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적 평온(動的 平穩)|…… 혜천스님설교

2019. 7. 27. 23: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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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 2556년 5월 27일

동적 평온(動的 平穩)

 

 

오늘 주제는 동적 평온(動的 平穩)입니다.

 

요새 수요일날 <사벽의 대화>를 읽으면서 토론을 하는데, 거기에 보면 고행 편이 있어요. 고행편을 읽으면서 내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고행 편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기보다는 그 전편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보통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을 벗어나기 위해서 고행을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그런데 고행을 한다고 해서 욕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죠. 정말 고행을 하면 욕망을 떠날 수 있을까? 욕망과 고행은 대치점인데, 정말 우리가 고행을 하면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인가?

 

지난 주 목요일 한겨레신문 칼럼에 정석구씨가 수행자는 고행자라고 하는 취지의 칼럼을 실었더라구요. 과연 수행이라는 것이 고행이라고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보면, 부처님이 고행을 그만 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죠.    

 

고행을 한다고 해서 욕망을 벗어날 순 없습니다, 사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인데, 대상을 끊기 전에 어떻게 그 대상을 벗어날 수 있겠어요? 근데 우리는 언제나 대상 속에 있껄랑. 부처님께서 욕망의 속박과 집착을 이야기 하죠. 속박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욕망을 제거하거나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건 무슨 이야기냐면,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거죠. 자유로운 거!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지배를 당하는 겁니다. 속박 당하고. 우리가 욕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오해를 한다고 볼 수가 있죠. 인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욕망입니다. 존재한다고 하는 자체가 욕망입니다. 내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인간의 본성은 명예와 권력과 돈과 사랑을 추구하죠. 그걸 추구한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욕망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건 욕망이라기보다는, 추구할 것인가 안 추구할 것인가는 서택의 문제죠. 내가 그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욕망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없고,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죠.

 

어떻게 보면, 말의 궤변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그거는 선택의 문제예요. 우리는 내가 소유해 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한 갈망이 있습니다. 내가 소유해본,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갈망이 그렇게 강하진 않습니다. 권력을 얻지 못한 사람은 권력을 얻고 싶어 하죠. 명예가 없는 사람은 명예를 얻고 싶어 하죠. 재물이 부족한 사람은 재물을 얻고 싶어 하고,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을 얻고 싶어 하죠. 근데 그것이 충족되어 있는 사람은 특별히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나면, 충족되어 있기 때문이죠.

 

중국 청나라 황제 순치제(順治帝)가 출가를 하고 싶어 했죠. 청나라 황제 순치제는 만주라고 하는 지역을 벗어나서, 중원 땅을 지배한 청나라 최초의 황제죠. 그러나 그는 출가해서 스님이 되고 싶어 했어요. 그의 말년에, 아니 말년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까. 내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스물 여듧인가 인가 서를 둘 인가에 죽었을 거예요. (순치제는 순치 18년 1661년 천연두에 걸려 24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는 아버지가 죽자, 어린 나이에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죠. 인조에게 치욕을 안겨줬던 청태종이 그의 아버지였어요. 그런데 청태종이 일찍 죽었어요. 그러자 그는 아주 어린 나이에 8살엔가 황제가 되죠. 

 

그는 중원 땅을 정복하고, 옥림 통수((通琇)라고 하는 스님을 만나죠. 그로부터 수행을 지도 받고 그는 황제 자리를 그만 두고 싶어했어요. 그리고 스님이 될려고 했죠. 근데 절대권력자 황제도 할 수 없는 것이 뭐가 있냐면, 자기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첫째 조정에서 허락을 안 하고, 둘째 종실에서 허락을 안 했죠. 그래서 그랬는지 순치제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요. 아주 젊은 나이에. 그의 아들 강희제가 13살에 황제가 되었던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만들어진 전설이 순치제가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순치제가 출가하면서 읊었다는 시도 있고. 그렇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예요. 황제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다 그래서 한족이 복명을 외치고 있는 그 와중에서, 궁밖을 벗어나서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겠어요? 설사 출가한다 할지라도 궁과 다를 게 없죠. 그가 머무는 곳은 군사가 이중 삼중으로다가 철의 성을 쌓지 않는한, 그는 안전하지 못할 테니까. 물론 한족이 죽이진 않죠. 그를 볼모로 잡으면 끝나죠.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순치제는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어요. 권력을 얻었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중국을 정벌했고, 당연히 황제니까 명예도 있고, 그가 그렇게 얻고 싶었던 그의 고모도 얻었죠. 순치제는 고모를 사랑했어요. 종실에서 그렇게 반대를 하는데도 고모를 후궁으로 들였죠. 우리가 보면, 이해가 안 가죠. 여진족은 그런 풍습이 있었던 모양이예요.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시동생과 결혼했죠. 재혼을 시동생하고 했어요. 시동생이 절대적인 궁권을 가지고 있었거든. 순치제는 어렸기 때문에 황제가 되기 어려웠어요. 힘 쎈 숙부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시동생과 재혼을 하면서, 그 조건으로다가 자기 아들을 황제로 즉위시켜 줄 것을 요구했어요. 그의 삼촌은 흔쾌히 그걸 동의했죠. 그의 삼촌은 참, 아들이 없었어요. 어차피 그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그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제위를 물려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조카이자, 순치제는 의붓 아들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는 황제가 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모든 걸 얻을 수 있었죠.  

