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만따바드라(samanta-bhadra)|…… 혜천스님설교

2019. 10. 19. 16: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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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2556년 7 월 22

만따바드라(samanta-bhadra)

 

 

아, 비가 오네.

오늘 주제는 사만다바드라입니다. 사만따바드라.

 

불교는 카빌라의 잠부나무 아래에서 잉태되고,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죠. 그리고 베나레스의 사슴동산에서 성장했습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베나레스의 사슴동산에서 전도선언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 분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미가다에서 비구들에에게 전도를 떠날 것을 독려 하시죠.

 

"비구들아!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마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또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그들도 법을 듣지 못한다면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깨달을 것이 아닌가?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르빌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이것은 부처님께서 미가다에서 61명의 제자가 생겼을 때, 제자들을 각지로 보내면서 격려를 하신 설법이예요.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누구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전도를 떠날 것을 격려하죠.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되고, 안락이 되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하라고 얘기하죠. 이 전도 선언이 없었으면, 우리는 그 분을 만날 일조차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보통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요. 부처님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불교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미가다에서 비구들에게 전도선언을 하고, 각지로 제자들을 보냈기 때문에 불교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 전도정신은 싸만따바드라(Samanta-Bhadra/Samanta-Bhadri : 주)보현보살, 뜻은 全善)예요. 싸만따바드라는 산스크리스트어로 널리 '축복을 내리다' 이런 뜻입니다. 널리 축복을 내린다는 것이 싸만따바드라예요.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라고 이야기하죠. 매일 눈을 떠면 하루에 한 번, 매일 전도선언을 한 번 외워 보세요. 매일 전도선언을 하루에 한 번 읽으면, 아마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겝니다.   

 

왜 부처님께서 먼저 이익을 이야기 하셨을까요? 부처님이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 판소리 다섯 마당 중에 수궁가라고 하는 것이 있죠. 그 수궁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용왕이 병이 들어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누가 나와서 용왕에게 토끼간을 먹으면 병이 나을 거라 그러죠. 그래서 용왕이 주부벼슬을 살고 있는 자라에게, 세상 밖에 나가서 토끼 간을 구해올 것을 명령하죠. 우리가 주부 벼슬을 가진 자라를 별주부라고 부르죠. 이름이 주부가 아니고, 그의 벼슬이 주부기 때문에 별주부입니다. 별주부는 세상에 나가서 토끼 간을 구해오라 그러니까 난감하고, 난감하죠. 어떻게 토끼간을 구해올 것인가? 세상 밖을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데... 용왕의 명령이니, 충성스런 신하가 따르는 것이 당연하죠. 그의 안내가 말리죠, 누구 과부 맨들라고 그러냐고. 세상 나가지 말라 그러죠. 아, 그까짓 벼슬 그만두면 되지. 그러나 별주부는 뭔 고집인지, 충성심 때문인지, 명예심 때문인지,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상 밖으로 나오죠. 나와서 우여곡절 후에 토끼를 만납니다.  

 

토끼를 만나서 별주부가 토끼를 어떻게 설득해서 용궁으로 데려가는가요? 이익을 이야기 하죠. 네가 용궁을 가면, 벼슬을 살 수 있고... 여러 가지 이익을 이야기 하죠. 부를 얻을 수 있고, 귀를 얻을 수 있고, 공명을 얻을 수 있고, 영화를 누릴 수 있다. 토끼가 그 말에 솔깃해서, 정확히 이야기 한다면, 이익에 눈이 멀어서, 죽는 줄도 모르고 별주부를 따라서 털레털레 용궁으로 가죠. 별주부는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 갈 적에, 다른 무기를 쓰지 않아요. 이익이라고 하는 무기를 쓰죠. 토끼는 산 속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죠. 호랑이 울음소리만 나도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여우만 만나도 가슴이 벌렁벌렁하죠. 그야말로 토끼가 산 속에서 안락할 때는, 토끼굴 속 밖에 없어요. 토끼굴을 빠져 나오는 순간, 어쩌면 그 산중에서 가장 힘없는 짐승이기도 하죠, 토끼가. 그렇기 때문에 토끼에게 이익을 제시하니까, 주변 동물들이 토끼가 용궁에 가는 것을 말리는데도, 꾸역꾸역 따라가죠. 토끼를 용궁에 데려간 것은 별주부가 아니라 이익이죠.         

