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문|…… 혜천스님설교

2019. 9. 7. 13: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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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 2556년 6월 3일


불교의 문

 

 

오늘 주제는 '불교의 문'입니다.

 

천공의 성도 문이 있어서 드나들 수 있고, 철옹성도 문으로다 통할 수 있죠. 만리장성도 난공불락의 성이라 그러지만, 문이 있어서 드나들 수 있습니다. 문이 없으면 드나들 수가 없죠.

 

불교도 문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이야기해요. 불교는 어렵다고. 불교가 어려운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기 때문이예요. 어려운 이유는 실을 바는 허리에 매고 쓰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실을 바늘 귀에꿰어 쓰야 쉬운데, 실을 허리에다 맸으니까 어려울 수밖에 없죠. 

 

우리가 불교를 이해할려면, 불교의 문에 들려면, 부처님의 탄생게(誕生偈)를 이해해야 돼요. 사실 부처님의 탄생게에는 불교의 종교성, 불교의 진리성, 불교의 지향성, 또 불교의 세계관, 불교의 존재관 같은 것이 부처님의 탄생게에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탄생게는 불교의 문입니다.  

 

 

부처님 탄생게는 사실 성도게

 

부처님의 탄생게는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천하는 인간들의 세계, 지옥 세계, 아수라의 세계, 축생의 세계, 아귀의 세계. 불교에서 육도를 이야기 하잖아요. 천상, 인간, 아수라, 지옥, 아귀, 축생. 그래서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말하고, 천하는 아까 말한,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세계를 말합니다. 

 

유아독존이라고 하는 것은 그 육도의 세계에서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죠. 우리가 부처님을 세존(世尊)이라고 부르잖아요. 부처님을 지칭하는 용어가 경전에 103가지가 나와요. 그걸 대별해서, 보통 부처님의 명칭을 10개를 드는데, 그 10개 중에 드는 것이 이 세존입니다. 그래서 이 세존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세상에서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유아독존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존귀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처님이 삼계개고를 이야길 하걸랑요. 삼계라고 하는 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 즉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삼계에는 25유라고 분리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25가지의 생명 존재가 산다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의 세계관과 존재 생명관을 나타내는 거예요, 삼계는. 그리고 개고라고 하는 말은 삼계의 세계라는 것은 두카의 세계라는 거예요. 뭐, 두카는 여러 번 얘기했지만, 불만족스럽고, 뒤틀려 있고, 불안정하고, 불편스러운 거. 이 삼계의 세계라는 것은 그렇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당안지라고 그거걸랑요. 내가 마땅히 안락케 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탄생게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신들의 세계에서나 인간, 지옥, 아수라, 축생, 아귀의 세계에서 나홀로 존귀하며, 25가지의 생명 존재가 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세계는 불만족스럽고, 뒤틀려 있고, 불안정한 고(苦 Dukkha)의 세계인데, 마땅히 내가 안락케 한다.)라고 했다고 그러잖아요. 불교는 이 탄생게 속에 모든 게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탄생게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성도 후에 이것을 외쳤다고도 하죠. 어쩌면 부처님이 성도 후 외친 것을 후대에 경전을 편집하면서, 부처님의 탄생게로다가 연결시켜 놨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은 불교의 모든 것을 이 탄생게 하나에 담고 있다는 거예요.   

 

불교의 지향점은 고(苦)를 벗어나서 안락(安樂)에 이르는 거예요. 고를 벗어나서 안락에 이르는 거. 그게 불교의 지향성이예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불교의 종교성과 진리성이라면,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지향성입니다. <대념처경>에 보면,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해요. '고를 벗어나서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념처四念處觀'이라고 이야기 하죠. 결국은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고를 벗어나서 안락에 이르는 거예요.

