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6년 20일
타자화된 나 (또는 아름다운 만남 2) 오늘은 공지사항을 먼저 전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오신 날은 오셔 가지고 우리 할머님들을 좀 보살펴 주세요. 아이 뭐 딱 생각같아서는 부처님오신 날이고 뭐고, 문 딱 닫아걸고 있고 싶은데... 아이고 마, 요새 부끄럽고, 솔직히 속에서 뭐가 막 치밀어 오르고, 요새 가끔 그래요. 참 뭐라고 딱히 할 말이 없네. 오늘 얘기는 지난 주 한 강론을, 내가 다시 오늘은 해석하는 날입니다. 저먼저께 좀 불충분게 있는 것 같아서. 지난 주 내가 '타자화된 나'라는 얘길 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12년만에 고향인 카빌라국에 돌아오죠. 아버지인 숫도다나와 양모인 마하파자파티는 너무 기뻤어요. 세상에서 붓다라고 칭하는 그가 12년만에 돌아왔기 때문이죠. 너무 기뻤기 때문일가요. 그 기쁨은 실망과 슬픔으로 바뀌었죠. 12년만에 돌아온 붓다는 궁안에 들어오지 않고, 바이샤와 수드라가 머무는 곳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제자들과 탁발하면서 지냈죠. 어느 날 왕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에 청했죠. 그랬더니 그제서야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궁에 왔어요. 왕은 기쁜 마음으로 성공한 아들을 위해서 음식을 올렸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음식을 올렸죠. 그리고 부처님은 그 음식을 드셨고.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왜 제자들을 데리고 궁에 머물지 않고,그 곳에 머무냐? " 고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내가 머물 곳은 이 곳이 아니라 그 곳이다" 고 말이죠. 그러자 숫도다나는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죠. 이렇게 말했어요. "너는 지금 우리의 종성과 우리의 가문과 나를 능멸하고 모욕하고 있다. 너는 왜 고귀한 사람인데 그 곳에 머물고 있단 말이냐? 그것이 나를 능멸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래서 붓다는 이렇게 답했죠.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아들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생각하는 12년의 아버지의 아들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저는 12년의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 곳에는 그는 없습니다. " 왜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답을 하고 있을까요? 나는 지난 주에 '타자화된 나'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춰진 그 사람이 나냐?고 물었었죠. 거울 속에 비춰진 나도 타자화된 나라고 그랬어요. 부처님이 왜 이런 표현을 쓰시냐며는, '타자화된 나'라는 것은 '변화된 나'라고 하는 뜻이예요. 12년전 고타마 시타르타가 숫도다나왕의 아들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숫도다나왕의 아들인 것은 틀림없지요. 그러나 붓다가 얘기했듯이 12년의 고타마 싯타르타는 그 자리에 없습니다. 이미 그는 타자화된 나니까요. 타자화된 나라고 하는 뜻은 변화된 나라고 하는 뜻이예요. 이 사람이 나와 동일인가 나와 동일인이지 않은가? 우리가 한 번 생각을 해보죠. 견백동이(堅白同異)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날, 우리가 독서토론회에서 이야기했던 것인데, 중국의 논리학의 아버지 공손용은 견백동이라고 하는 논리를 세웠죠. 견백동이라는 말을 지금 보통 궤변을 의미하는 말로 쓰고 있죠. 근데 이것은 공손용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논리 구성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하는 말이지, 그것은 궤변이 아니예요. 공손용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면, 견석과 백석은 하나의 명제를 세울 수도 있고, 두 개의 명제를 세울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동이(同異)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명제라고 하는 뜻이고, 이(異)라고 하는 말은 두 개의 명제라고 하는 뜻이예요. 자, 한 번 보자구요. 