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3. 11:4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6년 7 월 15일 좋은 밭에 먼저 씨를 뿌려라!
오늘 주제는 '좋은 밭에 먼저 씨를 뿌려라!'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마을에 머무르고 있을 때, 부락의 촌장이 부처님께 이와같은 질문을 드린 적이 있죠. "세존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 자애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이익되게 하면서, 어느 사람에게는 자세히 법을 설하고, 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부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세하게 법을 설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자세하게 법을 설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촌장이 묻고 있습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촌장이여! 그대는 이럴 경우에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기에 한 농부가 세 밭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 중에 한 밭은 비옥한 밭이고, 다른 하나의 밭은 보통의 밭이고, 나머지의 한 밭은 모래 밭인데다가 염분까지 섞여 있는 박토라면, 이 밭에 씨를 뿌리고자 할 때, 그대 같으면 어찌 하겠는가?" 그러자 촌장은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죠. "물론 가장 좋은 밭에 먼저 씨를 뿌릴 것입니다." 부처님은 비옥한 밭과, 보통의 밭과 박토인 밭이 있다면, 가장 좋은 밭에 뿌린다, 씨를 뿌려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비옥한 밭에 먼저 씨를 뿌린다고 하는 이 말씀 말이예요.
부처님께서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 받아들인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거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야사비구를 만났을 때 이야기를 우리가 다시 꺼내서 읽어보면, 부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시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죠.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미가다에서 오비구에게 설법하시고, 그 미가다에 머물를고 있을 때예요. 어느 날 어둠이 걷히기 시작할 무렵, 화려한 카시 비단을 걸친 젊은이 하나가 자기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걸오고 있었죠. "괴롭다 괴로워, 재앙이다, 재앙이로다." 그 청년은 야사라고 하는 청년이었어요.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었죠. 그는 집안에서 너무 귀하게 키워서 황금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라고 이야기하죠. 그가 어느 날 새벽에 형언할 수 없는 스스로 삶에 대한 고통이 밀려오죠. 그래서 신발도 신지 못하고 헤매다가 부처님이 계신 그 곳에 도착했죠. 그 때 부처님은 야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죠. "이 곳에는 고통과 재앙이 없다. 이리 와서 앉거라" 그러자 청년은 낯선 붓다에게 가까이 와서 앉죠. 그의 얼굴은 창백햇고, 그의 눈빛은 공허했죠.
부처님은 그에게 처음에 생천론(生天論)을 이야기하죠. "생천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 나눔을 실천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면, 죽어서 신들이 사는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라는 것이 생천이죠. 부처님은 그에게 처음에 생천론을 이야기하죠. 아마 경전에는 단순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야사는 미가다에 한 동안 머물르면서 붓다 곁에 있었겠죠. 붓다는 야사에게 인내하는 마음, 사고가 유연한 마음, 탐진치 삼독을 멀리 여의는 마음, 환희하는 마음, 맑고 깨끗한 마음이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음을 알고, 비로소 야사에게 가르침을 설하죠.
부처님이 야사에게 처음에 생천론을 이야기하지만, 진리의 말씀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야사가 마음이 준비되었음을 알고, 가르침을 설하죠. 부처님께서 가장 좋은 밭에 먼저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바로 야사비구의 예를 보아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좋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이고,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가장 좋은 밭을 준비하는 것이 되겠죠. 부처님이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뭘까요? 먼저 무엇을 하고, 나중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죠. 먼저 해야 될 것이 뭐냐? 나중에 해야할 것이 뭐냐? 먼저 해야될 것과 나중에 해야할 것이 뒤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먼저 해야될 것이 뭔가요?
부처님께서는 야사에게서 인내하는 마음이 일어났고, 사고가 유연한 마음이 일어났고, 탐진치 삼독을 멀리 할려는 마음이 일어났고, 환희한 마음이 일어났고, 깨끗한 마음이 일어났음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가 준비되었음을 알았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세 단계로다가 이야기하시죠. 첫 번째, 배우는 단계, 두 번째 익히는 단계, 세 번째 숙달하는 단계.
처음에는 배워야 된다는 거예요. 배우지 않으면 알 수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성에 의해 알 수 있고, 직관에 의해 알 수 있고, 체험에 의해 알 수 있고, 경험에 의해 알 수 있고, 과학적 지식에 의해 알 수 있죠.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거에요. 저번에도 얘기 했지만,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죠.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성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본성이라고 하는 언어의 의미는 적어도 동양에서는 적어도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것을 말하죠.
