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6. 11:4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6년 7 월 9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지 마라!
아, 오늘 공지사항부터 먼저 말씀드리고 하겠습니다. 이번 주 화요일(7월 10일) 저녁 6시반부터 수행을 할 생각입니다. 참가하시고 싶은 분들은 시간 나는대로 참가하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수행을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차 마시는 오감 명상에 대해 설명하고, 그렇게 될 겁니다.
오늘 주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지 마라!
빠사나디왕이 부처님을 찾아 뵙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죠. "부처님 제가 생각하건데, 자신보다 소중한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이 옳은지요? "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빠사나디야!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은 더 없이 소중하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자신을 더없이 소중히 여긴다는 거죠. 이것을 재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의 행복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행복은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죠. 자신의 행복은 더없이 소중히 여기는데, 다른 사람의 행복은 지켜주는데 인색하죠. 사람은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요?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젠가요? 내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행복은 내가 존중받는다고 느낄 때, 내가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끼죠.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언제 느끼는가요? 다른 사람이 양보하는 마음을 보일 때, 다른 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보일 때, 다른 사람이 격려하는 마음을 보일 때,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마음을 보일 때, 나는 그 때 내가 존중받는다고 느끼고, 존중받는다고 생각하죠. 겸손과 양보, 격려와 칭찬은 타인의 자존가을 높여주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만들어 주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존중받는다고 느끼고, 생각할 때.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죠.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내가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것과 동일하죠.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누구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지, 누군가의 행복을 추구하진 않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과 연대하죠. 내가 타인과 연대하는 것은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죠. 그 이야기는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아야, 타인도 나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죠.
우리는 그런 것들을 너무 많이 보죠. 우리가 일례로 보면, 그렇습니다. 가족간에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은 다 사요. 자기가 누리고 싶은 것은 다 누립니다. 그러다 막상 배우자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하죠. "그걸 왜 할라구 그러는데?" 자기가 누리고 싶은 건 다누렸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죠. "내가 그 동안 못해 준게 뭐 있어?" 자기만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도 그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리죠.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이 명예가 있는 사람이 되었든, 명예가 없는 사람이 되었든, 권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든, 권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든, 돈 있는 사람이 되었든, 돈 없는 사람이 되었든,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하기를 원하죠.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모든 사람이 행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행복이 부족하다고 여긴다는 거죠.
요새 일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고독사입니다. 고독사라고 하는 것은 아무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혼자 쓸쓸히 죽는다는 거예요. 그 주검조차도 거둬줄 사람이 없는, 그것이 일본에서는 지금 굉장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바로 이 고독사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다뤘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자 쓸쓸히 죽어가고, 죽은 후에 어느 누구도 그 주검을 거둬주지 않는지를. 그것이 사회문제화 될 정도로 너무 많다는 거죠. 일본 사회가 말이예요. 경제적으로 부유한 일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죠. 우리 언론에도 가끔 이 고독사에 대한 이야기가 실리죠. 아마 우리도 10년, 20년 쯤 지나면, 이 고독사가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될꺼예요. 그마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얘기죠.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은 나와 무관하다고 여기죠. 부처님은 말씀하시죠. 이 세상에 나와 무관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관하다고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할 뿐이지, 우리 모두에게는 연관 관계가 있죠.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죠.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만,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의 근거를 잃게 됩니다. 연대는 우리 존재의 바탕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빠사나디가 와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저 자신입니다.'라고 했을 때, 부처님은 긍정했어요. 동시에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죠.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은 더 없이 소중하다. 이 이야기의 방점은 '자신이 더없이소중하다'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에 있을까요? '다른 사람에게도'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거예요. 너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거예요. 너만이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너처럼 행복을 생각한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존엄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인간의 존엄은 스스로가 존엄하다고 느낄 때, 느끼죠.
아까 제가 타인에게서 4가지 마음을 보았을 때, 존중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어요. 4가지 마음을 보았을 때, 내가 무엇을 느낄까요? 내가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느끼죠. 타인이 나를 배려해주고, 타인이 나에게 무한한 연대를 보일 때, 우리는 행복하죠. 설사, 수 많은 사람과 함께 서 있다 할지라도, 그들과 내가 연대되지 않는다면, 나는 혼자입니다. 설사 내가 히말라야 정상 위에 혼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연대한다고 느낄 때, 나는 혼자가 아니죠. 아까 일본의 사회문제화가 되고 있는 고독사를 거론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누구나 죽으면, 주검을 남기죠. 어무도 그를 거두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존엄을 표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죠.
인간이 인간에게 존엄을 표하지 않을 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가 없죠.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같은 인간에게 존엄을 표하기 때문이예요. 침팬지나 오랑우탄 같은 경우는 같은 종에게 존엄을 표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류에게 존엄을 표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죠. 현대사회의 위기는 식량의 위기도 아니고, 환경의 위기도 아니죠. (쩝 ) 존엄의 위기죠. 인간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죠.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을 소모품 취급한다는 거죠. 마치 일회용 컵처럼 말이예요.
우리의 적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지만, 자기만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죠. 근데 우리는 자기만이 존재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갈려고 하는지도 몰라요. 그 단적인 예가 고독사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건지도 모르죠.
부처님은 말씀하시죠. 가장 소중한 것은 너 자신이다. 가장 존엄한 것은 너 자신이라는 거예요.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에 대한 배신입니다. 타인의 인격에 예를 표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멸시와 무시죠. 부처님은 말씀하시죠. 스스로를 저버리지 않고는 타인을 저버릴 수 없다고 하셨어요. 자신의 존엄을 부정할 때, 타인의 존엄을 부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는 것은 스스로의 행복을 부정하는 거라는 거죠.
