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과 행복 사이|…… 혜천스님설교

2019. 10. 27. 18: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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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2556년 7월 29일

불행과 행복 사이

 

 

오늘 주제는 '불행과 행복 사이'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파타차라, 빠따짜라(Patacara, Patachara)는 귀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부유했죠. 그녀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난 노예인 남자 아이가 있었어요. 파타차라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노예인 그 아이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노예를 너무 사랑했어요.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고, 용납해주고, 축복해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니였어요. 그 와중에 파타차라는 임신을 했죠. 그래서 파타차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멀리 도망가서 살든지, 아니면 가문을 더럽힌 죄를 쓰고 살해를 당하든지. 파타차라는 전자를 선택했죠. 사랑하는 하인을 데리고 먼 지방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아이를 낳죠. 

 

그런데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 줄 정도로 만만한 사회가 아니었어요. 세상은 냉혹했죠. 먼 지방으로 도망간 그들은 먹고 사는 것도 너무 힘겨웠어요. 그저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했죠. 우리가 늘 이런 실험을 당하죠. 이상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이상을 선택할 것인가? 현실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하는 실험을 당하잖아요.

 

우리의 이상은 현실에 부딪쳐서 산산히 깨어지는 도자기처럼 부셔지기가 쉽죠. 우리 파타차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 냉혹한 현실을 극복하고, 견디려고 했죠. 그리고 노력했어요. 그러나 노력한 것 만큼의 성과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수드라인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 와중에 그녀는 또 둘째를 가졌죠. 그녀의 현실의 고통과는 다르게 시간이라고 하는 세월은 그녀 의지와 다르게 흘러갔죠. 그녀는 산달이 가까와지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많은 고민을 했죠. 수드라인 남편을 데리고, 아이를 데리고,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 현실의 고통은 그녀를 너무 짓눌렀죠. 그래서 그녀는 또 한 번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서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죽더라도 이 곳에서 굶어 죽느니, 친정에 가서 맞아 죽기로 한 거죠. 남편은 가려고 하지 않았죠.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의지를 꺾지 않았어요. 남편을 데리고 도망가기로 한 것도 그녀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한 것도 그녀였죠.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죠. 고향이 머지 않은 지역에서, 그 여행길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일까요? 그녀는 산기를 느꼈죠.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숲에서 아이를 낳았어요.너무 힘든 진통이였죠. 남편은 그녀를 돌보기에 정신이 없었고, 세 살 먹은 아이를 돌보기에 정신이 없었죠. 아이가 세상을 나오려고 하는 순간, 세상을 나오는 순간, 그녀는 남편에게 태를 자르라고 했었는데, 남편은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은 죽어 있었어요.  

 

그 양수가 터지고, 그런 냄새 때문이었을까요? 독사가 왔다가 남편을 물어버린 거죠. 그 무섭다는 코브라한테 말이예요. 코브라한테 물리면, 세 발짝도 떼지 못한다 그래요. 킹코브라에게 물리면 세 발짝도 떼기 전에 즉사한다는 거죠. 심장이 멎어버리죠.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 남편은 독사에 물려 죽었어요. 파타차라는 통곡을 했죠. 얼마간 울다가 정신을 수습해서, 아이의 태를 자르고, 아이를 안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향해서 갈 수 밖에 없었어요.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녀의 집에 돌아갈려면, 강물을 건너야 되었어요. 그는 강어귀에 다다라서,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세 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강물을 건널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죠. 그리고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어요. 아이를 낳았고, 남편이 독사에게 물려죽은 그 상실감, 그리고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그 절망감. 그래서 그녀는 또 한 번의 선택을 했죠.      

 