 

안락이나 열반이나 사실, 다 같은 개념입니다. 물론 평온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개념이고, 평안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개념이고. 다 같은 개념이예요. 우리 현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인 행복이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개념이지요. 결국은 고로부터 벗어나서 행복을 얻는 것, 그게 불교의 지향점이자 목표예요. 그걸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은 두 가지를 제시하죠. 뭐라고 부처님은 이야길 하시냐면,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지키고, 몸을 지켜야 된다. '지킨다'고 하는 개념을 부처님은 이야기해요. 지킨다는 거예요. 마음을 지키고, 몸을 지킨다는 거예요. 마음을 지킨다는 거는 뭐를 말하냐면,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해요. 미망과 혼돈의 상태가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 몸을 지킨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몸이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죠.  

 

우리가 잠을 자면,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싸움도 하고, 소리를 질르고, 뛰기도 하고, 산도 오르고, 때에 따라선 꿈에 나르기도 하죠. 특히 성장기 꿈에서는 많이 날라다닙니다. 근데 성인이 되면, 나르는 꿈은 거의 안 꿔요. 혹시라도 지금도 날르는 꿈을 꾼다고 하면, 아직도 성장할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는 걸 뜻하죠. 대체적으로 성인이 되면, 절대 꿈에서 날르는 꿈은 잘 안꿔요. 청소년기에는 꿈을 꾸면 전부 다 나르죠. 왜 그러냐면, 왕성하게 내가 미래를 향해서, 뭔가를 이룬다고 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꿈에서 날라요. 그런데 꿈에서 날른다고 해서 현실에서 몸이 나른다거나, 꿈에서 내가 옆 사람을 때렸다고 해서, 현실에서 주먹이 나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잠이 들면, 우리 몸이 마비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마비되지 않으면, 그건 병이죠. 몽유병. 실제적으로 꿈 속에서 행한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병입니다. 이건 치료해야죠. 우리가 몽유병이라고 하는 것이 그거걸랑요. 꿈에서 내가 화가 나서 옆 사람을 때렸는데, 옆에서 자던 아내가 아야야! 하는 것은 몸의 마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는 걸 뜻하죠. 우리가 꿈 속에서 꿈을 꾸는데, 몸이 마비되지 않으면, 실제의 현실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해 집니다. 실제적으로 꿈의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죠. 꿈 속에서 누군가를 해치웠는데, 그게 현실에서 실제적이었던.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꿈 속에서 반드시 몸이 마비가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몸이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죠. 우리가 몸이 깨어 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내 지각이 움직이는 것을 말해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서서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걸으면서도 선정에 든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런 뜻이예요. 부처님은 마음을 지키고, 몸을 지키라고 그랬죠.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 몸을 지킨다 것은 몸이 깨어있는 상태를 말해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지키느냐? 자애심입니다. 자애심을 지킨다는 거예요. 자애심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자애심을 확장시켜서 무량심이 되게 하는 거를 말해요.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거예요. 우리의 그 자애심을 업그레이드 시켜서 무량심으로 바꾸는 거죠.    

 

몸을 지킨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몸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말해요. 생명을 보존해서 진리의 생명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을 말하죠. 우리가 부처님의 진리의 문에 든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하기도 해요. 그러기 때문에 무아의 윤회가 성립되는 것은 불교의 지향성이 진리의 생명을 얻는데 있기 때문이예요. 열반이라는 것은 다른 뜻으로다가는 불사걸랑요, 죽지 않는 거. 죽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의 생명체가 되는 거를 말하죠.

 

부처님은 고를 벗어나서 안락에 이르는 거를 말하죠. 불교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거예요. 현실의 고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세계에 드는 것. 그럼으로써 진리의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예요. 탄생게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그거구요.     

 

우리가 불교를 이론적으로다가 너무 많이 알아요. 이론적으로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쓸데 없는 걸 너무 많이 알아요. 특히 잘못된 것을 너무 많이 알죠.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마치 열반을 얻으면 목석화 되고, 화석화되는 것처럼 얘기한다는 거예요. 열반이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목석화되고 화석화 되는게 아니걸랑요. 내가 지난 주에 동적 평온이라고 하는 말을 썼는데, 열반이나 모든 것은 다 평온의 개념인데, 평온이 동적인 평온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동적인 평온. 동적이라는 거죠.  