 

부처님께서도 이익을 먼저 이야기 해주라는 거예요. 부처님이 말하는 이익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요? 부처님이 말하는 이익은 생천(生天)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네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 죽어서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거죠. 가장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무기가 이익인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부처님은 생천을 이야기 하셨다 그랬어요. 네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 죽어서 영화를 누릴거란 거죠.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분명히 이야기 하죠. 사람들 중에는 더러움이 적은 사람도 있다. 즉 마음의 더러움을 말해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지는 거를 말하죠. 부처님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란 것이 뭔가요? 세상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거를 말하죠.   

 

스페인에 바로셀로나라고 하는 축구팀이 있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팀이죠. 그 감독이 전에 이런 말을 한적이 있어요. 축구라는 것이 뭐냐? 축구라는 것은 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을 공유하는 것, 그게 축구다. 축구라는 것은 한 사람이 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모든 선수가 그 공을 공유하는 것, 그게 축구라고 그랬어요. 공감한다고 하는 것은 공유하는 것을 말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디따(무띠따 muditta )를 이야기하죠. 무디따라고 하는 것은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근데 여기서 기뻐하는 마음은 내 자신의 기쁨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기쁨은 삐띠(piti)라고 하는 말을 쓰죠. 무디따는 타인의 성취를 기뻐해주는 마음을 말해요. 우리가 사무량심 중에 세 번째,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디따입니다. 내 스스로의 성취를 기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성취를 기뻐해주는 것이 무디따예요. 자신의 성취를 기뻐하는 마음은 삐띠라고 하는 말을 쓰죠.   

 

불교에서 환희심(歡喜心)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환. 환이라고 하는 거는 삐띠예요. 스스로의 기쁨을 말하는 거예요. 희는 무디따,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는 거를 말해요. 환희라고 하는 말을, 환희심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쓰지만, 환과 희는 의미가 다르다는 얘기예요. 환은 자신의 성취를 기뻐하는 것이고, 희는 타인의 성취를 기뻐해주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무디따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성취를 잘 공감하지 못하죠. 타인의 성취 뿐만 아니라 타인의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윤리와 도덕이라는 하는 것을 추상적으로다가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죠.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거를 말하죠. 부처님은 바로 그 이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로셀로나 축구감독이 이야기하듯이, 공을 한 사람이 소유하면 축구경기는 성립되지 않아요. 그 공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기 때문에 축구라고 하는 경기가 성립되죠. 그 어떤 선수도 경기장 안에서 공을 혼자만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의 소유자는 아군 뿐만 아니라 적군인 상대편 선수들과도 함께 공유하죠. 공을 하난 놓고 적과 아군이 공유하는 것이 축구죠. 우리 인간 세계는 어느 누구도 혼자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소유물은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것은 내 몸이죠. 내 몸만이 내 소유예요. 그 외에는 내 소유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죠. 네 몸이라고 해서 어찌 그것이 네 소유냐?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적어도 내 몸은 내 소유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몸을 잃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걸 잃는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 전에 어떤 한의원에 갔더니 한의원에 이렇게 씌어져 있어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잃는 것은 작은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큰 것이다. 건강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내 몸이잖아요. 내 몸을 잃는 거보다 가장 큰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 번의 기회를 이야기하죠. 우리에게는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뭐냐?  내 몸을 소유했을 때, 그 기회를 살려야 된다는 거예요. 내 유일한 소유가 뭐예요? 내 몸이잖아요. 내가 내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부처님은 기회를 살려야 된다 그랬어요. 어떤 기회를 말하는 것일까요? 행복의 기회와 안락의 기회입니다. 다른 거 없어요.

 

