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불(眞佛)

2019. 8. 3. 10: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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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불(眞佛)


"금불(金佛)은 용광로를 지나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을 지나지 못하고,

니불(泥佛)은 물을 지나지 못하나,

진짜 부처는 안에 앉아 있다." (조주록 224칙)

 

 부처님에 대한 조주스님의 말씀에 대해서 여러 주를 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삼불(金佛,木佛,泥佛)이 모두 참부처가 아니고 어떤 것이 참부처냐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만물이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실질적으로
진여불성을 체험을 해서 확인을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진여불성을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믿는 것이
첫 단계인데, 확실하게 믿는 거기에서 본인 자신을 확인하는 공부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공부를 해서 깨닫고 '애석하다. 깨달아 보니 일체 모든 중생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단지 모르고 지낼 뿐이로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고 있는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면 그 말을
확실하게 믿어야 되는데, 그걸 믿지도 않고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 말씀을 다 믿었습니다.
믿고 자기 자신의 불성이 무엇인가를 돌이켜서 실질적으로 체험을 해보고
알아본 결과로 부처님의 십대제자, 천이백 제자, 오백아라한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영원히 불퇴전하는 확신을 가진 분들입니다.
 중생의 세계에서 불성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잠깐 사이에 바로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나름대로 공부를 해서 나고 죽는 생사를 초월하는 데까지
가는 분이 있고, 더 높이 공부해서 십지(十地)를 증득한 사람도 있습니다.
불성의 세계를 믿고 여러 가지로 공부를 해서 이런 과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조주스님께서 말씀한 법문이 우리의 불성이 어떤 것이냐 하는 차원을
떠나서 달리 말한 것이 없습니다.
 조주스님은 그 불성에 대해 다각적으로 다방면으로 적재적소에 따라서 표현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까지 해줘도 어리둥절해서 모르고 헤매고 있습니다.
불성을 바로 보고 깨닫게끔 말씀을 해준건데 그것을 지금도 듣고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모르고 있으니, 그래서 일단은 철저한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인의 화두를 지극히 참구해서 깨달으면 정말 우리 중생들이 불성을 가지고
있는건지 없는건지, 불성이 무엇인지, 불성의 실체가 어떤건지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뀝니다.
 불성을 깨달아 체득한 사람의 마음쓰는 용심처와 그걸 가지고만 있고 모르는
중생하고는 살아가는 양상이 다릅니다.
 그래서 범부를 고쳐서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을 부처님께서 가장 쉽게 가르친 것이 현실
우리의 목전을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겠습니까?
 우리 중생이 살아가는 속에서 많은 것을 눈 앞에 대(對)해서 겪고 있습니다.
겪고 있으면서도 모른다는 것인데, 번뇌망상이 일어났을 때 번뇌망상만 알지
번뇌망상 아닌 물건이 있는 것은 볼 줄을 모릅니다.
 법불고기(法不孤起)라.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불성이 제 혼자
스스로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경계를 접해가지고 일어나는데,
중생들은 경계를 접했을때 그 경계와 모양 나타난 것을 입력해서 저장해 놓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 모양만 따라가고 그 모양 아닌 참 모양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보면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과 의사충돌이 일어났을 때, 아주 막돼먹은 사람이
뺨을 한대 때린다고 하면 거의가 그 사람하고 같이 하나가 되어 화를 내고
싸움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가 불성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상대방에게 좋지 못한 일을 봤다던지, 자신 내면세계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번뇌망상이 일어난다던지, 격한 진심이 일어난다던지 했을 때에
그때를 놓치지 말라, 그때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심이 확 일어났을 때, 본인이 진심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분명히 보는 놈이 있는데 보는 그놈, 그놈을 되돌려서 보라는 겁니다.
그게 어떤 물건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욕하는 사람과 자기 진심
일어나는 것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분명히 보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주 쉬운 것인데, 뭘 닦아가지고 확 통해서 터지는 것이 있겠지
하는건 허무맹랑한 생각입니다. 
 