 

 

혜천스님의 미얀마 출가

 

에, 오늘 6월 3일인데 오늘 제 생일입니다. 제가 오늘 생일 턱으로다가 초콜렛을 드린 거예요. 제가 생일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 마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제가 2000년 6월 3일날, 정확히 오전 8시 45분에 미안마에서 스승인 아신 코쌀라 사야도를 모시고, 불교에 입문한 날이 오늘이예요. 그래서 나는 오늘을 태어난 날로 생각하죠. 내가 왜 태어난 날로 생각하냐면,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문한 날이기 때문이예요.

 

물론 그 전에 불교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또 불교를 공부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공부해왔던 불교는 불교라고 하는 외피는 쓰고 있었지만, 불교라고 하는 내용은 없었어요. 근데 비로소 내가 12년 전에 불교의 내용을 봤어요. 내가 봤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 스승인 아신 코쌀라 사야도를, 내가 처음으로 뵌 거는 5월 4일날이었어요. 2000년 5월 4일이었는데, 나는 그 분을 뵙고, 아! 수행자가 있다면, 이 분이 수행자구나!라고 하는 강렬한 느낌을 그 분한테서 받았어요.

 

물론 그 전에, 우리나라에서 수백년 이래 최고의 인물이라고 하는 뭐 해인사의 어르신, 또 원효에 버금간다고 하는 오대산의 어르신, 내 수없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살지 않았던 건 아니예요. 그렇지만, 정말 그 분들은 카리스마가 넘쳤어요. 얼마나 카리스마가 넘쳤냐며는 오대산의 어르신은 그 뒤에 외진 곳에 계시면서도 당신 찾아온 손님들의 밥상들을 다 들고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열 명이 찾아오면, 밥상 열 개를 들고 올라갈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쳤어요. 어느 누구도 감히 거기에 대해서 그것이 그르다 생각하지 못했고, 그르다고 말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방자스럽게도, 나는 그것이 참 그르더라고. 당신이야 그 곳에서 밥상을 갖다르리는 것을 잡숫는 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 아니예요. 그 정도 까지는 양해가 돼요. 근데 그 분을 찾아온 사람들, 아! 대개 그 분을 찾아온 분들이  도(道)꾼들이 많았는데, 그저 동해 한 천리가 땅이 되고, 뭐 이런 시지부리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류여. 해인사의 그 분도 참 카리스마가 보통으로 넘치는 거 아니죠. 카리스마는 넘쳤죠. 권위도 넘쳐 흘렀고.  

 

근데 미안마 스승은 그냥 평온했어요. 그 당시에 미안마에서 가장 존경 받으신다고 그러시는데, 그 분은 마치 봄바람과 같았어요. 너무나도 평온스러워서, 그를 대하고 있는 나 자신도 평온할 정도로. 내가 우리나라에서 모셨던 어르신들은 불편스러웠어요. 그 분이 시자를 나보고 하라 그랬을 때 거부했으니까요. 할 수 없다.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내가 그 분의 시자를 거부했던 것은 그 분을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정확히 말하면, 그 분을 긍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내가 긍정하지 못햇던 것은 내가 불편했기 때문이예요. 내가 마음으로 심복하지 않는데, 몸으로 심복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동시에 어른을 속이는 거예요. 아마 어른의 시자를 거부한 사람이 내가 최초의 사람이자 마지막 사람일 거예요.

 

그런데 미안마의 어른은 너무나 평온했어요. 그 평온이 화석화되고 목석화된 평온이 아니라 동적인 평온이었어요. 아! 수행자가 있다면, 아니 정말 진리의 문에 든 사람이 있다면 이런 분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했죠. 나는 그 분이 진리의 문에 든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몰라요. 내가 모르는 이유는 내가 거기 들어가서 그를 만나보지 않았는데 어찌 알겠어요? 그러나 적어도 진리의 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었어요.  

 

안락이라고 하는 것, 열반이라는 것은 뭐냐면 동적인 평온이예요. 우리가 동적인 평온이 안되기 때문에 사실 현실에서 불만족과 불편함과 불안정을 느끼죠. 파도를 타는 사람은 파도가 파도가 아닙니다. 파도 자체가 도구죠. 파도가 쓰나미가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은 그것을 도구화하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결국 고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도구화해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활용하면, 불편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근데 우리가 왜 그러냐? 우리는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 불편한 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걸랑요.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그 그림자는 커지죠. 누군가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 미워함이 커지는 것과 똑 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긍정하면, 더 이상 그 그림자는 나에게 드리워 질 수 없는 거와 같아요.  