우리가 행복하고, 안락하지 않으면, 존재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익과 행복과 안락은 말로써는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우리 삶에서는 이익과 안락과 행복이 분리되지 않지요. 공간에서 김덕수와 그의 친구들이 사물놀이라는 것을 처음으로다가 연주를 하죠. 사물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풍물 중의 하나입니다. 본래 바깥에서 벌이는 연회이지, 그것이 집안에 들어와서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김덕수, 이광수, 김종배 이런 사람들이 그것을 실내로다 가지고 들어와서, 앉아서 처음으로다가 사물을 연주하죠. 이것은 대한민국에 새로운 문화를 여는 놀이가 되었죠. 이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징과 북,장고, 그리고  꽹과리가  연주되는 거죠. 사물 연주를 한 번 들어 보세요. 징과 꽹과리와 북과 장고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죠. 한 마디로 말해서, 어울림이죠. 사물을 듣도 있으며, 징은 징으로서 역할을 하고. 꽹과리는 꽹과리의 역할을 하고, 북은 북의 영할을 하고, 장고는 장고의 역할을 하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네 가지 소리가 다 나옵니다. 북소리도 들리고, 장고소리도 들리고, 징소리도 들리고,  꽹과리 소리도 들리고... 그 네 가지가 조화를 이루죠. 그게 사물이죠. 마치 그것처럼, 이익과 행복과 안락이라고 하는 것도, 셋은 마치 사물이 동시에 어우러지는 것과 같이, 이익과 행복과 안락도 동시에 옵니다. 그것은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 삶에 있어서 최고의 이익이 뭡니까? 명예를 얻는 걸까요? 권력을 얻는 걸까요? 돈을 가지는 걸까요? 아니면 사랑을 얻는 걸까요? 우리 삶의 최고의 이익은 행복을 얻는 겁니다. 내가 행복한 거예요. 내가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내가 권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내가 명예가 있어도 행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우리 삶에 있어서 최고의 이익은 행복이예요. 행복보다 더 큰 이익이 없어요. 만약에 행복을 파는 가게가 있으면, 기꺼이 텐트치고 몇 날, 몇 일이라도 기다려서, 인생의 행복을 살 사람이, 지구촌 사람 중에 적어도 99.9%는 그 가게 앞에 설 거예요. 내가 왜 100%라고 안 그러느냐? 오다가 못올 사람도 있잖아요. 다리가 아파서 못 오고, 아니면 나이가 너무 많으셔서 행복을 살려고 105살에 떠나서 오다가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99.9%. 만약에 행복을 파는 가게가 있다고 치면, 모든 사람드리 그걸 사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그 가게 앞에 설 거예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은 행복이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안락하지 않으면 올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안락해야 되걸랑요. 뭐가? 몸과 마음이 안락해야죠. 마음도 안락해야 되고, 몸도 안락해야 되고. 안락이라고 하는 말은 원어는 수카(sukha)죠. 그러나 후기 불교에서는 수카로만은 부족했어요. 그래서 바띠라고 하는 말을 붙였죠, 수카밧띠(sukhavati).  수카밧띠, 이 말을 번역한 것이 극락이예요. 그냥 안락한 게 아니라 아, 그냥 맺히도록 안락한 것이 극락이예요. 너무 안락해서 미칠 지경이야! 그 안락이 한계점까지 간 거예요. 그게 수카바띠예요. 그걸 극락이라고 번역한 거예요, 중국에서.극락이라고 하는 것이 뭔 줄 아세요? 다른 게 아니예요. 너무 행복해서 안 행복한 것이 어딘가를 찾아다는 것이 수카바띠예요. 너무 행복해! 그래서 도대체 불행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 나 그거 한 번 겪어보고 싶어. 나 불행한 것 한 번 맛보고 싶네. 그래서 불행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지만, 떠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다가 행복한 것이 수카바띠예요. 극락이예요. 다른 게 극락이 아니예요. 아마 그런 세계에서는 이런 가게를 오픈하면 대박을 터트리죠. '불행을 팝니다. 경험하고 싪으신 분들은 오셔서 사십시요.  

 

안락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안락해야 행복해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뭐를 이야기 하는가요? 내가 행복하고 안락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가요? 네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라고 그러잖아요. 평화로움. 그래서 평화, 안락, 행복, 열반, 깨달음, 이런 거는 다 같은 의미로다가 쓰는 거예요, 사실. 여러 가지 단어를 널어 놓고 있지만, 평화로와야 되걸랑요. 평화롭지 않은데, 어떻게 안락할 수 있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요.

 

부처님께서 왜 자애심을 이야기하겠어요. 자애심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자애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스스로의 평화로움을 말하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구요. 내 마음 속에 자애심이 충만해야 평화로울 수 있죠. 내가 그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분노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세상은 분노로 바뀌지 않아요. 세상을 바꾸는 무기는 오직 하나 뿐이예요. 그것은 뭐냐면 자애심입니다. 자애심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죠. 우리가 세상을 분노로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거예요. 히틀러만 없으면 세상이 평화로와 질 것 같고, 밀로세비치만 없으면 세상이 평화로와 질 것 같고, 카다피만 없으면 세상이 평화로와 질 것 같고, 그럴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걸랑요.

