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江)|…… 혜천스님설교

2019. 6. 23. 19: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해변 배경화면:: 여름에 시원하게 해변 배경화면, 외국 해변 배경화면으로 바꿔보세요^^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2556년 4월 29일

강(江) 

 

 

마당에 철쭉이 어제 다 피어가지고 아, 정말 봄 같은 봄이 됐어요.

 

오늘의 주제는 강입니다. 강.

강은 흐르다 사람을 만나면 문화를 만들고, 마음은 흐르다가 대상을 만나면 기억의식을 만들죠. 강의 혈전은 인간의 탐욕이고, 마음의 혈전은 나쁜 기억의식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유형의 문화를 만들고, 나쁜 기억의식은 불행을 만들어 내죠. 강은 생명을 낳고, 마음은 행복을 낳습니다. 강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마음도 흐르고, 대상도 흐르죠. 흐름은 변화를 일으키고, 변화는 또 다른 흐름을 만듭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은 흐름에 드는 것’이라고 했어요. 흐름에 드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흐름을 막지 마시고 그대로 흐르게 두십시오. 중국의 당나라시대 때에 등등화상은 그의 ‘낙도가’에서 ‘위문등등’이라 했죠. 흐름을 올라탄다는 뜻이에요. 흐름을 만들지 마셔요. 흐름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흐름은 올라타는 것입니다. 더 이상 흐름을 만들지 마셔요.

 

우리는 흐름을 만들려고 하죠. 흐름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흐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올라타는 것이에요. 그 흐름을 올라타는 거죠. 그 흐름을 타고 변화를 일으키고 그 흐름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죠. 흐름을 만드는 것은 유의입니다. 흐름을 만들지 않는 것은 무의이죠. 흐름을 만드는 것은 유형의 문화이고, 흐름을 만들지 않는 것은 정형의 문화입니다. 흐름을 만드는 것은 유로고 흐름을 만들지 않는 것은 무로죠.

 

그렇기 때문에 암두 전월선사는 설봉 의존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 마음속에서 흘러나와서 하늘을 덮고 땅을 덮어야 비로소 다르마의 문에 들어갈 수가 있다.’라고 했어요. 그 흐름을 올라타야 된다는 거예요. 흐름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흐름을 만들면 강이 정체되게 됩니다. 강이 정체되면 재앙의 문이 되고, 마음의 흐름을 막으면 마음이 정체돼서 파멸의 문이 되죠. 부처님은 단지 모든 것은 흐르고 흐를 뿐이라고 그랬어요.

 

우리는 윤회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윤회라고 하는 말은 흐른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흐름 속에 있다는 거죠. 그 흐름 속에 붓다가 있고, 그 흐름 속에 중생이 있고, 그 흐름 속에 다르마가 있다는 거예요. 그 흐름이 붓다를 만들고, 그 흐름이 중생을 만들고, 그 흐름이 다르마라는 얘기죠.

 

강은 어떤 인위적인 것도 없습니다. 흐르면서 모든 것을 만들죠. 강은 파괴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파괴할 뿐이죠. 서두에 얘기했듯이, 강은 흐르면서 사람을 만나죠. 그러면서 문화를 만들죠. 그 문화를 인간의 탐욕이 유형의 문화를 만들고 파멸의 문과 재앙의 문을 만들어내죠. ‘유형’이라고 하는 용어는 독일의 역사철학자 슈펜글러의 ‘서구의 몰락’이라고 하는 저서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수행에서 3가지를 경계해야 된다고 그러죠. 첫 번째, 잘하려고 하지마라. 두 번째, 되게 하려고 하지마라. 세 번째, 억지로 하지마라. 잘하려고 하는 것, 되게 하려고 하는 것, 억지로 하려고 하는 것은, 흐름을 올라타는 것이 아닙니다. 흐름을 만들려고 하는 거죠. 우리는 흐름을 만들고 싶어서 잠시도 멈추지 못하죠. 어떻게 하면 흐름을 내 쪽으로 끌어올까를 생각하죠.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하는 말도, 그 사자성어도 바로 그것을 뜻하죠. 내 쪽으로 흐름을 끌고 오고 싶어하죠. 흐름을 내 쪽으로 끌고 오고 싶어 한다고 그래서, 흐름이 나를 따라 움직여주진 않습니다. 흐름은 그저 흐를 뿐이죠. 우리는 그 흐름을 올라타면 됩니다.

 

오늘의 강론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올라탄다’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그 흐름을 올라탄다, 그 말 입니다. 흐름을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흐르는 것을 내가 그냥 올라탄다는 것이죠.