 

그렇지만 어느 날, 그는 그가 그렇게 얻고 싶었고, 추구했던 걸 다 내려 놓고 싶어 했어요. 그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했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병들어 죽었어요.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절대의 권력자라고 하는 황제가 모든 욕망을 다 얻었는데, 그 욕망을 버리겠다고 하는 욕망은 얻지 못했어요. 

 

인간은 내가 얻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강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걸 얻고 싶어 해요. 고행을 해서 그것을 억누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죠. 물론 그걸 억누르는 것을 통해서, 그로부터 그거하는 분도 있겠죠.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지 몬합니다. 많은 분들이 초심을 잃는 이유는 그것은 억누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예요. 처음에는 강한 의지로 억누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가는, 언제까지 눌러 둘 수는 없어요. 

 

우리가 풀을 돌로 눌러 놓는다 그래서, 풀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돌을 치우면, 그 자리에 그 풀은 여전히 살아서 다시 돌아오죠. 요기 앞에 초롱꽃이 지금 폈는데, 초롱꽃이 있다가 그러께는 한 포기도 없었어요. 싹 사라졌어요. 그러더니 어느 날, 작년에 보니까 그 있던 자리에서도 다시 났지만, 이곳 저곳으로 퍼져서 나왔어요.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충족되지 않으면, 잠을 자죠. 잠을 잤다가 다시 일어나는 거죠.  

 

작금에 새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백양사의 그 스타들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눌러 놓는다 그래서 그것이 해결되지 않죠.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해요. 어느 날 고행림에서 자신을 돌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죠. 야위어진 몸, 혼미해진 마음. 그는 고행림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고, 고행림에서 남이 할 수 없는 고행을 했어요. 그런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그 고행을 철회하죠. 고행 끝에 얻은 것은 아사 직전의 몸, 그리고 혼몽한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로부터 그는 고행을 그만 두죠. 붓다는 그렇게 말해요. "지난 날 잠부나무 아래레서 나는 도리어 행복했었다. 그런데 오늘날 나는 더 피폐하구나!" 우리는 고행을 찬양하죠. 고행만이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고행으로 욕망을 제어할 순 없어요. 

 

부처님은 극단적인 고행을 보이는 자이나교도들을 붓다는 비판하죠. 그것응 세상을 속이는 거라고 그랬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정말 극단적이걸랑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죠. 옷도 안 입죠. 그야말로 불알 내놓고 그냥 다니죠. 머리는 깍지도 않습니다. 다 뽑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깍지 않아요, 뽑아요. 머리 한 번 뽑아 보세요.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그들은 뽑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걸 보면, 존경심을 표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붓다는 그것을, 육신을 학대하는 것의 일종이라는 거예요. 고행은 자신을 학대하는 거라는 거예요. 왜 붓다가 이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가 말하는 열반이라고 하는 것, 불교에서 지향하는 것은 열반이죠. 열반의 상태가 무엇인가요? 평온한 겁니다. 평온. 내 몸과 마음이 평온한 거. 근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뭘 오해하냐면, 그 평온 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하는 평온은 동적 평온(動的 平穩)이예요. 동적인 평온을 이야기 하죠. 왜 우리가 평온하지 못한 줄 아세요. 우리가 대상 속에 있기 때문이예요. 대상이 움직이면 나도 같이 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돼요. 대상은 움직이는데, 나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니까 평온이 깨어지게 되어 있죠. 세상이 다 변하고 있는데, 나만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세상이 변하면, 그 세상에 따라서 나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죠.

