억의식을 짊어지고 가는 한 내 미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붓다가 출가를 했고, 왜 붓다가 보리수와에 앉았겠습니까? 나는 그것을 기억의식의 잘라냄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기억의식의 늪 속에 빠져서 평생을 허우적거리며 살죠. 과거의 기억의식은 현실의 경험의식을 위험에 빠트립니다. 위험에 빠트린다는 것은 오류를 범하게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현실 상황인식을 오판하게 되죠.       

 

기억의식을 잘라낸다고 해서, 바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낸다고 해서 내 삶에 아무런 지장도 없습니다. 나는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내 삶의 발자국을 되밟아 가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기억의식을 잘라낸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 동안 이야기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기억의식이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는 것 뿐이죠. 기억의식이라고 하는 말을 누가 쓰는지 안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구체적으로 내가 지나온 발자국을 되밟아가는 것을 기억의식이라는 말로 요새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는 내가 밟아온 그 발자국의 그 연장선 속에서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 발자국을 연장시키죠. 내 발자국이 평형을 유지하는 발자국이라면, 문제가 되 게 없죠. 그러나 우리의 발자국은 평형을 유지한다기보다는 끊임없이 상황에 따라서, 때로는 360도를 회전하고, 때로는 갈 지자를 걷고, 때로는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기도 하죠.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으면, 미래에도 그것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어느 선사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쥐 이빨이 천 년을 묵는다해서 상아가 되랴? 쥐의 어금니는 처 년을 묵어도 쥐 이빨이라는 거예요. 상아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이런 말씀을 할까요? 내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는한, 내 미래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얘기예요. 쥐 이빨이 천년을 묵어도 그대로 쥐이빨이듯이 말이예요. 기억의식을 되돌아 보지 마세요. 기억의식을 되돌아본다고 해서 내 과거의 발자국이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내 기억의식을, 그 발자국을 돌아볼 시간이 있으면, 포크레인으로 파 버리시죠.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지, 과거를 향해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과거으 무거운 기억의식을 지고, 가려고 합니까? 과감하게 기억의식을 잘라 버리세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수요일에 만났습니다. 우리는 수요일에 만났지만,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서로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왜 같은 사람이 아닌데, 기억은 같은 기억을 가져가려고 하십니까? 기억의식은 외형의 문화와 같습니다. 외형의 문화는 내 삶의 검은 그림자입니다. 

 

원형의 문화유산은 가져가면 좋죠. 원형의 문화유산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은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가 없는 빛은 그림자를 만들 수 있지만, 빛이 없는 그림자는 빛을 만들지 못한다는 거예요. (빛은 그림자를 만들 수 있지만, 그림자는 빛을 만들 수 없다) 빛은 내 삶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만, 그림자는 내 삶에 불행만을 담보해줄 뿐이죠. 나는 붓다의 출가와 붓다의 보리수와에 앉음은 기억의식의 단절이라고 보죠. 즉 잘라냄이라고 본다는 얘기예요. 

 

나는 서두에 부처님이야말로 아리안의 원형문화의 진정한 상속자라고 이야기했어요. 진정한 계승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사회는 평화로운 사회입니다. 개인이 추구하는 궁극의 삶은 평화로운 삶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서 이루고 싶어 하죠. 죽어서라도 이루고 싶기 때문에 천국을 이야기하고, 죽어서도 이루고 싶기 때문에 극락을 이야기하죠. 살아서 이루기에는 너무 멀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근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인간이 살아서 그것을 이루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었던가?   

 

고타마 싯타르타가 붓다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을 실현했기 때문이예요. 만약 그가 그것을 실현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그를 붓다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말하죠. 내가 실현했듯이 너희들도 실현할 수 있다라고. 붓다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네가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못하는 것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확신하면 잘라낼 수 있습니다. 우빠사나 수행에서 말하죠. 보면, 사라진다! 기억의식은 보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의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억의식이 내 경험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잘라내야 한다고 하는 강한 어조의 표현을 쓰고 있을 뿐이지,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보면, 사라진다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의식을 벗어나지 몬하죠. 자기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단어 선택을 하면서 강한 것만 골라서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의도해서도 아닙니다. 나는 강론하러 올라올 적에 주제는 가지고 올라오지만, 내용은 정리하고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산만하기도 하죠. 나는 그래서 어떤 문헌을 가지고 강의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답답함을 느낍니다.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는 의문이 많은 사람이예요. 그를 따라가는 것은 내 의문에 많은 물음표를 던지기 때문에, 나 자신도 내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자기 의식을 벗어나지 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것은 나쁜 의식은 특히 잘라야 된다는 거예요. 나쁜 의식을 잘라내지 않는 한, 현실에서 검은 그림자는 점점 커지죠. 부처님은 우리에게 말하십니다. 나쁜 기억의식을 잘라라!  그리고 그 기억의식조차 잘라라!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이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자기 습기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가 '기억의식을 잘라라!'입니다. 기억의식을 자르세요. 기억의식을 잘라야 새로운 기억의식의 길이 열립니다. 새로운 마음의 길을 열어야 된다고 제가 그전에 이야기 했었는데, 그래야만이 새로운 마음의 길이 열립니다. 나는 전에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듣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의 길이 새롭게 열린다고 이야기 했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의식을 잘라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거 불가능한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붓다도 아니고, 우리는 누구처럼 뛰어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죠. 불교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복종하고, 포기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불가능이라는 한계성을 넘어, 그 가능성을 열고, 무한성에 나아가는 것, 그게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기억의식을 자른다고 하는 것은 한계성을 넘어, 가능성을 여는 겁니다. 그리고 무한성에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기억의식을 잘라내지 않는한, 무한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무한성은 열반의 세계입니다. 붓다는 그 곳에서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는 겁니다. 오라, 내 아들, 딸들아! 걱정하지 말고 오라! 너희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그 의식을 버려라.

 

너희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의식은 거짓 의식이라는 거죠. 스스로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 누군가가 너희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대혜 종고선사가 이야기 하듯이, 칠흑같이 검은 산, 검은 굴에, 눈을 감고 앉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죠. 오늘은 왜 해가 안 뜨는 거야? 해는 떠 있습니다. 단지 내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죠. 백주 대낮에 눈을 감고 도둑질한다고 했던가요? 부처님은 이야기합니다. 감고 있는 눈을 떠라! 그리고 이 곳에 오라! 망설이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장애가 있을까봐 걱정하지 마라! 오직 확신을 가지고 오라!

 

나는 부처님을 아리안의 원형유산의 진정한 상속자라고 불렀습니다. 원형 유산은 긍정의 유산입니다. 행복의 유산이죠. 부정의 유산이 아닙니다. 외형 유산은 부정의 유산입니다. 잘라낼 것을 잘라내고 나면, 좋은 것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비단이라고 할지라도 자르지 않고는 옷을 만들어 걸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유입니다. 나는 그냥 비단 보재기 같은 것을 둘둘 말고 살래!라고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감수하셔야 될 겝니다. 비단을 돌돌마는 순간 시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하는 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비단도 잘라야만 옷이 됩니다. 우리의 기억의식도 비단을 잘라서 옷을 만들듯이 잘라야 됩니다.

 

붓다의 진정한 상속자가 되세요. 붓다 원형 유산의 진정한 상속자 말이예요. 오늘 주제는 '기억의식을 잘라라 '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단, 한 마디면 되죠. 기억의식을 잘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