견석이라는 것이 뭐를 말하느냐면, 견석은 굳은 견자 단단한 돌이라고 하는 뜻인데, 그 단단한 돌이라고 하는 것은 불특정한 거예요. 거기서 말하는 견석은 석영(石英)을 뜻하는 말이예요. 석영 아시죠. 우리가 보통 수정이라고 하는 거. 그리고 백석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석영이예요. 백석의 색깔이 희기 때문에. 수정이 하얗잖아요. 그러니까 백석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견석과 백석은 하나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의 명제를 세울 수가 있죠. 그리고 견석은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석영이 가지고 있는 그 단단한 경도를 뜻하는 거예요. 그래서 견석이예요. 석영의 경도는 7 내지 7.5 정도 됩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10이예요. 광석 중에서 가장 경도가 높은 것이 다이아몬드예요. 그래서 경도가 10이고, 석영의 경도가 7~7.5 정도 됩니다. 그리고 루비, 사파이어, 에머랄드 그런 것들은 그 중간 단계 한 8이나 9정도 가는데, 석영은 경도가 약해서 보석이 아니예요. 7이나 7.5 가지고는 경도가 약하기 때문에 보석이 못 돼요. 그래서 석영은 돌 취급 받죠. 그래서 견석이라는 것은 뭐냐면, 석영의 그 단단한 성질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백석이라는 것은 그 석영이 가진 색깔을 말하는 거고. 그러기 때문네 견석과 백석이 하나기 때문에, 하나의 명제를 세울 수 있지만, 그 석영의 단단한 성질로 보면 견석이기 때문에 하나의 명제를 세울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백석이라는 것은 흰 색깔이기 때문에 그 백석이라고 하는 명제를 세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견백동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의 명제를 세울 수도 있고, 또 두 개의 명제를 세울 수도 있다. 견석과 백석은 비석이다. 견석과 백석은 돌이 아니다라고 주장을 하걸랑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단단한 성질과 흰 빚깔이라고 하는 것은 돌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의 명제도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공손용이 주장하는 거는 그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논리학에서 명제가 서느냐/ 안 서느냐? 뭔 얘기를 하냐면, 개념의 문제를 얘기하는 거예요. 석영이다? 단단하다? 백색이다?하는 것은 개념의 문제예요. 자, 우리가 한 번 보자구요. 타자화된 나와 과거의 나는 동일인이예요. 그래서 하나의 명제예요. 그렇죠. 그렇지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같으냐? 특히 변화된 나가 같으냐? 라고 한다면, 같다고 우리가 이야기하기 어려워 져요. 그래서 두 개의 명제가 성립이 돼요. 변화된 나라고 하는 것이 뭐냐 이 말이예요. 결국은 내 개념의 변화를 뜻하는 거예요. 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보고, 듣고, 맛 보고 하는, 이 시각, 청각, 촉각, 미각, 이런 것을 통해서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들이죠. 우리가 알아차림을 통해서. 위빠사나에서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말을 써요, 싸티. 우리가 알아차림을 통해서 바깥에 있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 말이예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게 저장되죠. 그걸 우리가 의식이라고 그러죠. 즉 개념화된다는 말이예요. 개념화되게 되며는 어떻게 돼요? 이 개념화된 것이 알아차림을 다시 통제하게 되는 거죠. 그렇지 않은가요?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이 저장되어 개념화되게 되면,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개념화됨으로써 주인 노릇을 딱 하게 돼요. 그러면서 알아차림을 지배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재미가 있어요. 뭔 재미가 있느냐며는, 수요일 날인가요? 비온 날? 수요일날 왔나? 목요일날 왔나? 아이고마, 요새는 깜빡깜빡 해요. 수요일 날인가요. 내가 법당에 왔는데, 놀러 왔는지, 왜 왔는지 몰라 가지고, 그냥 내려 갔다가, 생각이 나서 다시 올라오고 그래요. 이런 현상은 도가 깊어지면 그래. 그 날 방에 앉아 있는데, 멀리서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가까이 달려오기 시작해요. 