 

부처님이 왜 중도(中道)를 이야기하시겠어요? 중도라고 하는 것은 동적 평형입니다. 동적인 평형(平衡). 평형이라는 것이 기계화된 평형이 아니라 동적인 평형이죠. 동적인 평형이라는 것이 뭔가요? 우리가 바닷가에 가면, 저녁에 봤던 모래는, 내일 아침에 가며는 그 모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모래사장에 서는 거는 틀림없어요. 그렇지만 오늘 본 모래는 내일 없습니다. 다른 모래가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그렇지만 그 자리에 언제나 모래는 있습니다. 언제나 평형을 유지하고 있죠. 

 

그 평형이 유지되는 이유는 동적이기 때문이예요. 움직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왜 불안정하고, 왜 뒤틀려 있냐면, 사실 동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우리 동적이지 않은 어떤 고정된 실체를 찾걸랑요. 고정된 것을 얻고 싶어한단 말이예요. 근데 절대 인간 세계는 고정되어 있는 건 없걸랑요. 고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죠. 

 

우리는 부처님 오신 날 만났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만났으니까 우리는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이야기하면,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도 부처님 오신날에 오셨던 그 분은 없습니다. 우리가 동일성을 갖느냐, 비동일성을 갖느냐의 문제겠죠. 우리는 언제나 동일성을 갖는 것 같지만, 동일성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시각적인 것에 불과하죠. 우리는 비동일성을 갖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동일성을 가지면, 동적일 수 없게 되겠죠. 우리가 비동일성이기 때문에 동적인 거예요. 동적이라는 거는 비동일성을 말하죠. 우리가 비동일성인데, 우리는 동일성을 고집하죠. 매일 같은 방식으로. 내가 수학공식을 풀어 틀렸다면, 같은 방식으로 그 문제를 푸는한 항상 같은 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틀리죠. 왜? 잘못된 방식으로 풀었기 때문에 답이 틀렸는데, 그 방식으로 계속 풀면, 계속 틀릴 수밖에 없죠. 그러며는 다른 방식으로 풀지 않는 한, 새로운 답은 나오지 않게 되어 있어요. 비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푸는 거죠.   

 

부처님이 고를 벗어나서 안락에 이른다고 하는 것도, 비동일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해져요. 만약에 동일성이라면, 우리는 고를 벗어나서 안락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열반에 이를 수가 없어요.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어요. 왜? 동일성이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다가 실험을 하게 되면 같은 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명상 수행자들이 명상 수행 속에서 뭔가의 영상을 보죠. 그 영상을 보는 것은 내부 시각입니다. 우리가 그 내부 시각을 보는 것은 그 내부 시각의 영상을 작동시키는 내 의식이 있기 때문이예요. 내 의식이 없으면 그 내부 시각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부 시각을 보는 것은 동일성을 갖기 때문이죠.

 

 

불교는 쉬운 것

 

불교의 지향성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고를 벗어나서 안락에 이르는 것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거죠. 부처님은 우리에게 다른 말씀 안 합니다. 행복하라는 거예요. 행복할 때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행복에 있다는 거예요. 또 우리의 존재의 목적도 행복에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그거예요. 다른 것 없어요.    