 

중국의 달마대사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수연행(隨緣行)이라고 한 것을 주장하죠. 이입사행론이라고 하는 말은 따를 수(隨)자, 인연 연(緣)자를 말합니다. 인연을 따른다. 인연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흐름을 올라탄다고 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연(緣)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흐름입니다. 그 흐름을 따른다. 수동적으로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흐름을 따르는 것을 올라탄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어린 날 종이배를 만들어서 냇물에 띄어서 그 종이배를 따라서 뛰어간 경험이 있죠. 종이배를 만들어서 물 위에 띄우는 것은 수동적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배를 띄워서 따라가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간디는 어느 날 갑자기 물레를 돌리죠. 간디가 물레를 돌리자 세상 사람들이 간디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왜 비난했을까요? 물레를 돌린다고 하는 것은 여성이나 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에요. 근데 간디는 물레를 돌리죠. 첨에 간디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물레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그 행위를 사람들이 간파했기 때문이죠.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행위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인 정치적인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면직물 수공업은 영국의 면직물 때문에 붕괴가 되죠. 간디는 영국의 면직물 불매운동을 벌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과거처럼 스스로 물레를 돌려서 옷감을 짜고 그 옷을 해 입자고 하는 주장이었어요. 그러면 자연히 영국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사지 않게 되겠죠. 그것은 단순히 면직물을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경제에 치명적인 중상을 입히는 행위이기도 하죠. 인도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의 자본을 확충시키는 일이기도 하고요. 간디가 물레는 잣는 것은 단순히 물레를 잣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인 행위죠. 능동적 행위죠. 간디의 물레는 정칩니다. 동시에 간디의 물레는 수행이기도 했죠. 인도의 모든 남자들은 간디처럼 물레를 돌렸죠. 그것이 독립운동이었던 거죠.

 

간디는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주위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소금을 만들러 가죠. 아주 먼 거리를 말이죠. 5천리라고 하는 긴, 아주 머나먼 길을 걸어서 소금을 만들러 가죠. 주위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니, 새롭게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자니, 웬 소금?’ 인도의 초대수상이었던 네루도 그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죠. 간디가 반디해안으로 소금을 만들러 걸어간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간디처럼 소금을 만들러 반디해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죠. 이윽고 수 천 명이 됐고 수 만 명이 됐고 수 십 만 명이 됐죠. 사람들은 간파를 했죠. 소금은 영국 정부의 전매품이었죠. 개인은 소금을 생산할 수 없었고 오직 정부만 소금을 생산했죠. 그래서 소금 값은 아주 고가였습니다. 간디는 반디 해안으로 소금을 만들러 가는 행위를 통해서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가르쳤던 거죠.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만들고 사무실 안에서 지끼리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간디는 왜 독립을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써 가르쳤죠. 인도의 민중은 바로 간디의 행위가 적극적인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간파했던 거죠. 처음에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영국 정부에서 경찰을 동원해서 곤봉으로 패고 말로 짓밟았지만 결국은 실패했죠. 수 십 만에서 수 백 만으로 늘어나니깐 막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죠. 영국 정부는 소금의 전매를 포기했죠.

 

내가 왜 간디를 이야기하냐면 흐름을 올라탄다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라는 거죠. 흐름을 올라타야 된다는 거예요. 흐름을 올라탈 때 변화를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변화는 또 다른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은 또 다시 더 큰 변화를 일으키죠.

 

선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작은 깨달음의 수 십 번과 큰 깨달음의 한 번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했어요. 수 십 번의 작은 변화와 한 번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다른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우리는 한 번의 큰 변화를 이루고 싶어하죠. 그러나 한 번의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한 번의 큰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서 청계는 거기다 사대강을 막고 거기다 삽질을 해됐죠. 이것은 유형의 문화입니다. 재앙의 문이고 파멸의 문이죠. 우리는 그것을 청계를 비난합니다. 그것은 청계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의 탐욕이 함께 거기에 덧붙여진 거예요.

 

유형의 문화를 어떤 개인이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거기에 동조하는 수없는 인간의 탐욕이 있기 때문이죠. 더 이상 흐름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흐름을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불행은 잉태되죠. 우리가 흐름을 만들려고 하는 그 생각을 끊는 순간 행복을 낳죠. 부처님께서는 왜 깨달음은 흐름에 드는 것이라고 했겠어요? 흐름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거죠.

 

언젠가 재밌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죠. 진해 군항제를 시작을 해야 되는 데 벚꽃이 안피었다는 거죠. 아주 오래된 얘깁니다. 그해 봄은 두보의 싯구처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죠. 그러자 진해시청에서는 기발 난 생각을 했죠. 벚나무를 비닐로 씌우고 안에다가 불을 피우기로 한 거죠. 실제적으로 수 십 기루의 하우스를 만들고 그 안에다 불을 피웠죠. 관광객들은 군항제에 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죠. 감탄하기 보다는 다들 화가 났어요. 날씨가 차서 벚꽃이 안 피었다 그래서 그것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사람은 없다 그거죠. 근데 그것을 비니루를 씌우고 불을 피우는 순간, 사람들에게서 봄을 빼앗아가 버린 것이죠. 봄은 봄다워 봄이죠. 벚꽃은 봄의 햇살의 사랑을 받으면서 피어나죠. 그 사랑을 차단시켜 버린 거죠. 칭찬 받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욕만 먹었죠. 봄에 꽃이 피는 것은 흐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흐름 속에 있죠. 과거라고 하는 것도 흐름이고,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흐름이고, 앞으로 우리가 영접해야 할 미래도 흐름 속이죠. 그 흐름에서 보면 시간과 공간은 동시적으로 존재하죠. 시간과 공간이 함께 제각각, 제각각 함께 있는 거죠. 우리는 흐름 속에서 붓다를 만나죠. 우리는 흐름 속에서 다르마의 문을 지나가죠. 중생의 강과 붓다의 강은 만나서 흐르죠. 만나서 함께 흐르는 겁니다. 제각각 흐르기도 하죠. 제각각 흐르고 함께 흐르는 것이 강입니다.