 

왜 세상이 평화로와지지 않냐면, 우리는 자애심이 부족하기 때문이예요. 아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죠. 바로셀로나 축구팀 감독은 축구는 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 그랬어요.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자애심이 없으면, 공유할 수가 없어요. 세상은 어떠한 법을 만들어도, 인간이 그 법을 준수하려고 생각하지 않는한, 그 어떠한 법을 만들어도, 그 시스템은 무력화되게 되어 있어요. 마치 물을 막는 거와 같죠. 물을 막아 놓으면요. 아무리 물을 높이 막아도, 물은 막을 수가 없어요. 반드시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되어 있기 때문에. 댐이 유지되는있는 이유가 뭡니까? 일정 부분 물이 흐를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놨기 때문이죠. 수로를 만들어 놓고 물을 일정 부분 빼잖아요. 항상 흘러 갈 수 있게. 그 전체를 막아버리면 아무리 높이 쌓고 쌓아도 물의 흐름을 차단할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차면,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어떠한 제도를 만들어도 우리 스스로가 자애심으로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한,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한, 세상은 변하지 않죠. 변하기가 어려워요. 부처님이 무량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냥 이야기하는것이 아니예요. 부처님이 무량심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자애심을 가져라, 그리고 공감하는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타인을 행복을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라, 그리고 차별없는 마음을 가져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61명의 비구들에 무엇을 가서 전하라고 이야기 했겠어요? 부처님께서 1명의 비구에게 가서 전하라고 한 것은 바로 이거예요. "행복하고, 안락해라!" 행복하고 , 안락하라. 행복하고 안락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될 것인지, 무엇을 실천해야 될 것인지, 그걸 설명해 주라는 얘기예요. 이 세상에서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도 공짜로 주어지진 않습니다. 안락이라는 것도 공짜로 주어질 순 없죠. 내가 행복할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되고, 내가 안락할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되죠. 

 

내가 이루기 어려운 것을 이루었을 때, 그 때 무엇을 느낍니까? 기쁨을 느끼죠. 그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것이 큰 것이 되었든, 작은 것이 되었든,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행복과 기쁨을 느끼죠. 주어진 것은 결코 우리에게 행복과 안락을 가져다 주지 못해요. 부처님의 전도선언의 정신은 사만따바르라예요. 널리 축복을 내리다. 다른 거 없습니다. 축복이라고 하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축복이라는 것은 누구로부터 증여받는 것을 말하죠. 증여입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증여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지요. 세상에는 모든 것은 댓가가 있죠. 댓가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반드시 지불해야할 댓가가 있죠. 부처님은 축복을 이야기하죠. 축복은 증여되고 시여되는 거예요.  

 

줄탁동시(啐啄同時 )라고 하는 말을 쓰죠. 병아리가 부화되기 위해서 안에서 쪼고, 그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바깥에서 쫘 주는 거죠. 병아리가 쪼는 것을 줄이라고 하고, 어미닭이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하죠.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있어요. 아, 왜 줄탁이라고 할까? 탁줄이라고 그래도 될 텐데.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죠. 줄은 병아리가 안에서 부화되기 위해서 쪼는 것입니다. 어미닭이 쪼는 것은 탁이라고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줄이 없으면 탁은 없다는 겁니다. 병아리가 안에서 그 껍찔을 깨죠.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며는 그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쫘 주는 거죠. 왜 그러냐면, 거기서 너무 힘을 빼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걸랑요. 병아리가 그걸 혼자서 깨고 나오다보면, 잘못하면 지쳐서 죽을 수도 있어요.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쫘주는 거예요.

 