 

겨울이 오면 두꺼운 점퍼를 입어야 됩니다. 여름이 오면 반 팔티를 입어야죠. 대상을 따라서 변화한다고 하는 것은 그걸 말하죠. 그건 동적인 상태이깐. 보통 우리가 수행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뭐냐면, 어떤 한 상태로 유지하는 거로 생각하죠. 어떤 한 상태가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한 동적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얘기예요. 인간은 반드시 움직여야 됩니다, 생존해 있는 한. 그 움직이는 가운데에서의 평온, 그게 동적 평온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그걸 말하죠. 

 

우리가, 동적 평온이라는 것도 욕망에서 자유로운 것을 말하죠. 욕망을 부정하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욕망을 부정하기 때문에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죠. 부정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요? 부정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의 지배에 있다는 걸 뜻합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것을 긍정해야 돼요. 욕망을 긍정해야 됩니다. 욕망을 긍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비로소 욕망을 정면으로( 전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 지죠.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욕망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두려워 하면 그림자가 갈수록 커지죠. 그러나 욕망을 긍정하면, 그 욕망은 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작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욕망은 커지죠.

 

중국 역사에서 엄청난 인적인, 물적인 자원을 동원해서 건설한 것 중에 단 한 번도 자기 역할을 못한 것이 있다는 거예요. 속설에 달나라에서도 보인다고 하는 만리장성. 만리장성은요, 단 한 번도 외부의 적을 막아내보지 못했어요. 만리장성이 왜 외부의 적을 막아내본 적이 없는가?  만리장성의 그 문을 열어준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외부와 내통한 내부의 호응자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만리장성을 쌓아도, 소용이 없었어요. 만리장성은 발해만에서 저 신강성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명나라가 망한 이유는 장성을 쌓는데 너무 많은 인력과 물자를 소모했기 때문이라고 그러죠.

 

우리가 욕망을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우리 마음 속에서 쓸모없는 만리장성처럼 쌓이기만 하죠. 부처님은 고행을 그만두고, 고행을 비판했어요. 고행은 마치 육지에 놓여 있는 배와 같다고 그랬어요. 쓸모가 없다는 거죠. 근데 우리는 고행을 찬양하죠. 고행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예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살아있는한 먹어야 하고, 살아있는한 잠을 자야 하고, 살아있는한 휴식을 해야 됩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면할 수가 없어요. 부처님이 아나율 존자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죠. "아나율아! 사람은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어떤 농부가 왔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시죠. 사람은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동적인 평온이 중요한 것이지, 다리를 꼬고 평온을 얻는 것은 누구나 못하는 가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사벽의 대화>를 읽고, 그 분들의, 그 삶을 높이 평가해요. 그 분들이 논하는 것도 높이 평가하고요. 그렇지만 도토리 먹는 것 빼 놓고는 고행이랄게 뭐 있나? 대한민국 국민 중에 지금 고행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모두가 다 고행자 아닌가? 아직 코 밑에 솜털도 나지 않은 아이들이 하루에 열 여섯시간, 열 열덟시간을 학교로,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죠. 그거 고행 아닌가요? 고행이야 자신이 좋아서 하죠.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그것이 기꺼이 즐거워서 16시간, 18시간 투자하는 친구가 몇이나 되겠어요. 알고 보면, 강요에 의한 거죠. 

 

우리나라는 지금 고행국가입니다. 고행사회고요. 국가가 그렇게 부르짖는 성장, 개인이, 회사가 그렇게 부르짖는 성과, 그게 다 고행이예요. 성장만 하면 모든 사람이 누릴 것 같고, 성과만 올리면 모든 사람이 누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걸랑요. 대한민국 전체가 고행국가고 고행사회죠. 그들은 선택해서 고행을 하는데, 이들은 강요에 의해서 회유에 의해서, 성과라고 하는 회유에 의해서 그 고행을 강요받고 있죠.

 

우리가 한 번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자구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목적은 행복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되고, 행복하기 위해서 일해야 되고,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죠. 근데 마치 우리는 고행자처럼 살죠. 고행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 몬합니다. 자기만족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 조건만 되면, 그저 혼자서 얼마든지 도토리 먹고 3년 버틸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예요. 욕망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예요. 그것은 욕망을 부정하는 거예요.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 본성을 등지는 거예요. 즉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라 이 말이예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워서 부정해야 될 일이 아니라 긍정해야 할 일입니다. 

