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8. 18:2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6년 7 월 1일 서원誓願
우리 김지미님하고 서유정님 반갑습니다. 어제는 우샤스(우샤스(Ushas) :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새벽의 여신, 스님께선 비의 신이라고도 함)의 노래 소리에 우리 석두 선우의 어머니이신 용금례님의 장례식이 어제 있었습니다. 어제 법화 선우하고 제가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우리 용금례님의 영원한 진리의 생명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주제는 서원(誓願: 신불(神佛)이나 자기 마음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움. 또는 그 소원)입니다. 붓다께서 과거세의 디판카라 부처님(연등불(燃燈佛) : 원어는 디판카라 타트하가타(Aipankara-Tath gata)) 앞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서원을 세우죠. 그 서원을 들은 디판카라 부처님께서는 "네가 미래세에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인증의 말씀을 주신 거죠.
맛지마니까야에 나오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자타카는 바로 그 부처님의 서원을 설명하고자 하고 있죠. 500여편의 자타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그 부처님의 서원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부처님의 서원을, 부처님께서 행하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고 있는 거죠. 그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탄생게는 바로 그 부처님의 서원이 현재에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죠. 부처님께서 탄생하시면서 '인간과 세계에서 나홀로 존귀하니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여 편안케 하리라'고하는 탄생게는 바로 부처님의 서원인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고 하는 그 서원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파마나 행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자타카>죠. 다른 것이 <자타카>가 아닙니다. 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불교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자타카>를 읽어야 됩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우리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읽지 않으면, 부처님의 탄생게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과거세의 디판카라 부처님 앞에서 세웠다고 하는 서원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게 돼요. <자타카>는 바로 부처님의 서원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 500 여편은 오로지 부처님의 아파마나 행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아파마나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무량심(無量心)입니다. 무량심은 한계가 없는 마음이죠. 자애심이 충만해서, 그 자애심이 넘쳐 흘러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 미치지 않는, 어디에도 결핍되지 않는 것이 바로 무량심입니다. 그 <자타카>는 오직 부처님의 자애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죠.
불교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불자가 된다는 것은 서원을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세의 부처님께서 디판카라부처님 앞에서 서원을 세웠듯이, 우리도 샤카모니 부처님 앞에서 우리가 서원을 세우는 것을 뜻하죠. 인도에서는 불교도를 바흐또와라고 불렀습니다. 바흐또와는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서원을 따르는 거예요.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한다고 하는 그 서원을 세웠듯이, 우리도 그 서원을 따르는 것을 뜻하죠.
서원은 목적과 목표가 아닙니다. 오늘의 불교의 문제는 목적과 목표는 있는데, 서원이 결핍되어 있다는 거예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목적과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원을 세우는 겁니다. 그 서원을 세워서, 그 서원이 이룩되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바로 자애심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시죠. 자애심이 없이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우리는 깨달음과 열반을 목적과 목표로 합니다. 깨달음과 열반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가 빠져 있죠. 그것은 서원이라고 하는 것이 빠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원이 없는 목적과 목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인가부터 서원을 잊어 먹고 있죠. 서원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내 깊은 마음 속에 깊이 숨겨 놓고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요? 부처님은 말씀하시죠. 생각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부처님은 생각할 것을 이야기하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업니까? 사유입니다. 무엇을 사유할까요? 부처님은 서원을 사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서원은 우리 자애심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겁니다. 서원이 없으면, 자애심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원이 있을 때, 자애심이 일어나죠. 부처님은 그 자애심을 사유하라고 하시죠. 우리 모두에게는 자애심이 있습니다.
며칠 전 대구에선가 네 살 먹은 아이가 엄마가 이불 터는 것을 구경하다가 아파트에서 떨어졌죠. 그 아파트에 사는 50대 남성이 그 아이를 받았습니다. 그 남성은 아이를 받은 충격 때문에 인대가 늘어나고, 근육에 이상이 생겨서 입원했죠. 그것이 특별히 그가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를 받았을까요?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자애심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게 한 거죠. 그것은 의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아이가 떨어지네, 내가 받아야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면, 그 아이는 받을 수 가 없습니다. 생각이 지시하고, 행동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저 그 분은 아이가 떨어지자 그저 손을 내 밀었을 뿐입니다. 그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 자애심이 우리 생각보다 먼저 그를 움직이게 한 거죠. 부처님께서 생각하라고 하시고, 부처님께서 행동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어떤 서원을 세우시고, 그 서원을 이룩하기 위해서, 어떤 실천을 하고 계신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도 아니고, 목표도 아니고, 서원입니다. 그 서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게 축복된 삶입니다. 그리고 그게 행복입니다. 그게 깨달음입니다. 그걸 떠나서 다른 것은 없습니다.