유럽의 계몽시대 때, 철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늑대인간이었어요. 야생의 인간이라고도 부르고, 늑대인간이라고도 부르죠. 그저 영화에 나오는 그런 늑대인간 말고요. 그 시대는 숲 속에서 어떻게 되어서인지 늑대의 무리 속에서 발견되던 아이들이 종종 있던 시대예요. 아기를 늑대가 물어가서 키운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유기한 것을 늑대가 키운 것인지, 늑대의 무리 속에서 자라난 늑대인간은 네 발로 기었고, 늑대처럼 울부짖고, 늑대처럼 먹는 것 밖에는 할 줄 몰랐어요. 말을 가르칠려고 했지만, 말을 배울 수가 없었어요. 그 아이들을 보면서, 그 시대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딜레마에 빠졌죠. 도대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에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면, 어째 저 아니는 네 발로만 기려고 하고,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고 늑대처럼 울부짖기만 할까?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10세 이전에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언어는 배울 수가 없어요. 언어를 관장하는 뇌가 퇴화되거든요. 우리가 본성론을 이야기하지만,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뜻해요. 결국 인간은 후천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예요. 첫 단계는 배우는 단계죠.
두 번째는 그 배운 것을 익히는 단계고요. 배운다 그래서 그것이 내면화되지 않습니다. 반복된 연습을 통해서 익혀야죠. 익혀서 그 익힌 것이 내 세포 하나 하나에 저장되어야 되어야죠.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랑을 연상시키는 것은 우리의 세포 속에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예요. 그것이 저장되어 있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도 우리는 늑대인간처럼 아무 감정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하죠. 익히지 않으면 안 되죠. 익혀서 그것이 내면화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것을 숙달시키라 그랬죠.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기름을 파는 장사꾼이 있었는데, 이 장사꾼은 얼마나 기름 파는 것이 숙련이 되었는지, 기름을 사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층에 살면서 병을 그 바닥에 내려 놓으라 그랬다는 거예요. 그 집에 기름을 사러 오는 사람은 이층까지 올라오지 않고, 베란다 밖에 일층에다가 기름병을 놓는다는 거죠. 그럼 그 사람이 이층에서 기름을 따라 준다는 거예요. 근데 얼마나 절묘한지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의 각도에 따라서 따른다는 거예요. 동쪽에서 바람이 불면, 항아리에 그 기름이 떨어지는 기름이 서쪽으로다가 원을 그리면서 완전히 휘어서 떨어진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의 묘기를 보기 위해서 필요없 기름을 사러 오기도 했다고 하죠. 바람의 각도에 따라서 이층에서 기름을 붓는데, 한 방울도 옆으로 새지 않았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죠. 기름 장사도 그것이 처음부터 숙달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익히고 익혀서 숙달된 것이라는 거예요. 기름 장사도 바람에 흔들리는 기름을 절묘하게 기름병에 담는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배우고, 익히고, 숙달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좋은 밭은, 비옥한 밭은, 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내가 준비된 사람인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인가? 부처님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겐 주어도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씨앗이 있어도 모래밭에 소금기까지 있는 밭에다 뿌린다면 씨앗은 싹틀 수가 없죠. 6, 70년대 대한민국은 오직 하나의 정체성만 존재했죠. 아마 그 정체성은 현재, 지금의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것이 목적이었으며, 그것이 목표였으며, 오직 그것을 향해서 대한민국이 달려갔죠. 혹시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 재한민국의 정체성? 그거 반공 아니여?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잘 살아보세'입니다.적어도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래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하나 밖에 없었어요. 잘 살아보세.' 잘 먹고 잘살아보자'라는 정체성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어요. 삶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행복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어떠한 사회를 만들어야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대한민국호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라고 하는 고민도 없었어요. 그저 오직 하나 밖에 없었죠. 잘 살아보자. 잘 먹고 잘 살자.
70년대에 잘 살아보세라고 하는 그 구호가 아침, 저녁으로 깃발처럼 휘날리던 시절에, 서울대 농학과 교수 허문회라고 하는 분이 통일벼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냈죠. 식량 자급을 해야만이 잘살아보세가 적어도 의미를 갖게 되는 시대이기도 했죠. 정부에서는 통리벼를 처음으로다가 밥맛 시식을 했죠,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밥맛이 가장 좋다, 좋다, 나쁘다, 이런 단계별이 있었죠. 제일 먼저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벼 밥을 먹었죠. 그리고 그 표에다가 동그라미를 쳤죠. 그리고 그 옆에다 박정희라고 이름을 썼어요. 어디다가 이름을 썼을까요? 당연히 가장 좋다라는데 박정희는 표를 했고, 그 옆에다가는 박정희라고 하는 이름을 썼죠. 그 앞에 놓인 밥들을 먹은 장관과 수석들에게도 그 표는 돌았죠. 가장 맛이 좋다에 동그라미가 쳐있고, 그 옆에 박정희라고 하는 이름이 써 있는데, 감히 어느 누가 감히, 맛이 없다에 동그라미 치고, 자기 이름을 쓰는 국무위원과 수석이 어디 있었겠어요. 적어도 그들이 좀비가 아닌 이상에는. 그 날 국무위원회에서는 결정이 되었죠. 통일벼는 가장 맛이 좋은 쌀인 걸로.