우리가 뭐라고 이야기해도, 자신의 행복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스스로를 불행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근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것에 소홀하죠. 가장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너무 소홀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는 말을 너무 쉽게 하죠. 그런 말이 있죠. '칼로 입은 상처는 아물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왜 말로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을까요? 그것은 마음으로 입은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요새 가장 유행하는 말로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어요. 힐링(healing)과 해피니스(happiness)는 한 짝이죠. 왜 불교에서 마이트레야를 구원불이라고 할까요? 마이트레야를 구원의 부처님이라고 그래요. 마이트레야를 구원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이트레야가 이 땅에 왔을 때, 힐링과 해피니스가 이루어지기 때문이예요. 힐링이 없으면, 보네르(bonheur: 불어로 행복,행운, 기쁨, 즐거움)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이트레야를 구원불이라고 그러죠.
마이트레야라고 하는 말의 뜻은 '사랑과 평화'라고 하는 뜻이예요. 왜 구원불의 이름의 뜻이 사랑과 평화일까요? 나는 마이트레야가 사랑과 평화의 뜻이라는 걸 알고 너무 감격한 적이 있어요. 이보다 더 좋은 뜻을 가진 말이 있을까? 왜 미래에 오실 부처님의 이름이 사랑과 평화일까요? 힐링과 해피니스라 하는 것도 사랑과 평화라고 하는 것의 범주 내에 있죠. 사랑과 평화가 없는 힐링과 보네르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일은 '혹시 나는 나만의 행복을 생각하고 타인의 행복을 침해한 적은 없을까?' 오늘의 주제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마라!' 이거 아입니까? 부처님은 이 가삿자락을 화합의(和合衣)라고 그랬죠. 가사는 화합하는 옷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화합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사랑과 평화가 화합입니다. 다른게 화합이 아니잖아요. 사랑과 평화가 화합이잖아요. 행복이 화합이죠. 화합이라는 것이 잘 지내자고 악수하는 것이 화합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잘해보자고 하는 것이 화합은 아니잖아요. 화합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평화가 화합이죠. 타인과 연대해서 그의 사랑을 지켜주고, 타인과 연대해서 그의 환경을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게 화합이죠. 우리가 사랑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사랑과 평화 속에 있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우리 속담에 그런 말이 있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인간 위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 장소에는 왕에서, 바라문에서, 길거리의 여자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죠.
바라문 출신의 제자가 하루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베다어로 하시지요. 어떻게 성스러운 가르침을 천한 것들이 쓰는 속어로다가 하시는지요? " 부처님의 경전을 기록한 언어, 빨리어는 속어입니다. 그 당시 민중이 쓰는 언어죠.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전에는 상층들은 베다어라고 하는 샨스크리스트어를 썼어요. 그들만의 언어를 썼죠. 그들의 법전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죠. "만약에 수드라가 베다어를 읽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파라. 만약에 수드라로서 베다어를 쓰는 자가 있으면, 그 손목을 잘라라. 만약에 수드라로서 그 베다어를 알아듣는 자가 있으면, 그 귀에다 뜨거운 쇳물을 부어라!" 바라문 출신의 붓다의 제자는 부처님의 말씀은 베다어로 전해져야 된다고 말씀드렸죠.
그 때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그들의 언어로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존귀한 자가 어디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천한 자가 어디 있더란 말이냐? 도대체 네가 무슨 공이 있어 본래부터 바라문이더냐? " 이 말씀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거예요. 그가 권력자이든, 그가 명예가 있든, 그가 돈이 있든, 그가 권력이 없든, 그가 돈이 없든, 그가 명예가 없든, 모든 인간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존엄하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러면서 말씀하시죠. "모든 강물은 흘러서 바다에 이르는데, 그 때 바닷물 맛이어떤 차이가 있갰냐? " 그렇습니다. 영산강, 한강, 섬진강, 낙동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모든 물은 바다에 흘러 들어가죠. 어떤 절대의 미각을 가진 드라마의 대장금이 온다고 할지라도, 바닷물에서 그 맛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드라마에서 대장금을 절대 미각이라고 하죠. 그도 바닷물 속에 섞인 낙동강, 섬진강, 영상강, 한강, 대동강, 압록강, 이 물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자하는 것은 단순 간명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지 말라! 어느 누구도, 그가 권력자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침해할 권리는 없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지만, 일본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고독사는 인간 존엄에 대한 배신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마이트레야가 와서 이 땅에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마이트레야가 이 땅에 오게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과 평화를 이룰려고 하는 노력에 있는 거죠. 그가 어느 날 와서, 뜬금없이,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을 두드려 깨워서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우리가 사랑과 평화를 만들려고 노력할 때, 그 때 마이트레야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죠. 마이트레야를 만드는 것은 사랑과 평화에 대한 우리의 서원이라는 얘기입니다.
오늘의 강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선우님들 중에서 누가 기도를 이끌어 주시죠. 기도 이끌어 주실 분이 없는가요? 그럼, 다 함께 합장하시죠.
사랑과 평화의 부처님! 저희들은 행복한 삶이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은 행복한 삶을 추구합니다. 저만의 행복이 아니라 나와 관계 있는 모든 사람과 나와 관계없는 모든 생명들, 이 땅의 모든 인류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지금 행복한 사람이 있고, 행복이 부족한 사람이 있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다음 날에는 행복이 부족했던 사람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하는 희망을 저는 잃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선우들과 저희 가족들, 그리고 저희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행복의 축복있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잠시 행복 명상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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