그래서 머리 위에서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라구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여기는 여기는 양철지붕이라 가지고 도둑비도 속이지 몬해. 다 알아요. 후두둑 소리가 나니까. 그래서 비가 쏟아 지길래, 아! 비 구경하면서 차나 한 잔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사실 참, 비 구경 좋아해요.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 모습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연기의 가르침을 시각화하는데는 가장 좋걸랑요. 물방울 하나와 전체 물방울이 유기적으로 떨어지죠. 거기에는 하나와 전체라는 구별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그래, 문을 열고 딱 나왔는데, 얼레? 비도 있지만 쏟아지는 건 우박이었어요. 비가 쏟아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내 경험이 개념화된 거예요.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그 날 우박이 쏟아졌던 걸 모르고, 단지 비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 날 쏟아진 것은 빗방울도 떨어졌지만, 우박이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이라는 자체가 이와 같애요.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죠. 네가 보았다고 하는 것, 네가 들었다고 하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가 있다는 거예요. 네가 봤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네가 봤어도 그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내가 우박이 떨어졌는데도 문을 열지 않았다면, 기억 속에 저장된 것은 비예요. 그러나 바깥에서 떨어졌던 것은 우박이죵. 이 개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렇게 불확실해요. 그러면 변화라는 것이 뭐냐? 변화된 나라는 것이 뭐냐면, 이런 불확실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제거된 거를 말해요. 내가 전 먼저께 재해석과 재구성이라고 하는 말을 썼던 건 그거예요. 결국은 우리의 의식이라고 하는 거, 뭐 의식이나 개념이나, 관념이나 이게 다 뭐, 철학사전에서는 같은 뜻으로다가 쓰니까. 우리가 그것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변화가 일어나거든요. 그러면 그 변화가 일어난 것이 뭐냐면, 변화된 나예요. 그러면 새로운 사람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게 잘 안 일어나걸랑. 왜 잘 일어나지 않느냐며는 변화라는 것이, 큰 변화와 작은 변화라는 것이 있단 말이예요. 큰 변화가 있고, 작은 변화가 있는데, 우리는 작은 변화는 매일 일어나요. 그런데 큰 변화는 잘 일어나지 않아요. 왜 큰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느냐며는 큰 변화라고 하는 것은 변이의 단계가 와야 큰 변화가 오걸랑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화라고 하는 것은 변화의 동일성이예요. 변화가 항상 동일성을 갖죠. 근데 큰 변화라고 하는 것은 비동일성이예요. 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대칭의 관계죠. 비동일성은 비대칭이예요. 대칭이 깨져야 비동일성이 오걸랑요. 대칭이 깨져야 비대칭이 되는데, 비대칭이 되어야 새로운 세계가 형성이 되잖아요. 맨날 대칭이 되면 어떻게 돼요? 아, 맨날 머리박기 하고 있으면, 변화가 없잖아요. 머리박기에서 떨어져야 다음의 행동이 나올 거 아니예요. 그게 비대칭이라 말이예요. 머리박기가 떨어지면, 그게 비대칭이라 말이예요. 그래야 다음 행동이 나온단 말이예요. 그러나 우리는 항상 같은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변이가 안 일어나요. 내가 봤다, 내가 들었다라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오해일 수가 있어요. 우리가 이런 경험 많이 한다고요. (아! 현수 반가워!) 변이가 일어날려면, 두 가지 조건이 성숙되야 되걸랑요. 첫째는 외부의 자극이예요.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내부에서의 호응이 있어야 되요. 내부의 호응.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호응이 있어야 변이가 일어나고, 변이가 일어나야 변화가 생기는데. 