 

백양사 호텔의 그 분들이 비난받아야할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그들이 출가자라서요? 아니요. 그들이 출가라고해서 뭐가 다르겠어요, 인간인데. 출가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출가자가 다 성인은 아니잖아요. 그들이 어떤 동기로 출가했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 경허, 만공은 찬양하면서, 그들은 왜 비난하나?  아니 원효는 찬양하면서 왜 그들은 비난하나? 원효도 출가자로 보면, 빵점 아닌가? 버젓이 스님들이 그렇게 얘기 하지 않아요? 깨달음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다고. 그들이 윤리와 도덕을 초월해서 놀았잖아요. 도리어 엎드려 절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비난받아야 될 일인가? 나는 엎드려 절해야 될 것 같은데. 언제는 윤리와 도덕을 초월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그걸 왜 갑자기 욕하나? 그들이 비난받아야할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무슨 한 가지냐? 그들이 스스로 땀흘려서 그것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는 거. 본질적으로 그들의 잘못은 그들은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내가 땀흘려서 얻은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땀흘려 얻었다면,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할 순 있지만, 비난을 할 수는 없어요. 적어도 그들은 처자식이 없어서 처자식을 망치지는 않으니까. 아니 자기 한 몸 서울 역 앞의 지하도에 눕는다 그래서 그를 비난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은 자기의 선택의 끝이니까. 그렇지만 가족이 있다면 또 다르죠. 가족이 있다면, 잡아다가 주리를 틀어야죠. 왜? 자기 책임을 방기했으니까. 그들의 잘못이 뭐냐? 스스로가 땀흘려 얻은 것이 아닌 거를 썼기 때문이예요.    

  

고행으로써 욕망이 억눌려지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동적 평온을 얻어야만이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들도 한 때는 아마 높은 뜻을 가지고 뭔가를 하겠다고 뻐들적 댔겠죠. 그들이 초심을 지키지 못한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인 욕망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욕망을 부정할려고 하니까 그 욕망으로부터 속박을 당하게 되는 거죠.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동적 평온입니다. 욕망을 긍정해버리면 우리는 평온해 질 수가 있어요. 욕망을 부정해서는 안되요.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강한 자기 책임감을 수반해 오기 때문에.   

 

욕망은 자기를 발전시키는 자가 발전기와 같습니다. 강한 전류를 만들어 내죠. 태양이 뜨겁다고 해서 차양막을 치는 거와 같습니다. 욕망을 부정하는 고행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까지 그 차양막으로 태양을 차단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본질적으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무엇에 대해 이야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뭔가? 부처님이 고행을 그만 둔 메시지가 뭔가? 부처님이 왜 욕망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하는가?

 

얼마 전에 강론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좋아하는 것이 반드시 얻어지는 것은 아니죠. 즉 내가 욕망을 추구한다고 그래서, 즉 명예와 돈과 권력과 사랑을 추구한다고 그래서, 그것이 반드시 얻어지는 것은 아니예요. 부처님은 그걸 알으라는 거예요. 그걸 알면, 그것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골머리를 앓으면서까지 얻으려고 하지는 않겠죠.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얻지 못하면 어떻게 돼요? 좌절하잖아요. 절망하고. 또 어떻게 해요? 세상 탓이라고 그러잖아요.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100% 나의 탓만일 수는 없습니다. 왜? 대상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100% 대상의 탓이 아니라는 거예요.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이 맞물려 있는 거지요. 부처님은 그걸 잊지 말라는 거예요.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얻었을 때 방자하게 교만하지 말고, 얻지 못했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지 말라.   

 

청계(淸溪: 이명박의 호) 선생이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 아니 대통령 취임되기 전에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해요. 그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가득했었죠. 취임을 하면, 그의 임기 중에는 모든 것이 면책입니다. 제소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대한민국 법 자체가. 그래서 그는 그 날까지 뭔가가 불안했죠. 대통령이 되고서 비로소 그 불안감을 떨쳤죠. 옛날 동영상 찾아서 한 번 주목해서 봐 보세요. 취임 전과 취임 후에 그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동적 평온을 얻어야 됩니다. 동적 평온을 얻지 못하면, 한 순간의 평온을 얻을 수는 있지만,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은 기쁘고, 어느 날은 슬프고, 어느 날은 세상이 좁쌀만하게 보였다가, 어느 날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는 동적인 평온이 없기 때문이예요. 동적인 평온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 숨쉬는 겁니다. 

 

김구 선생이 즐겨 썼다고 하는 구절 중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요. "물고기는 거센 흐름을 거슬러서 헤엄치고, 큰 새는 역풍을 맞으면서 날아 오른다."(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 동적 평온이라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그 가운데서 평온한 거죠.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한문으로 활발발(活潑潑)이라 그러죠. 펄떡 펄떡 한다는 뜻이예요. 강한 어떤 힘을 상징하는 뜻이기도 하죠. 동적 평온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의 삶속에서 얻어지는 것을 말해요. 고봉정상에 높이 올라가서 고요히 있으면, 참 편안합니다, 사실. 뭐, 편안할 수 밖에 없어요. 첫째, 갤구치는 사람이 없으니까. 시비거는 사람이 없고. 