그리고 그 통일벼는 보급되었죠. 우리 유년기에는 다 기억이 있죠.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통일벼 못자리를 하지 않으면, 면사무소 직원들과 농촌진흥청 직원들이 나와서 못자리를 발로 밟았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통일벼를 심어야 했죠. 통일벼는 소출이 많이 나는 대신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어요. 그것은 냉해에 약하다는 거예요. 통일벼가 아닌 벼는 노지에서 묘표장을 만들어도 되지만, 통일벼는 반드시 비니루를 씌워야 했어요. 통리벼의 결정적인 약점은 병충해에 너무 약하다는 거예요. 통일벼를 강제로 장려하다보니까, 통일벼를 재배하기 위해서 비니루를 사야했고, 농약을 평상시 아끼바리보다 두 배, 세 배를 쳐야 했죠. 비료도 더 많이 쳐야 했고요. 그래서 농촌이 그 때부터 빚더미에 올라가기 시작하죠. 통일벼는 고비용에 비해서 굉장히 저효율적인 벼였어요.그런데도 통일벼는 시험재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통일벼로 강제로 보급했던 박정희가 죽자 통일벼는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렸죠.
내가 왜 통일벼를 이야기하냐면, 통일벼는 아무 재배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는 것, 제대로 경작 시험이라고 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졸속으로 국가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보급된 거예요. 그 재앙은 농민들의 빚으로 남았어요. 병충해와 냉해에 약했기 때문에 냉해를 입어서 흉년이 왔고, 소위 박동선 파동은 그 때 나기 시작했죠.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설사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았다할지라도, 즉 익히고 숙달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그것은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좋은 밭에 먼저 씨를 뿌리라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좋은 밭에 먼저 씨를 뿌리고, 그 다음에 여력이 생기고, 시간이 있으면, 보통의 밭을 비옥한 밭으로 바꿀 수가 있죠. 그 다음에 보통의 밭도 비옥한 밭으로 만들었다면, 모래밭이고 염분이 섞인 그런 밭에 물을 대서 염분을 빼고, 객토를 해서, 좋은 비옥한 밭으로 만들 수 있겠죠.
부처님은 순서를 뛰어 넘어서 무엇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순서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준비하는 거. 준비되어 있지 않는데도 무작정 들어민다 그래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부처님이 촌장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준비하라는 거예요. 지금 당장! 배우고, 익히고, 숙달시키라는 거죠. 그것이 바로 좋은 밭에 씨를 뿌리는 거와 같다는 거예요.
오늘의 주제가 '좋은 밭에 씨를 뿌려라' 입니다. 좋은 밭을 장만하세요. 좋은 밭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그 밭은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땀으로 만들죠. 노력과 땀이 없이는 좋은 밭이 생긱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옥토가 생기지는 않죠. 좋은 밭은 쭉정이 씨앗을 뿌려도 좋은 결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봄에 아시는 분이 접시꽃 모종을 긴 판으로 세 판을 갖다 주셨어요. 언덕에도 꽂고, 여기도 심고, 저기도 심고, 심어도 심어도 심을 곳이 없어요, 너무 많아서. 그래서 가식을 했다가 며느리밥풀꽃이 힘을 잃었을 때, 베어버리고, 거기다 꽂았죠.나난 가끔 며느리밥풀꽃 대신에 서 잇는 접시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죠. 얼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비교적 저 좁은 밭뙈기 안에서도, 거름기가 많은 곳에서 굉장히 많이 크고, 무성해 졌어요. 나는 접시꽃 입사귀가 호박잎처럼 저렇게 커지는 건 처음 봤어요. 똑같이 꽂았는데, 어느 곳에는 지금, 한 뼘도 못 큰 곳이 있어요. 심을 적에 내가 차별해서 심었던 것은 아니예요.근데 어떤 놈은 한 뼘은 고사하고, 아직 이제 땅에서 겨우 엄마, 엄마 하고 있죠. 부처님이 좋은 밭에 씨를 뿌리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어느 분이 마, 기도를 이끌어 주시겠는가요?
자, 합장하시죠. 기도는 우리 불자님들이 돌아가면서 이끄셔야 되는데...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부처님께서 가장 좋은 밭에 먼저 씨를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좋은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보다, 좋은 밭을 먼저 만드는 농부이고 싶습니다. 좋은 밭에는 서투른 농부라 할지라도, 좋은 곡식을 키우고,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밭만 있다면, 설사 농부가 아니라할지라도 좋은 농사꾼이될 수 있습니다. 좋은 농사꾼이라 할지라도, 박토에서는 좋은 농사꾼이 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좋은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보다 먼저 좋은 밭을 만드는 농부가 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배우고, 익히고, 숙달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정신이며, 그것이 부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불자와 그 가족들에게 자비의 성수를 뿌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기원하옵니다. 싸두 싸두 싸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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