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기는 쉬우나 믿기는 어렵다 / 몽지님

2019. 9. 14. 10:1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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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기는 쉬우나 믿기는 어렵다 / 몽지님



지금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눈앞의 대상이 잘 보이고 잘 들립니다.
대상의 촉감이 잘 느껴지고 온갖 생각들을 잘 분별합니다.
분명 바로 지금 여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대, 진정한 경험의 주체일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이 일련의 사고 과정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무엇, 경험의 주체란 것이 정말 있습니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경험의 대상이 아닌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이거나 들리거나 느껴지거나 알아지는 경험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모든 존재는 모두 경험의 대상입니다.

즉 대상들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험의 주체 없이 대상들이 경험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경험의 대상들이 경험되니 분명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정작 경험의 주체는 경험의 대상으로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경험의 주체가 없는데 경험의 대상을 경험하는 일 스스로 있을 수 있을까요?

경험의 주체가 없다면 경험의 대상과 그것이 경험되는 일 역시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경험의 주체가 있고 경험의 대상이 있어 경험하는 일이

객관적으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경험되지만 실체 없는 경험의 현상들을 전통적으로는

마야, 환(幻)이라고 합니다.

경험 현상들은 그 본질이 아무런 실체 없음, 곧 공(空)입니다.

그런데 그 공이란 개념 역시 아무런 실체 없는 공, 공공(空空 ; 공도 공함),

필경공(畢竟空 ; 현상에 대한 분별이 완전히 끊어짐)입니다.
경험의 주체와 대상, 경험하는 일 모두가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습니다.

모든 존재는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목전(目前)의 일, 바로 지금 여기, 이것, 이 자리, 자각, 알아차림,

마음 챙김 등등의 언어로 표현합니다만, 그 모든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 의미는

아무 실체 없이 텅 비어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붙잡을 것 없음, 얻을 수 없음, 알 수 없음,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

함입니다. 언제나 이와 같음, 본래 이러함입니다.

이 사실을 문득 깨닫기는 쉬우나 완전히 믿기는 어렵습니다. 느낌과 감정, 생각이

일으키는 방해와 간섭 때문에 모든 추구를 쉬기는 어렵습니다.
본래 성불, 본래 완성, 본래 무아(無我), 본래 아무런 부족함 없음, 이미 도달해 있음,

내가 바로 그것임에 한 치의 의혹 없이 머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이 노래하기를,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은 귀한 일이 못되니

(得樹攀枝未足貴) 낭떠러지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 대장부라 하리라

(懸崖撒手丈夫兒)!” 하였으며,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나아가야(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가 온몸을 드러낸다(十方世界現全身).”고 하였던 것입니다.

부디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어디에나 그대는 있다 / 몽지님

언제나 어디에나 그대는 있다 / 몽지님
 

바로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이 순간 의심할 여지없이 그대는 존재합니다.
이 글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존재하며 그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글을 보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음과 그대의 존재함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대의 존재, 진정한 그대의 정체성은 이 글을 보고 있는 하나의

몸과 마음, 한 사람, 하나의 인격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직접 탐구해 보십시오.
눈앞의 컵을 보십시오. 컵의 모양과 빛깔, 그것의 촉감, 그것과 관련된 관념과 기억이

의식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에 의해 의식되는 대상 사물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십시오. 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대상 사물로서 육체와 그와

관련된 감각, 감정, 생각들이 의식됩니다. 이 사람, 이 인격 역시 컵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라 나에 의해 의식되는 대상 사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대상 사물들을 의식하는 참된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엇’으로서, 하나의 대상 사물로서 있지 않고 그 모든 대상 사물들이

있음의 근원으로 있기에 마치 그것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모든 대상 사물을 의식하는 ‘무엇’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없는 줄 아는 그것은 진정 없는 것인가요?
하나의 대상 사물로서의 그대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깜빡 잠이 들거나

깊은 삼매에 들거나 전신마취에 들어가면 하나의 몸과 마음으로서의 그대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의식하는 진정한 그대 자신은 사라졌을까요? 몸과 마음의 부재를

경험하는 진정한 그대, 의식이 사라졌다면 다시 몸과 마음의 나타났을 때 그 자신이

부재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의식의 공백이 있었음을 아는 그 의식은 어디서 그러한 정보를 얻었을까요?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그대는 진정한 그대가 아닙니다. 매일 밤 몸과

마음으로서의 그대는 사라졌다가 매일 아침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대 자신의 본질은 깨어있을 때나, 꿈속에서나, 잠이 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항상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의식의 삼 분단, 깨어있음과 꿈 그리고 잠이란

분별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의식 변화의 배경, 바탕에는 결코 변함없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언어관습일 뿐이란 사실입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그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 사물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본래 말해질 수도, 의식되어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 자신과 조금도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틈이 없이 온통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자신을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은 그것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의식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떠나서 눈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특정한 대상들

속에서 눈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보이든 그것들이 바로 눈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눈은 결코 보이는 대상은 아니지만 보이는 모든 대상들을 통해 스스로를

현현합니다.
대상을 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눈입니다. 컵을, 몸과 마음을 의식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그대 자신입니다. 눈이 대상으로 보이지 않듯 그대 자신은 결코 의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식되지 않음 역시 또 다른 의식이지 않은가요? 대상이 없는 순수한 의식

그 자체를 우리는 의식되지 않음, 모름이라고 판단할 뿐 아닌가요?
 

깨어있지만 아무것도 의식되지 않음, 그것을 전통적으로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본래 상태, 우리의 본질이 바로 그러합니다.

이 순수한,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중립적인 의식 상태 위에 온갖 다양한 의식의

경험들이 비춰집니다.
있음과 없음, 앎과 모름,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이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사물들이 바로 눈 그 자체는 아니듯 말입니다.

눈은 보이는 사물들에 영향 받지 않고 언제나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의식하는 의식 그 자체는 의식의 내용물과 상관없이 언제나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게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