 조주스님이 무 했는데 왜 무에 따라가느냐는 겁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 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를 따라 가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쉬운 것이고, 절대 오래 공부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본래면목입니까?”
 하고 물으니 스승이 뺨을 한 대 갈겼습니다.
 “왜 때립니까?”
 “지금 맞았을 때와 맞기 전이 어떻게 다른고?”  
 이렇게 물은 거기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없는 건데, 무슨 정(定)을 이뤄야 되고 오랫동안 오고 가는
것도 몰라야 되고 하는 이런 상상을 해가지고 이를 물고 이렇게 하는데,
이게 너무 우습다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 왜 망상에 따라갑니까?
 망상을 보는 놈을 바로 돌이켜 보라는 겁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달마대사한테 혜가가
 "저는 왜 마음이 불안합니까?"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 보라."
 돌이켜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없는건데 무슨 오래 이를 물고 닦아야 된다는
이런 생각이 병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아주 어렵다고 하는데 뭐가 어렵습니까? 바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바로 가르쳐 주는 사람을 참말로 믿는다면 되는 겁니다.
 바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도 안 믿으면 안됩니다.
바로 가르쳐 주는데도 '저건 아닌데. 이것이 뭔고 하고 계속 해서 깨달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아무리 스승이 가르쳐 줘도 안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둘이 싸움을 하다가 나중에 서로 화해를 하며 '내가 면목이 없네'
 하는 그 말을 곁에서 듣고 본래면목을 공부하던 수좌가 깨달았습니다.
 불교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중생들이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게 가르쳐
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반드시 ‘망상’ 이라 하면 ‘망상 아닌 놈’이 있습니다.
 그것만 돌이켜서 봐 버리면 평정돼서 해결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나의 목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바로 돌이켜 보면 거기서 분명히
자기 진면목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학산 대원 스님 조주록강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식민지 갇힌 삶을 노래한 신카나리아
세상 떠난 지금도 그녀는 "열일곱살이에요"
간드러진 음색·단발의 한복차림 '영원한 소녀가수'
아흔까지 70여년 무대 서서 민중의 삶 애절히 노래
'강남제비''낙화유수''나는 열일곱살…' 등 대히트

악극단 공연무대에서의 신카나리아
악극단 공연무대에서의 신카나리아
한국가요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가수들로서 나이 여든이 넘도록 장수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생존인물로는 올해 93세의 나이로 단연 장수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반야월(진방남), 갓 아흔을 넘긴 작곡가 이병주를 먼저 손꼽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수년 전 94세로 세상을 떠난 가수 신카나리아(본명 申景女:1912∼2006)를 떠올릴 수 있다.
가요계의 원로 중에 여든을 넘긴 분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손인호, 금사향, 신세영 등이 모두 여든을 넘겼다. 반야월은 청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방송 출연을 아예 사절하고 있는 형편이나, 신카나리아는 아흔까지 무대에 섰던 놀라운 가수로 기록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너무 노쇠한 신카나리아의 모습에 놀라움보다는 탄식과 비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신경녀는 191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원산은 한국음악사에서 대표적 거장들을 배출한 유명한 고장이다. 김용환, 김정구, 김정현, 김안라 등 대중음악계의 뛰어난 음악인 형제들도 원산 출생이다. 유명한 성악가 이인범, 이인근, 이옥현 남매들을 비롯해 작곡가 이흥렬도 원산이 고향이다. 어릴 적 신경녀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고 한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건만 원산의 루시여자고보를 1학년까지 다니다 결국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음악적 재능을 달랠 길 없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테너 이인근의 누이동생 이옥현에게 성악의 기초를 지도받았다.

신경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 극작가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이동악극단 성격의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가 함흥지역에서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원산의 유일한 극장시설인 원산관으로 들어왔다. 신경녀는 날마다 조선예술좌 배우와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다녔고, 그들의 연기와 노래에 도취되었다. 신경녀는 기어이 무대 뒤로 용기를 내어 임서방을 찾아가 대중예술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신경녀의 자질을 테스트 해본 단장 임서방은 맑고 깨끗한 음색과 귀염성스러운 자태에 호감이 느껴졌다. 신경녀의 노래는 마치 새장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의 어여쁜 카나리아가 들려주는 아름다움과 같았다. 그리하여 조선예술좌 합류를 흔쾌히 수락하고, 이후 맹렬히 연습을 시켰다. 물론 이 발탁의 과정에는 임서방 개인의 취향과 특별 배려가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신경녀는 무대 위에서 신카나리아로 불렸고, 조선예술단과 신무대악극단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혹은 막간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신카나리아의 첫 데뷔곡은 17세에 취입한 '뻐꾹새'와 '연락선'이란 노래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들의 반향을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정숙이 불렀던 '낙화유수'('강남달'의 원래 제목), '강남제비' 등을 악극단의 막간 무대에서 신카나리아가 너무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오히려 원곡을 부른 가수보다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신카나리아의 나이 20세가 되기까지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듯하다. 1932년 동아일보의 기사 한 토막은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연극시장에서 아직까지도 아모 지장이 없이 곱게 피고 있는 방년 십칠 세의 귀여운 존재 … 신카나리아양은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의 리듬처럼 청아한 목소리를 가졌다. … 연기에 있어서는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 곱고도 정돈된 그의 얼굴이 스테지에 나타날 때에는 관객의 시선은 그의 연기보다도 미모에 집중되는 경향이 잇다.'