나는 미안마에서 출가하면서, 그 때 하나의 서원을 세운게 있죠. 부처님의 가르침에 헌신하겠다고 하는 서원을 나는 세웠어요.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서원이죠. 서원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붓다의 전생의 서원이라는 것도 얼마나 평범합니까? 모든 사람이 행복한,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그 행복 속에서 다르마를 체현할 수 있는 그러한 서원을 세웠잖아요. 이 보다 더 평범한 서원이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복된 사회를, 그런 세계를 이룩하겠다고 하는 서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붓다가 되신 거예요. 그 서원이 붓다의 서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서원은 중생의 서원이죠. 붓다의 서원이기 때문에 그 서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서원은 중생의 서원입니다. 모든 생명은 평화롭기를 원합니다. 모든 생명은 안락하기를 원하죠.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요? 혹시 여기 그런 분 계십니까? 행복할까봐 걱정되시는 분 계세요? 어떤 사람도 행복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평화롭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사람도 안락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하다 못해, 미물조차도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원하죠.
나는 매일 법당 안 작은 마당에서 경행(經行)을 합니다. 어제 저녁에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안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하지 않은 이유는 경행을 할려고 나가 보니까, 우리 지렁이 형제들이 수 없는 길을 만들어 놨습니다. 이따 가시면서 한 번 살펴 보세요. 어제 우샤스가 노래를 부르자 대지는 기쁨에 넘쳐 흘렀죠. 나무, 풀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어쩌면 제일 기뻐했던 것이 매마른 땅 속에 있던 지렁이 형제들이었는지도 모르죠. 간 밤에 신바람이 났는 모양입니다. 아예 마당을 갈았어요. 그래서 제가 경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나는 걷기 명상을 한다고 걷지만, 땅 밑의 지렁이들은 이러지 않을까요? '이 좋은 날, 누가 아침부터 이렇게 설치고 돌아다녀? 도대체 누구야? 끌어내 얼굴 좀 보자. 아직도 이 땅에 그렇게 뻔뻔스런 인간이 있는지 한 번 얼굴 좀 보자'고 지렁이가 그럴까봐, 지레 겁을 먹고 마당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다 못해 지렁이 형제들도 평화를 원합니다.
누구나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누구나가 평온하기를 원하죠. 누구나가 평온하기를 원하지만, 그 평온이 길게 유지되지 않는다는 거죠. 어느 때는 평온한데, 어느 때는 평온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호수처럼 평온한데, 누군가가, 대상이 움직이면, 그 평온이 순간적으로 깨지죠. 우리가 평온이 유지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자애심이 아파마나의 무량심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무량심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직 우리의 서원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하죠. 우리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명상을 하죠. 우리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사유하고, 우리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행동하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붓다의 서원의 성취는 그것이 붓다의 서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중생의 서원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서원은 붓다의 서원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태평하라! 안락하라! 그리고 행복하라! 부처님이 존재하는 것은 그 중생의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붓다의 존재의 의미는 서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서원이 없으면, 붓다가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붓다일 수는 없습니다. 경에서는 그것을 분명히 가리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빴쨔카 붓다나 아라하또라고 부르죠. 그러나 붓다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왜 붓다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붓다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아라하또나 빳찌카 붓다에게는 서원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바로 그 부처님의 서원은 우리의 마음 속으로 흐르죠. 우리의 마음의 서원은 붓다에게로 흐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붓다의 서원이 완결된 상태가 아닌 진행중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진행의 상태라는 것은 아직 그것은 종결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완결되지 않았다는 뜻이예요. 왜 완결되고, 종결되지 않았을까요? 한 사람이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서원은 완결되거나 종결되지 않기 때문이죠.