곤계란은 부화된 뒤에 가보면, 병아리의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려서 보셨죠. 어려서 집에서 닭은 키우면, 닭들도 머리를 많아 써요. 미련한 닭은 닭장 안에서 낳지, 똘똘한 닭은 엄한 데 가서 알을 낳습니다. 내, 어려서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닭장 안에서 안 낳고 한 마리가 헛간 집더미 위에다 낳았더라구요. 나중에 거기서 병아리가 나왔어요. 근데 계란 하나는 말짱했어요. 그건 곤계란이죠. 어미닭은 절대 곤계란은 쪼지 않습니다. 안에 병아리가 부화되지 않은 달걀은 절대 안 쫘요. 여기에도 우리 삶의 중요한 가치가 있어요, 사실. 어미 닭은 절대 부화되지 않은 닭은 쪼지 않는다는 것. 그냥 있습니다. 어미닭은 아는 거죠. 이 달걀은 죽은 달걀이라는 걸 알아요. 그러기 때문에 안 쫍니다. 반드시 병아리가 줄할 때만, 탁해 준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설사 부처님께서 널리 축복을 시여한다고 하는 싸만따바드라를 행하신다 하더라도,내가 줄하지 않으면 그거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별똥별과 같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전도선언에서 뭐라고 얘기하셨나요?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그들도 법을 듣지 못하며는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스스로가 소외되어 간다는 거예요. 누가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소외된다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축구 경기에 임하는 모든 선수에게는 공을 찰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죠. 그런데 그 공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지만, 누가 더 많이 그 공을 공유할 것인가는 감독이 정하는 것도 아니고, 심판이 정하는 것도 아니고, 관중이 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공이 정하는가요? 그렇지도 않잖아요. 그 게임에 뛰는 선수들이, 자기가 얼마나 많이 뛰느냐에, 공이 있는 곳에 그가 있느냐죠. 그렇지 않은가요? 공이 있는 곳에 그가 있는 것이지, 그가 있는 곳에 공이 있는 거 아니걸랑요. 공의 점유율이라고 하는 것은 공이 있는 곳에. 어떤 사람이 그 공이 있는 곳에 서있느냐는 거죠. 그 공을 차고 있느냐는 거죠. 부처님의 시여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누가 먼저 저 그 곳에 있느냐? 먼저 지치고, 많이 뛰지 않으면, 소용이 없죠.  

 

2002년 대한민국 월드컵 때, 우리나라 공격수 중에 이동국이가 배제되리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는 한 때 천재소리를 들었던 선수였죠. 그러나 히딩크는 배제했어요. 배제한 이유는 하나예요. 이동국이는 공을 기다린다는 거. 문전에서. 공을 기다렸다가 오는 공은 잘 넣어요. 그러나 그것은 한국에서나 통한다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공을 기다렸다가 공을 차 넣을 수 있는 이동국의 기술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월드컵같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경기에서는 공을 기다려서는 공을 만져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히딩크가 박지성을 총애했던 이유는 공만 보면, 미친 놈처럼 뛰었기 때문이예요. 공만 보면 발정난 황소처럼 눈을 부릅뜨고 뛰니까 그를 발탁했던 거예요. 박지성은 그 전에 무명의 선수였어요. 일본 2부리그에서 뛰었던 선수였으니까, 본래.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이동국은 배제되고. 일본 2부 리그에서 뛰던 박지성은 선발되었죠. 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한 사람은 기다리고, 한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미가다에서 비구들에게 전도를 선언하고, 비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지로 보내서, 사만따바드라를 설하게 한 이유는 거기에 있는 거예요. 불교의 정신은 사만따바드라예요. 다른 게 아입니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예요. 다른 게 부처님 가르침 아니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도선언에 다 들어 있어요. 전도선언만 이해하고 알면, 불교는 다 끝나요. 사성제니, 팔정도니, 십이연기니, 육바라밀, 그런 거 몰라도 괜찮아요. 왜 그러냐면, 전도선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그 전도선언의 정신이 바로 사만따바드라예요. 다른거 아니예요.   

 

오늘의 주제가 사만따바드라입니다.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기도를 좀 이끌어 주실라는가? 네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르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오늘 대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비의 법우를 내리시어, 모든 중생들이 행복과 안락을 얻게 하소서. 부처님의 전도선언의 정신이 저희들은 사만따바드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처럼, 저희들 마음과 저희들 가정과 저희들 이웃에게, 사만따바드라의 부처님의 축복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잠시 명상이 있겠습니다.

01. 라나에로스포 - 사랑해
02. 전영 - 어디쯤 가고 있을까
03. 윤형주 - 어제 내린 비
04. 채은숙 - 빗물
05. 서유석 - 가는 세월

06. 정윤선 - 아들
07. 이용복 - 쥴리아
08. 박양숙 - 어부의 노래
09. 고향(대사) - 별들의 고향
10. 이숙 - 눈이 내리네


11. 김세화 - 작은 여인들
12. 박상규 - 조약돌
13. 블루진 - 서글픈 사랑
14. 사랑의 하모니 - 야화
15. 산울림 - 청춘


16. 이연실 - 그대
17. 이필원 - 약속
18. 해바라기 - 어서 말을해
19. 정태춘 - 떠나가는 배
20. 정태춘 - 촛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