 

우리가 불교의 교리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교리가 어려워서가 아니예요, 사실. 교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들어가는 코드를 잘못 일러줬기 때문이죠. 또 우리가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죠. 단순해요. 행복 해라! 나는 너희들에게 행복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행복에 이른 사람이고, 너희들은 그 행복의 세계로 와라! 내가 인도해 주마. 나를 믿고 한 번 와라! 손해보는 셈 치고 와라. 아니면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내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우리 삶은 선택이예요. 매 순간의 선택.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거죠, 매 순간에. 근데 우리는 뭘 고민하느냐면요?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고민해요. 그런데 절대, 나는 그렇게 봐요. 잘못된 선택은 없다. 내가 왜 잘못된 선택은 없다라고 하냐면, 내가 선택했을 때 내가 기대한 것 만큼,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은 것이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의 충족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기대한한 것 만큼 충족되지 않을 수도 있죠. 어쩌면 내 기대가 너무 높았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그런 말 쓰잖아요. 꼭 공부 못하는 얘가 시험 전 날 벼락치기 공부한다고. 그거는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예요. 우리는 보통 그렇게 이야기 하걸랑요. 아, 내일이 시험이니까 불안해서 저렇게 열심히 한다. 그런 것 아니예요. 나는 그렇게 안 봐요. 기대치가 갑자기 하루 전 날, 최대한으로 높아지는 거죠. 최대한으로 상승되는 거죠. 그 상승 효과가 전 날 얼마나 높아졌냐며는 마치 해가 폭발해서 분열해서 엄청나게 높아진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 폭발하는 상승, 그 블랙홀에 내가 빨려 들어가서 지금 책을 들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 얻을 수도 있고, 기대한 거 보다 못얻을 수도 있죠. 그러나 잘못된 선택은 없다. 왜 잘못된 선택이 없느냐? 인간은 한 번 실수한 것은 잘 되풀이 하지 않아요. 왜 되풀이하지 않느냐면, 내가 쓰디 쓴 것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것이 저장되기 때문에 그걸 반복하지 않죠.

 

우리가 산에 가다 뱀을 보고 한 번 크게 놀라면요, 비슷한 물체만 봐도 깜짝깜짝 놀래요. 왜 깜짝깜짝 놀래나? 비슷한 것만 봐도, '저게 뱀이다!'라고 하는 경험이 딱 있기 때문에, 그 의식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미리 방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하는 것도, 일단 비슷하면 다 자라야. 그래서 인간은 한 번 잘못 선택해서 쓴 맛을 보고 나면, 절대적으로 그거는 피할려고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다음에 내가 무엇을 선택할 때, 그것은 효과적으로 내가 잘못된 선택 하는 것에 대해서 방어를 해주는 역할을 하죠. 그런 면에서 나는 잘못된 선택은 없다. 단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기대한 것 만큼 효과를 얻지 못할 수는 있다. 우리가 그것만 생각하면 돼요.

 

우리는 매순간이 선택이예요. 무엇을 선택하느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그냥 앉아 있는 것 같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선택했기 때문이예요. 오늘 흥천사에 가서 좀 앉아 있다가 와야 되겠다. 아, 혼자 떠들려면 얼마나 심심하겠냐? 중국 송나라 시대에 법창우(法昌倚遇) 선사는 뭐, 혼자 법상에 올라가고 그랬다지만. 그건 법창의우 선사 이야기이고. 사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선택한 거예요.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선택한 거고. 내가 오늘 이 야기를 해야 되겠다 선택하고 올라온 거고. 물론 뒤에 이 여러 이야기 나오는 것은, 주제를 선택하고 그 다음 나오는 이야기는, 그건 나도 선택하지 않아요. 왜 선택하지 않냐며는 그것은 자연적인 흐름이거든요.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나면, 그 나머지는 흐름이예요.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나를 동적인 상태로 가져가는 거죠.  

 

