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가장 직접적인 체험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어떤 특별한 체험,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신체 감각적인 것이든 뭔가 색다른 체험과 동일시합니다. 그러한 체험을 통해 어떤 상태, 대부분 긍정적인 요소로 채워진 상태 (고요함과 명료함, 흔들림 없는 마음의 상태 혹은 평화로움,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지복 또는 행복한 상태)를 획득하고자 합니다.
즉 뭔가를 찾고 구하고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찾고 구하고 얻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불만족, 모든 불행,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여기 그러한 추구, 여기에서 저기로, 이것 아닌 저것으로의 움직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모든 추구의 정지를 통해 곧장 찾고 구하고 얻으려 하는 마음의 소멸, 곧 모든 불만족과 불행,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지금 당장 가장 직접적인 체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 당장 당신의 가장 직접적인 체험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은 이 문장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들의 경험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경험, 체험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들보다 먼저 선행하는 경험, 가장 직접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당신이 있다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엄밀히 살펴보면 당신이란 존재 자체와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현존의 경험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 가장 직접적인 체험이 바로 당신 자신, ‘나’ 자체입니다.
이 순수한 존재하고 있음의 경험, 이 ‘나’의 체험이야말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경험, 끊어짐이 없는 체험입니다.
모든 상대적인 경험, 나타났다 사라지는 체험들은 이 균일하고 평등하고 항상한, 가장 직접적인 경험, 이 절대적인 체험 위에서, 또는 안에서 가능할 따름입니다.
이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체험이야말로 모든 경험의 유일한 목격자, 진정한 경험의 주체입니다. 어떤 경험에서도 따로 분리시킬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경험의 근본 요소입니다.
모든 상대적인 경험의 내용들은 사라져도 그러한 경험에 대한 앎, 인식, 자각, 알아차림은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이 가장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체험이 바로 그 앎, 인식, 자각, 알아차림 그 자체입니다.
바로 지금 당신이 이 문장들을 경험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경험을 뒷받침 하고 있는 것, 그 경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체험,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이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존재의 감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수한 개별적 존재자들에게 공통된 1인칭 단수 ‘나’라는 느낌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불변하는 자기 정체성의 근거가 바로 이 가장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경험, ‘나’의 경험입니다.
이것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이 자명한 경험입니다. 스스로를 의심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그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경험의 내용물이 없는 이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 이 가장 직접적인 체험은 그래서 너무나 쉽게 간과되거나 무시됩니다.
너무나 특별하지 않은 경험,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것을 내버려 두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얻었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상대적인 경험, 무상한 체험에 집착하겠지만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 가장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체험 가운데서 모든 추구와 바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뿐더러 어떤 특별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자각을 일러 깨달음이라 할 뿐입니다.
- 몽지와릴라밴드에서 몽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