붓다께서 과거에 디판카라 붓다 앞에서 서원을 세웠듯이, 그 서원의 완결과 종결은 마이트레야가 이룬다. 그것이 불교의 역사관이예요. 그것이 불교의 역사입니다. 현겁의 붓다인 샤카모니 붓다가 과거의 붓다인 디판카라 부처앞에서 서원을 세웠듯이, 마이트레아가 샤카모니 붓다 앞에서 '제가 고통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모두 구원하여, 평화를 얻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서원을 세웠죠. 그 마이트레야가 이 땅에 와서 한 사람도 고통받는 사람이 없이 할 때, 그 때 비로소 역사는 완결되고, 종결되죠. 즉 서원은 완성되고, 종결된다는 이야깁니다. 단 한 사람이래도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완성과 종결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서원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언제, 어느 순간, 어디서 마이트레아를 만나겠죠. 마이트레아를 만나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두카는 사라지죠. 우리의 불만족과 우리의 불안정과 우리의 뒤틀려 있음과 우리의 불행은 그 순간 종결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서원을 세우고, 그 서원 속에 내 몸을 싣는 겁니다. 그 서원의 흐름 속에 내가 올라타는 겁니다. 그저 우리는 그 서원의 흐름 속에 올라타서, 그저 가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얻을려고 할 필요도 없고, 무엇을 하지 않을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을 억지로 되게 할 필요도 없고, 무엇을 잘 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되게 하려고 하지 마라! 잘 하려고 하지 마라! 억지로 하지 마라! 이 세 가지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잘 할려고 하는 병통이 있고, 우리는 되게 할려고 하는 병통이 있습니다. 억지로 하게 할려고 하는 병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면서 굉장히 자긍심을 얻죠.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자긍심을 만들어 주지만, 나에게 평화와 안식은 주지 못합니다. 왜 부처님이 되게 하려고 하지말고, 잘하려고 하지말고, 억지로 되게 하지 말라고 할까요? 그것은 흐름을 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흐름을 타야지, 흐름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대붕은 역풍비요, 생어는 역수영이라. (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물고기는 거센 흐름을 거슬러 헤엄친다.라고 하는 것도 흐름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흐름을 거슬른다고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 흐름을 올라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죠.
혹시라도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렇게 어려워서 어디 하겠냐?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것은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그 서원을 세우고, 디판카라 부처님이 그랬듯이, 샤카모니 붓다가 그랬듯이, 마이트레아가 그랬듯이, 그 서원의 흐름 속에 그저 올라타면 됩니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인 <자타카>는 바로 그 흐름에 올라탄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자 하는 거예요.
서원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줍니다. 찬불가를 보면, 보현행원이라고 하는 찬불가가 있죠. 그것은 중생의 서원을 이야기히고자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서원을 노래로 만든 거예요. 고려시대 때, 균여 스님은 향가로서 보현십원가를 짓죠. 그 향가는 바로 부처님의 서원을 설명한 겁니다. 부처님의 서원은 중생의 서원입니다. 중생의 서원이 곧 부처님의 서원이죠.
오늘의 강론의 주제는 서원입니다. 목적과 목표가 아니라 서원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원이 없는 목적과 목표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서원이 있어야만이 목적과 목표는 들숨과 날숨을 하게 되죠. 어제 우사스의 노래 소리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기쁨을 얻었듯이 말이예요. 그것이 바로 영원한 진리의 생명입니다. 부처님은 불사를 이야기 하시죠. 불사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즉 영원한 진리의 생명을 말하죠. 영원의 진리의 생명이 무엇인가요? 내가 기쁨의 생명으로 가득할 때, 그것이 진리의 생명입니다.
오늘의 강론은 81년의 인간 세상의 여행을 끝내고, 그 여행 중에 석두 최삼경과 최문경을 낳고 귀천하신, 우리 형제의 어머니인 용금례님에게 오늘의 강론을 올립니다. 용금례님께서 영원한 진리의 생명을 얻으셔서, 부처님의 진리 속에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얻기를 우리 선우님들과 함께 다같이 기원합니다.
다같이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어제 우샤스의 노래소리가 온 대지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땅위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유정과 무정이 모두 기쁨을 얻었습니다. 우샤스의 노랫가락 속에 모든 생명이 기쁨을 얻었듯이, 저희 또한 부처님의 서원 속에,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이 부처님께서 디판카라 부처님 앞에서 서원을 세웠듯이, 저희 또한 부처님 앞에서 서원을 세웁니다. 제가 영원한 진리의 생명을 얻어서, 평화와 안식을 얻고, 나와 내 가족과 내 이웃과 모든 살아있는 생명에, 마이트레아와 함께 평화와 안식을 얻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희들이 일심으로 서원하오니, 저와 제 가족이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행복과 평화를 얻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부처님의 서원을 생각하면서 잠시 좌선 입정을 하겠습니다. 탁 탁 탁(죽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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