 

우리가 대상 속에 놓여 있더라도, 그 대상으로부터의 동적 평온이 유지가 되어야 돼요. 그게 유지가 안되면, 깨달음이니 뭐니 수없는 이야기를 하고, 설사 내가 부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예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을 제시했겠어요. 열반의 문턱을 밟아야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예요. 마음이 동적이 평온이 되어야 다르마의 세계에 들어가요. 그 다르마의 세계는 구원의 세계요, 행복의 세계예요. 붓다의 세계예요. 동적인 평온 은 오직 현실 세계에서 얻어지는 거예요. 현실 세계에서 얻어져야지, 고행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것은 마른 나무에 꽃이 피면 가능하겠죠. 혹시 죽은 나무에 꽃이 피며는 그게 가능해지리라고 믿으시면 돼요. 그러나 마른 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그건 가능하지가 않아요. 

 

내일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해요. 나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러 왔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일깨워 주시러 온 거죠.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아서죠. 우리가 주의깊게 관찰해보면, 일상의 삶 속에서의 동적 평온이 아니면, 그 평온은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동적 평온이죠. 항상 현실의 세계에서 동적 평온을 얻으셔야 돼요. 그래야만이 우리 삶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진정으로 자유롭고, 진정으로 누구로부터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낼 부처님 오신날 오셔서 좀 도와들 주세요. 아, 그리고 내가 여기 와 가지고 이런 말은 한 번도 안했는데, 내일 부처님 오신 날에는 두루두루 좀 모시고 오세요. 아무래도 내일 바깥 분위기가 추워서 혹시 안이 썰렁하며는 곤란하니까. 에, 오늘은 저 밑에 준비하고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죄선은 않겠습니다. 자 다 함께 합장하시죠. 다함께 합장하시고 기도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부처님께서 현실의 삶 속에서 동적인 평온을 얻으시라는 가르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현실 너머의 세계에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믿어 왔습니다. 현실 너머의 세계에는 진실은 없습니다. 진실은 오직 현실 세계에 있습니다. 이 현실 세계에서 저희들이 동적 평온을 얻어서,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에 간절히 기원하고, 기원합니다. 오늘 일심으로 기도하오니, 저와 저희 가족과 저의 이웃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동적 평온의 행복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내려 가시죠.) 

 
 
      << 넉넉한 가을에 듣는 노래모음 50곡 >> 01.가을비 우산속 - 최헌 02.가을 편지 - 최양숙 03.가을이 오기전에 - 이영숙 04.고독한 여인 - 김수희 05.고귀한 선물 - 장은아 06.고엽 - 오준영 07.과거는 흘러갔다 - 길은정 08.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박건 09.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 신정숙 10.그 여인 - 유상록 11.그냥 가세요 - 나훈아 12.그리운 사람끼리 - 뚜아 에 무아 13.그리운 생각 - 정미조 14.그리움만 쌓이네 - 여진 15.그림자 - 이영숙 16.그저 바라볼수만 있어도 - 유익종 17.기다리게 해놓고 - 방주연 18.길 잃은 새 - 권미경 19.꽃반지 끼고 20.꿈꾸는 카사비앙카 - 적우 21.나그네 - 김정호 22.나는 몰라요 - 옥희 23.나는 왜 - 유익종 24.나도 모르게 - 김진아 25.나를 두고 가려므나 - 김동아 26.낙서 - 한동일 27.낙엽이 가는길 - 홍세민 28.날이 갈수록 - 김정호 29.내 사랑 영아 - 휘버스 30.내일이 찿아와도 - 서울 훼미리 31.노을 - 한규철 32.눈물 한방울로 사랑은 시작되고 - 이유진 33.눈물이 보일까봐 - 나훈아 34.님을 위한 노래 - 오정선 35.님의 기도 - 이안 36.달구지 - 정종숙 37.당신은 나의 꿈이죠 - 선우혜경 38.당신은 몰라 - 최헌과 불나비 39.당신은 안개였나요 - 이미배 40.마로니에 추억 - 박건 41.모래탑 - 김훈 42.목마른 소녀 - 정윤희 43.무정 부르스 - 강승모 44.묻어버린 아픔 - 김동환 45.물레 - 유한그루 46.밀밭길 추억 - 허인순 47.바람에 실려 - 하남석 48.바람이 전하는 말 - 조용필 49.방랑자 - 박인희 50.백지로 보낸 편지 - 김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