우리는 개념이라는 것 자체에 묶여 있으니까 변이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외부에서 자극을 줘도 높이높이 담벼락을 쌓고 있으니까 그게 없는 거예요. 내 저 먼저께 자의식의 성을, 성벽을 해체애야 된다는 말도 그 뜻이예요. 다른 것 아니예요. 내가 전에 기억의식을 잘라야 된다, 특히 나쁜 기억의식을 발라 버랴야 된다는 말도 그 말이예요. 내가 여러 가지 단어와 용어를 쓰고 있지마는 그 본질적인 의미는 항상 같아요. 그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개념이란 말이예요. 기억이 개념을 만드니까. 기억이 없는 개념은 없걸랑요. 그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을 지각하고, 인식하는데 주인 역할을 하는데, 거기에 대한 변이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변화된 나라고 하는 것이 올 수가 없는 거예요. 큰 변화가 안생긴다는 거예요. 작은 변화라는 것은 계속 생겨요. 내가 원하는 만큼의 큰 변화가 생기지 않는거지. 큰 변화라고 하는 것은 그 대칭이 깨지면서 생기는 거 걸랑요. 그 동일성이 깨지면서 큰 변화가 온단 말이예요. 부처님께서 무상을 얘기하는 것도 그거고, 무아를 얘기하는 것도 그거예요. 무아라고 하는 것은 타자화된 나를 뜻하는 말이니까.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변화의 비동일성을 이야기해요. 만약에 변화라고 하는 것이 동일성을 갖게 되면, 우리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왜? 항상 같기 때문에. 동일성이라는 것은 항상 같기 때문에 아! 똑같은 붕어빵 틀에 붕어빵을 구웠는데, 아참 말이 이게 좀 엉겼습니다. 붕어빵 틀에다가 빵을 구우면, 다 붕어빵이죠. 붕어빵틀에 빵을 구웠는데, 아니 다른 빵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아, 이해하세요, 내가 성질이 급해 가지고. 이~~ 제 생각과 단어가 동시에 나오면서 이게 엉켜요. 우리가 같은 사유를 하면, 동일적인 시각과 동일적인 청각의 지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뭐냐? 결국은 우리가 그 의식을 깨트리지 않는한, 우리가 그 동일성과 그 대칭을 깨트리지 않는한, 우리는 항상 그 속에서만 도는 거예요. 뺑뺑이를 도는 거죠. 해마다 음력 3월이 되면 해인사에서는 팔만대장경 봉대 법회를 하는데, 거기 가면 마당에다 해인도를 떡 그려 놨죠. 아 그 해인도 얼마나 복잡한지. 그 뭐, 뺑글뺑글, 완전히 미로처럼 되어 있어요. 거길 돌게 되어 있어요. 그래도 해인도는 들어가는데와 나오는 데가라도 있지, 누군가가 장난을 친다고 들어가는 입구와 나오는 출구를 석회로다가 연결시켜 놔 보세요. 하루 종일 돌아도 못 나오죠. 우리가 변화된 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거예요. 변화된 나는 곧 깨달은 나예요. 뭐 다른 것 없잖아요. 내가 깨달았다 그래 가지구 밥 안먹고 사는 거 아니걸랑. 내가 깨달았다고 해서 뭐 날라다는 것 아니잖아요. 아니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날라 다니시기는 했어. 그런 면에서 보며는 나는 깨달았다고 주장 하는 분들한테 항상 이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리죠. 한 번 날라 보시죠. 우리가 깨달았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 가요? 의식의 세계가 변하죠. 우리가 가끔 이런 거 경험하지 않으세요? 정말 잘 아는 사람인데, 내가 저 사람을 알고 지내던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 있지 않아요? 아, 부부지간에도 그럴 때 있지 않으세요? 아주 낯설게 느껴질 때. 저 남자하고 내가 30년째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세상에! 감춰진 저런 면이 있었네.라고 하는 아주 낯선 느낌. 아니 내가 저 여자랑 40년을 살았는데, 내가 40년을 같이 살았던 그 여자는 어디 가고, 저 여자가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라고 하는 뜻밖의 낯선 느낌. 그런 것들이 왜 오겠어요. 사실요. 제가 가끔 말씀드리지만, 나 자신을 가장 모르는 거는 나예요. 나는 몰라요. 근데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의외로 납니다. 나름대로 민감해요. 아주 예민한 사람들은요, 아주 감성적인 사람들은 눈에 아이 라인만 살짝 변해도 탁 알아차려요. 어머, 자기 아이라인이 변했네. 아주 그 정도로 민감한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부인이 나처럼 머리를 홀딱 깎고 와도 몰라. 며칠 있다가, 아 헤어스타일이 본래 그랬었어? 