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선원 -[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7장-6. 바른 생각이란 ;생각없이 앎'을 말한다
만법의 <남(生)이 없는 도리>와 <성품 없는 도리>는 진정한 수행자의 두 팔과도 같은 겁니다. 만약 이 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하면 그의 하는 일이 모두 '유위'(有爲)에 떨어져서 '마땅함'과 '마땅치 않음'의 양변에서 취하고 버리는 일을 쉬지 못할 테니, 이런 마음으로야 어찌 뜻(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법은 <현재에 일어나는 그대로인 채로 일어나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서, ― 그것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고, '빈 것'도 아니어서, ― <지금에 이렇게 '움직이는 마음'인 채로 그것이 '고요한 마음'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열반'(涅槃)의 지극한 결과인 겁니다.
이것이 곧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참뜻이며, '있음'과 '없음', '참'(眞)과 '허망'(妄), '지음 있음'(作)과 '지음 없음'(無作) 등 일체의 차별법을 걸림 없이 굴리면서 온갖 법에 두루하고 원만해서, 마침내 '불법'과 '불법 아님' 마저도 다하여 없어지면,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뜻'(聖旨)의 극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의 참뜻'(宗旨)은 인간의 이른바 '합리적인 사유'로 이해하고 짐작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며, 그야말로 미묘하게 그 뜻(旨)을 얻어야 비로소 <돌아가 합할 수 있는 것>(指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부르건, '진공'(眞空)이라고 하건, 그것들은 다만 '빈 이름'일 뿐이며, 끝내 그 자리는 일체의 '이름'이 붙을 자리가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글'이나 '말'만을 좇는다면 그것은 눈을 번히 뜨고 '삿된 소견'에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선현들이 이르기를, 「아무리 좋은 생각도 '생각 없음'만 못하니라」라고 했던 게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민절무기관(泯絶無寄觀)에 이르기를,··· 『이 관(觀)할 바 '진공'(眞空)은 '물질'(色)에 즉(卽)한다거나 즉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공'(空)에 즉한다거나 즉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온갖 모두가 옳지 않고, 옳지 않다는 것 또한 옳지 않으며, 이와 같은 말조차 붙지 않아서, 멀리 끊어져서 붙을 데가 없다. '말'로써 미칠 바가 아니요, '이해'(理解)로써 이를 바도 아니다. 이를 일러 '행경'(行境 ⇔ 解境)이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起心動念), 곧 '법체'(法體)에 어긋나고, '바른 생각'(正念)을 잃기 때문이다. 만약 지해(知解)를 지키면서 버리지 않으면 결코 '바른 수행'에 들어갈 수 없다.
따라서 수행은 지혜(智慧)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되, '참된 수행'이 일어나면 '지혜'는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뭔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됩니다. 즉 '문제'에 대한 묘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미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습니다. ―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아직 '법에 대한 집착'(法執)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머리가 혼란스럽고, 시비득실(是非得失)의 엇갈린 길목에서 지견이 마구 소용돌이치면서 도저히 그 의증(疑症)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법도 없고, 지녀야 할 법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난 다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범부들이 걸려든 올가미 중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 어찌 그것이 한둘이겠습니까마는 ― '해야 하는가'(有爲), '하지 않아야 하는가' (無爲) 하는 두 갈래 길에서 늘 이쪽 저쪽 하면서 서성이기를 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그들은 <'지음 없는 지음'(無作之作)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이 갈림길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머리를 굴리기를 쉬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正念)을 잃게 되는 거예요.
'있다'고 하면 있는 줄로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로만 아는, 이 범부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은 아주 고질적입니다.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이룬 '큰 보살'들은 결코 '수'를 내기 위해 애쓰는 일은 없다>고 들으면, 금방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그냥 사태의 흐름에 맡기고 조작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는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던가, 아니면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취해서는 그것으로써 '올바른 뜻'이라고 여기면서 망식(妄識)을 굴리기를 쉬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회심(廻心)의 묘한 이치>를 알 수 있겠어요?
어째서 <지금처럼 그렇게 '하는 것'(有爲)이 바로 '하지 않는 것'(無爲)이라는 사실> 을 깨닫지 못할까요? 모름지기 '참된 가르침'이라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을 버리고,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속절없이 인연을 따르면서 이쪽 저쪽 하는 '유위행'(有爲行)이요, '생사법'(生死法)일 수밖에 없을 테니, 그것을 어찌 '참된 법' 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지금에 이렇게 자세히 펼쳐 보여줘도 여전히 이 말 가운데서 어떻게든 규범을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범부의 근성입니다. 만약 지혜로운 이라면 어찌 황금을 가지고 황금을 바꾸기 위한 궁리를 계속할까 봅니까?
그 지견(知見)에 묘한 '수'가 있으면 곧 생각을 움직이게 될 게 뻔합니다. 불문곡직하고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起心動念) 곧 '바른 생각' (正念)을 잃게 되는 겁니다. 요약컨대, 여기서 <'바른 생각'이라 하는 것은 곧 '생각 없이 앎'을 말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아주 '앎이 없다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인 겁니다. 모름지기 깊이 살펴서 행할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