19세 이후로 신카나리아가
신카나리아 사인2
신카나리아 사인
리갈레코드에서 발매한 노래 '밤 엿장사' 가사지3
리갈레코드에서 발매한 노래 '밤 엿장사' 가사지
말년의 신카나리아4
말년의 신카나리아
가수로서 발표한 작품의 제목은 '한숨고개' '사랑아 곡절업서라' '무궁화 강산' '웅대한 이상' '공허에 지친 몸' '눈물 흘니며''옛터를 차저서' '돌녀주서요 그 마음' '사랑이여 굽히자 마소' '월야의 탄식' '원수의 고개' '밤엿장사' '꽃이 피면' '님 생각' '선창의 부루스' '상해 여수' 등이다. 이 가운데서 '무궁화 강산'(전수린 작사, 전수린 작곡)이란 노래는 광복 이후 '삼천리강산, 에헤라 좋구나'로 제목이 바뀌었고, 신카나리아가 무대 위에서 항시 즐겨 부르던 자신의 애창곡이었다. 일제강점 체제에서 '봄' '무궁화' '삼천리강산' 등의 단어들이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금기어(禁忌語)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된다 할 것이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 가누나

강산에 새봄은 다시 돌아오고/ 이 가슴에 새봄은 언제나 오나요

세월은 한 해 두 해 흘러만 가구요/ 우리 인생 한 해 두 해 늙어만 가누나
(후렴)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와요/ 무궁화 강산 절계 좋다 에라 좋구나

신카나리아가 주로 음반을 발표했던 레코드회사는 시에론레코드였다. 가수 신카나리아에게 노랫말을 주었던 작사가는 천우학, 김희규, 전임천, 임창인, 유일, 임서방, 유도순, 노자영 등이다. 이 가운데 유도순과 노자영(노춘성)은 식민지 조선시단에서 활동하던 낭만주의 계열의 현역시인들이다. 임서방은 줄곧 신카나리아의 매니저 겸 후견인으로 도움을 주던 끝에 결국 부부가 되었다. 신카나리아 노래의 작곡을 담당하던 대중음악인은 유일, 전수린, 안영애, 이재호 등이다.

시에론레코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신카나리아는 신은봉과 더불어 시에론 최고의 음반판매수를 자랑하는 대표적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12인치 음반 한 장의 가격이 1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카나리아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대중들의 인기를 집중시킨 음반을 당시 용어로는 '절가반(絶佳盤)'이라 불렀다. 이 용어는 실제로 음반 상표에 표시되기도 했는데, 신카나리아의 음반에는 이 '절가반'이 여러 장이나 있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업고 신카나리아는 요즘의 만담과 비슷한 스켓취, 혹은 난센스 종류의 음반도 가끔 취입하다가 1934년 리갈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겼다. 리갈은 보급판 스타일의 저렴한 민요 음반을 집중적으로 발매하던 콜럼비아의 계열회사였다.

1938년 이후 신카나리아는 음반 발표보다 악극단 공연에 더욱 열정을 쏟았다. 빅타레코드사의 악극단, 중국 톈진의 악극단, 신태양악극단, 포리도루실연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극단 멤버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후견인이던 임서방과 이별하고, 이익(예명 김화랑)과 재혼하였다. 신카나리아 부부는 새별악극단을 창립하여 전국을 순회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신카나리아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장병위문단의 멤버로 군부대 위문공연에 열중하였다.

1972년 회갑을 넘긴 신카나리아는 서울 충무로에서 '카나리아다방'을 열고 옛 동료가수들과 어울려 추억담을 즐겨 나누며 소일하였다. 한국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예명을 썼다는 가수!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한복차림이던 신카나리아! 그 특유의 간드러진 음색으로 90세까지 기꺼이 무대에 오르던 직업적 천품(天稟)의 가수는 마침내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남긴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식민지라는 감옥에 갇힌 백성들의 슬픈 삶을 다룬 것이었다.


♬타향살이,강남달 / 신카나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