 

우리는 하나 됨을 강조하죠. 하나 됨은 전체주의일 뿐입니다. 하나 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가 돼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함께, 제각각, 제각각, 함께 있는 것입니다. 붓다의 강과 중생의 강이 만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위가 분명하다고 하는 말을 쓰죠. 중국의 경수와 위수는 그 합류지점에서 분명하게 알 수가 있기 때문이죠. 경수는 맑고 위수는 황토죠. 요거는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확인해 봐야 하는 이유는 경수가 맑은 건지, 위수가 맑은건지, 요새는 기억장치가 이상이 생겨가지고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간에 경수와 위수는 하나에 강은 황토 빛이고, 하나에 강은 맑은 물이라는 거죠. 그래서 만나서 흘러도 분명히 선이 쫙 갈리죠. 그래서 보면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경위가 분명하다고 하는 말이 나왔죠. 그 강이 아주 멀리 멀리 흘러가면서 함께 흐르게 되죠. 함께 흐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가 되느냐, 하나가 아니냐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이죠. 반드시 섞어야 될 필요가 없죠. 섞이려면 인위적으로 뭔가를 써야죠. 과자를 만들 제 기름은 섞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화제를 쓰죠. 기름이 섞여 들어가도록 유화제를 쓰죠. 그것은 인간의 몸에 지금 당장에는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은, 건강에 해롭다고 하는 것은 알려졌죠. 섞이려면 반드시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붓다의 강과 중생의 강이 함께 흐르되, 하나의 강이 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함께, 제각각이라는 얘기이죠. 제각각이지만 동시에 함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여기에 하나라고 하는 개념은 붙지 않습니다.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죠. (청연선우님께서 이 대목에 핸폰(스마트폰임)네이버 검색을 통해 경수가 맑은 물이라고 말씀하심. 역시 문명의 이기는 좋은 것이여^^)스님의 말씀...벌써 맑은 물 같잖아요. 경~(모두들 웃음)

 

붓다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흐름에 드는 것이라 하셨어요. 흐름에 든다고 하는 것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흐름에 드는 것이지 흐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강은 흐르기 때문에 강이죠. 부처님은 마음도 흐른다고 했어요. 흐르기 때문에 마음이에요. 강이 흐르지 않고 마음이 흐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강이 흐르지 않으면 죽음의 강이죠. 마음이 흐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은 생명을 낳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마음은 행복을 낳죠.

 

오늘의 주제가 강입니다. 강에서 살려면 반드시 흐름을 타야 된다는 거예요. 강에서 흐름을 타지 않으면 강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오직 강에서는, 흐름을 타는 자만이, 강의 지배자가 되죠. 강의 지배자는, 강의 흐름을 타는 사람입니다. 이 중생계의 지배자는, 흐름을 타는 사람이에요. 흐름을 올라타는 사람 그 사람이 중생계의 지배자입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린 것은 물레가 흐르기 때문이죠. 돈다고 하는 것은 흐른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구에서 두 눈 뜨고 큰 소리 치고 장바닥에서 삿대질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구가 흐르기 때문이죠. 지구가 흐르지 않으면 우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죠. 지구가 흐르는 것에 어느 누구도 흐름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7ㆍ80년대에 얼빠진 사람들이 있어서 지구에 축이 바로 선다고 주장했죠. 지구에 축이 바로 서면 서해안이 천 리가 육지가 되고 동해가 백리가 침수가 되는 데 어떤 얼빠진 사람은 82년도에 그렇게 될 거라고 했죠. 참 답답한 사람들이죠. 지구에 축이 바로 서면 서해안에 천리의 육지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파멸하겠죠.

 

흐름을 막지 말고, 그대로 흐르게 두시죠. 그리고 우리는 그 흐름을 올라타서 그 흐름과 함께 가면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마, 오늘의 강론에 질문이 있으시면 하시면 됩니다. 뭐, 다 흘러가 버려서 질문하실 게 없으신가요? 그러며는 앉아서 마음의 흐름을 한 번 올라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흐름에 올라타서 한 번 다르마의 세계에 가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