우리가 선택하고, 그 선택에서 쓴 맛을 보는 거는, 사실 동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거예요. 동적이라는 것은 결국은 살아 움직이는 걸 말하죠. 우리가 아시죠. 살아 헤엄치는 물고기는 파도에 떠밀려 백사장에 나오지 않는다는 거. 백사장에 떠밀려 나오는 물고기는 반드시 죽은 물고기입니다. 아니면 죽기 직전의 병든 물고기이죠. 거센 파도를 헤엄치는 물고기는 절대 해변에 떠밀려 나오지 않습니다. 왜? 동적이기 때문에. 왜 동적인 평온을 이야기하냐면, 그래서 그런 거예요. 평온이 동적이여야 된다는 거예요. 평형이 동적이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난 사실 아신 코쌀라 사야도에게서 동적인 평온을 봤어요. 그 분은 어떤 카리스마도 없어요. 또 그런 걸 내세우지도 않아요. 그저 자기의 흐름을 유지할 뿐이죠. 그 흐름 속에서 모든 사람이 평온하죠. 부처님은 고를 벗어나서 열반에 이르라고 해요. 부처님이 탄생게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불교의 지향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탄생게가 뭐예요? 고와 낙이예요. 고와 낙. 딱 두 가지예요. 고를 이야기하고, 안락을 이야기 한단 말이예요. 대념처경에서도 부처님이 고와 열반을 이야기 하잖아요. 이 두 가지를 벗어나면 불교 아니예요. 부처님이 무상과 무아를 이야기하는 것도 고를 이해시키기 위한 거예요. 고라는 것이 이디서 오느냐? 네가 미망에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 미망은 뭐냐?  고정화된 네 착각때문에 생긴다는 거예요. 세상이 동적인데, 세상이 동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세상은 비동일성인데, 세상이 동일성이라고 보는 거죠. 세상이 동일적이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해요.   

 

많은 분들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 그러죠. 근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중요한 걸 하나 짚을 필요가 있어요. 천국에 가서 어떤 모습이 있느냐? 아니, 늙고 병들은 몸을 가지고 그대로 천국에 있을 거냐? 아니 그러면 천국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보통 동일성을 갖는다고 생각해요. 만약 동일성을 갖는다면, 여기서 무릎 아파가지고 움직이기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힘들어 죽겠는데, 아니 천국에 가서도 그래야 된단 말이예요? 만약 그렇다면,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아요? 우리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 하죠. 사실 그거는 착각이예요. 그건 착각일 수밖에 없어요.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현실에서 그 고를 깨라는 거예요. 현실에서. 지금. 지금 그 미망에서 깨어나라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마음을 지키고, 몸을 지킨다고 하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고와 안락이라는 것도, 그 안락이라는 것도 몸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는 거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자애심을 확장시켜 무량심에 이르게 하고,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해서 진리의 생명으로 바꿔 나가는 거예요. 그것이 부처님이 탄생게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불교의 문이예요. 

 

그 문에만 들으면, 우리는 그냥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죠.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어쩌면 우리가 너무 많이 알아서, 진리의 문에 들지 못하는 지도 몰라요.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많이 아는 것보다 하나를 실천하는 것이 진리의 문에 드는데 더 빠르다. 우리는 그 하나를 실천하려고 하지 않고, 많~아안이 알려고 하걸랑요. 많이 쌓는단 말이예요. 무엇을 쌓느냐가 중요하죠. 쭉정이 벼는 아무리 창고에 쌓아놔도, 우리의 배를 채워주지 못해요. 한 말의 곡식이라도 알곡이어야 내 배를 채워 주죠. 부처님이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고를 벗어나서 안락에 이르는 지향성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어요. 우리는 그거를 성취해야 돼요. 행복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것 아니예요. 설사 누가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내가 받지 못한다면, 지나가는 거와 같죠. 아무리 온 대지를 비가 적셔도, 그릇에 담지 않으면 한 방울의 물도 얻지 못합니다. 마, 어젯 밤에 얼마나 비가 쏟아지는지 말이예요. 비는 밤새껏 쏟아졌는데, 마, 저는 한 방울의 물도 받지 못했어요. 다 흘러 가버리고 없죠, 지금. 아파트에 살면 비오는 지 모릅니다. 나는 양철 지붕에 살아서 아주 친절하게 알려 주죠.

 

내가 말씀드리는 거는 다른 거 아니예요.  내가 그 행복을 누릴 때, 그 행복은 내 꺼라는 거예요. 내가 누릴 때 내꺼예요. 행복이 세상에 넘쳐나서 발에 깔리고, 발에 차인다 할지라도 내가 누리지 않으면, 행복은 나에게 없어요. 그 행복은 누리는 사람의 몫이예요. 부처님도 그 행복을 누리라는 거고. 오늘 주제는 부처님의 탄생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신 꼬쌀라 사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