이런 거죠. 우리가 어떤 낯선 느낌 같은 경우는, 사실 그 사람의 의식이 일정 부분 바뀌기 때문이예요. 실제적으로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면, 세상에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는 것이 다르게 느껴지고, 달리 보여요. 결국은 타자화된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내가 변화가 일어난 것을 말해요.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를 지향하는 동물이예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길 원하잖아요. 행복하게 살려며는 기존의 대칭이 깨지지 않는한, 그 동일성이 해체되지 않는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걸랑. 왜? 항상 같기 때문에. 결국은 그 대칭과 대칭과 대칭이 깨지면서 비대칭이 되고, 그 동일성이 해체되면서 비동일성이 될 때, 우리는 정말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알고 보며는요, 우리의 감동이라는 것도,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도 기존의 그 무엇이 깨진 걸 말해요. 그런 것 아니예요? 우리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내가 우울 모드로다가 가고 있었는데, 아니 내가 그렇게 짝사랑하던 그 남자가 꽃을 들고 쫙 나타난다? 완전히 깨졌잖어. 우울 모드의 대칭이 깨지잖아요. 그러면서 어떻게 돼요? 비대칭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대칭이 생기잖아요. 그렇지만 이 대칭과 이 대칭은 다르걸랑. 우울 모드의 대칭과 꽃을 받아들었을 때 대칭은 같은 대칭인데 달라요. 이 여자와 이여자는 다른 여자예요. 같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개념이지, 같은 게 아니예요. 아까 공손용의 견백동이에 대해서 얘기했었는데, 공손용이 내세우는 명제라는 것도 논리적으로 규명하면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거예요. 근데 재밌는 거는 우리의 의식의 변화는 논리적으로다는 일어나지 않아요. 이건 비논리예요. 어떠한 논리의 명제를 세워더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뭐냐? 오직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죠. 그걸 뭐 감성의 변화라고 해도 좋고, 감정의 변화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표현해도 관계없어요. 다만 중요한 거는 새로운 무언가의 의식이 형성 되었다는 거죠. 즉 변화가 일어난 거죠. 한 마디로 개구리가 꼬리를 떼어낸 거죠. 아니, 참, 올챙이가. 개구리는 꼬리가 없으니까. 오늘은 계속 그냥, 그냥 이대로 가는 거죠. 우리의 의식의 변화라는 것이 결국은 뭐예요? 결국은 우리가 수행이라고 하는거,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내 의식을 재해석하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본다 그러잖아요. 마음을 본다고 하는게 뭐예요? 내 의식을 본단 말예요. 그러면서 내의 식을 재해석하잖아요. 그러니 재해석이에요. 그럼으로써 어떤 현상이 일어나요? 다시 구성하죠.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점과 선이잖아요. 점이 있고, 그 점에 선이 연결되어 있고. 그리고 그 점과 선이 완벽하게 구성되면, 그거를 우리가 면이라고 그러잖아요. 그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체(채?)라 그러고. 근데 만약에 그 점과 점의 선을 다 제거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점에서의 선을 제거하며는 면과 체라는 것은 구성되지 않아요. 결국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은 변화된 나라고 하는 건 없는 거예요. 변화된 나라고 하는 것은 뭐냐며는 기존의 내가 뭐,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어머니는 만두, 칼국수 이런 걸 참 잘하셨어요. 우리 어머니 만두 빚는 방식은 국수를 밀듯이 밀어 가지고, 주전자 뚜껑으로 찍어내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나머지는 다시 뭉쳐. 뭉쳐가지고는 다시 또 찍고. 나중에는 이제 그걸로 국수도 하고. 본래는 만두를 만들려고 그걸 해가지고 찍고, 그 나머지는 뭉쳐서 찍고, 뭉쳐서 찍고. 나중에는 국수가 된단 말이예요. 그 과정이 뭐예요? 재구성이예요, 알고 보면. 재구성이잖아요. 다시 구성하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지마는, 우리 어머니가 절에서 뭔 일만 일어났다 하면 몇날, 몇일, 잠을 못잤다 그러더라구. 혹시 아들이 거기 가가지구 으쌰으쌰 하는 게 아닌가 해가지구. 마, 요새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며는... 아이고, 참, 얼마나 슬프셨겠나. 우리 아들은 돈이 없어서 거기도 못 끼고. 얼마나 슬프셨겠어. 변화된 나와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며는 결국은 무상과 무아라고 하는 것은 변화된 나를 구성하는 걸 말해요.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 내가 지난 주 강론한 것을 오늘 해석하는 이유는 이 타자화된 나라고 하는 개념을 우리가 이해해야 돼요. 그래야만이 변이가 생기게 되고, 변이가 생겨야 변화가 일어나걸랑요. 우리가 다 아는 다윈은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을 이야기하죠. 자연 선택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외부에서의 자극이잖아요. 성 선택이라는 게 내부에서의 호응이예요. 외부의 자극과 내부에서의 호응이 있어야만이 변이가 일어나고, 그래야만이 변화라고 하는 것이 생긴단 말이예요. 진화라고 하는 말이 사실 변화라고 하는 말이니까. 결국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죠. 내 삶을 재해석하고, 그 재해석을 바탕으로 재구성 해야죠. 그런데 우리가 이게 잘 안되는 이유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견백동이, 아! 그거 궤변이야. 왜? 그렇게 배웠으니까. 빗방울 떨어지네. 아니거든. 지금 우박 떨어지고 있거든. 왜 우리가 이런 실수를 범하냐며는 우리가 어떠한 개념이 정립이 되면, 그것이 고정화 되걸랑요. 고정화되면 선입견이 되어서, 어떠한 것을 봤을 때, 동일한 거로다 해석해 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속담 중에 자라보고 놀랜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랜다 라고 하는 말도 뭐냐면, 자라보고 놀랬기 때문에 비슷한 물체가 있으니까 그것은 자라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고 아예 지레 겁을 먹고. 우리의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내가 본 것도 잘 안 믿어요. 내가 내가 본 것도 잘 믿지 않는 것은 내가 도깨비 도로를 한 번 갔다온 이후로다는, 보여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진실이 아닌 경우가 있구나! 내가 어떤 스님하고 제주도엘 갔는데, 내리라고 그래. 제 아는 스님이 제주도가 고향인데, 옛날 그 스님 집에 80년대에 갔었는데,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갔어요, 갔는데 차에서 내렸어요. 그러더니 한참 둘러 보더니, 아! 그 스님이 뒤를 돌아 보면서, 어 저차가 오르막기로 굴러가네 하면서 소리소리 질러서 보니까, 차가 진짜 막 굴러 가는거예요. 난 놀래 가지고 막 쫒아가고. 하! 강원도 촌사람, 제주도 섬 사람이 희롱한 거예요. 그 도로가 본래 그런 도로라두만. 시각적인 착각에 의해서 마치 차가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것인데, 언덕배기로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가 실제적으로 내가 믿는 것도, 내가 본 것도 100% 그거라고 확신하기 어려운데, 보지 않은 것이야 말할 게 뭐 있겠어요. 내가 비라고 들은 것도 나가 보니 우박인데, 하물며 들려오는 말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어요. 우리가 한 번 생각을 해 봐야죠. 정말 내가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내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마는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거라고 봐요. 의문을 갖고, 그 의문에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 의문을 갖는 거예요. 그것이 진실일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의문을 갖고 한 번 물어보는 거예요. 너 진실이냐? 우리가 거울이라고 하는 것은 반영이걸랑요. 사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보는 거는, 유일하게 나를 타자화시켜서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거울 밖에 없기 때문이예요. 스스로가 내면 속에서, 나를 타자화시켜서 한 번 물어 봐야 돼. 네가 믿고 있고, 네가 확신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진실이냐? 네가 본 것도 진실이 아닐 수가 있고, 네가 들은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어떻게 네가 그걸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래서 부처님은 그건 마야(Maya)라고 그랬죠. 환상, 미망(迷妄). 부처님은 그걸 깨라는 거에요. 그걸 깰 때 네가 진실한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변화는 항상 일어나요. 작은 변화. 그렇지만 큰 변화는 변이라고 하는 그 대칭이 깨지는, 그리고 동일성이 해체되는 그런 것이 없으면, 오지 않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외부의 자극은 내부의 호응이 없으면, 소용이 없어요. 아무리 창 밑에서 세레나데 불러봐요. 아무리 불러도 그 남자 억세게 싫어하는 아가씨는 그 소리가 악마의 소리로 들린다니까. 그 남자 좋은 아가씨한테는 그것이 아름다운 천상의 목소리로 들리지만, 싫은 사람은요, 저기 웬 악마가 와서 소리지르나? 그렇게 들려요. 왜 그러냐면, 그가 싫기 때문에. 이건 개념의 문제이고 의식의 문제니까. 타자화된 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변화된 나예요.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내가 만드는 거예요. 내 내면에서 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내 내면에 그 변화라고 하는 인자가 일어나지 않는한, 외부에서 아무리 망치 두드려 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중국 선사들이 이렇게 표현하죠. 쥐 이빨이 천년 묵는다고 상아되랴? 쥐의 이빨은 천년이 되어도 쥐 이빨이라는 거예요. 상아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쥐도 성선택의 변이가 일어나면, 자연선택에 의해서 상아가 되지 않지만, 상아처럼 가치가 있는 이빨은 만들 수가 있죠. 우리가 옛날에는 사촌 형제들하고 같이 살았다고 그러잖아요. 우리 사촌 형제들, 고릴라, 침팬지, 보노보노, 이 사촌들하고. 그런데 우리가 변이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서 인간이 되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아, 물론 이거는 믿거나 말고 나죠.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변화된 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 타자화되 나라는 거예요. 타자화되지 않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변화라고 하는 것은 내부에서 폭발한다. 즉 삶의 재해석과 재구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쓰는 삶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은 우리 삶이 의식을 만드는 거지요. 삶은 내가 태어나서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거를 뜻하니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뭐 오늘 이야기 중에 혹시라도 뭐 질문할 게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끝내겠습니다. 잠시 좌선을 하고... 우리 한 번 병아리를 한 번 만들어 보죠.
2011도우회정기총회 |
분위기 넘치는 추억의 가요 모음
| 01.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74) / 이장희 02. 찬 비 ('78) / 윤정하 03. 빗 물 ('76) / 채은옥 04. 찻 잔 ('79) / 노고지리 05. 아쉬움 ('76) / 김미성 06. 고목나무 ('76) / 장욱조 07. 당신의 마음 ('73) / 방주연 08. 석 별 ('74) / 홍 민 09. 못잊어 ('78) / 패티김
10. 조약돌 ('75) / 박상규 11. 새끼손가락 ('79) / 정종숙 12. 그림자 ('78) / 서유석 13. 눈물속에 피는 꽃 ('79) / 한영애 14. 마른잎 ('72) / 장 현
15. 봄 비 ('79) / 이은하 16. 옛생각 ('77) / 조영남 17. 당신만을 사랑해 ('77) / 혜은이 18.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76) / 최백호 19. 내 님의 사랑은 ('74) /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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