세 살 먹은 아이는 강둑에 세워두고, 갓태어난 영아를 먼저 강 저 쪽에다 건네 놓고, 돌아와서 큰아이를 안아서 건널 선택을 한거죠. 큰 아이에게 파타차라는 신신당부해서 말했죠. 내가 오기 전까지 절대 이 곳에서 움직여서는 안된다. 파타차라는 영아를 안고 강을 건넜어요. 그리고 아이를 강가 백사장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다보니까 아이는 강둑에 없었어요. 아이는 강 가까이로 내려오고 있었던 거죠. 엄마가 멀리 멀리 강을 건너면서 시야에서 멀어지니까 세 살먹은 아이는 불안했던 거죠. 그래서 엄마의 그 신신당부를 저버리고, 강 언덕에서 내려와서 강가로 다가온 거죠. 그래서 파타차라는 급하게 강을 또 건넜죠. 아이는 아무 생각없이 엄마를 향해서 강에 들어섰죠. 파타차라는 놀라서 소리쳤죠. 거기에서 서서 기다리라고. 그러나 아이에게는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겠죠. 거리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파타차라는 강을 건너면서 손짓을 했죠. 뒤로 물러나라고. 이렇게(스님이 손짓을 해보이며) 물러나라고. 그런데 아이는 엄마의 손짓을 빨리 오라는 거로 해석했죠. 엄마는 물론 가라고 이렇게 했지만, 아이는 빨리 오라는 걸로 해석을 한 거죠. 그래서 아이는 더 빨리 엄마를 향해서 걸었고, 이윽고 아이는 강물에 떠내려가서, 파타차라의 울부짖음에도 아이가 떠내려가는 것은 막지 못했어요. 큰 아이는 그렇게 허망하게 강에 떠내려가서 죽었죠. 그녀는 강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몰라요. 그렇게 울던 그녀는 남편이 죽었을 때 처럼 체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 돌아서서 강 이켠에 놓아두었던 아이를 향해서 오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았어요. 아이는 그 사이에 늑대 밥이 되었죠. 강 언덕에 강 가 모래사장에 놓여 있던 아이는 늑대 밥이 되고 없었어요. 그녀는거기서 또 한 번의 절망과... 그저 울 힘도 없었어요.

 

좋은 일도 일시에 쇄도하고, 나쁜 일도 일시에 쇄도한다 그러던가요? 그 짧은 시간에 남편은 독사에게 물려 죽고, 세살 먹은 아이는 강물에 떠내려가 죽고, 갓태어난 아이는 짐승의 밥이 되었죠. 그녀는 그의 실성할 지경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집을 향해서 걸었죠. 그녀의 불행은 거기서 끝아 아니었어요. 집에 도착해보니, 그녀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죠. 그녀의 집은 흙더미가 되어 있었어요. 몇 날 몇 일 내렸던 비는 뒷산을 무너뜨렸고, 그녀가 남편을 잃고, 큰 아이가 물에 떠내려가고, 태어난 영아가 늑대의 밥이 되는 순간에, 그녀의 부모도 그녀의 형제들도 산사태에 파묻혀서 다 죽어버렸어요. 그녀는 울 힘도 없었어요. 그 많은 불행이 일시에 오자 그녀는 뇌압이 올라갔죠.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이윽고 그녀는 혼절해 버렸어요.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파타차라는 목숨은 건졌지만, 혼절해서 깨어났을 때, 이미 그녀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미쳐버린거죠. 완전히 돌아버렸어요. 이런 불행을 일시에 겪은 후 정신분열이 안 온다는게 이상하죠. 남편은 독사에 몰려 죽고, 큰 나이는 물에 떠내려가 죽고, 갓태어난 아이는 늑대의 밥이 되고. 이런 일들이 그녀 눈 앞에서 다 이루어졌을때, 그 충격을 안고 부모형제를 찾아 왔는데, 부모 형제도 산사태 속에 파묻혀서 속절없이 죽었죠. 그녀는 미쳐서 그저 떠돌아 다녔죠. 그녀를 보면, 아이들은 돌을 던졌죠. 미친 년이라고.

 

그러다 그녀는 수레바시티라고 하는 도시에 갔고, 그 도시의 아나타빈티카 사원에 계시던 붓다를 만났죠. 붓다는 이 불행한 여인을 거뒀죠. 그 극심한 고통에 미쳐버린 그녀를 붓다는 치유했어요. 온전해진 그녀는 붓다의 제자가 되고. 파타차라는 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그녀는 출가한 이후에 그녀처럼 불행에 고통받았던 수없는 사람들을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출가한 파타차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세계로 인도했어요.     

 

 

인간은 오감의 잔해물인 스스로의 기억에 의해서 유지되죠. 우리의 오감은 의식을 만들죠. 우리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오감의 잔해물에 불과합니다. 내 자아라는 것도 오감의 잔해물이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과거의 지배를 받죠. 파타차라는 누구보다도 불행했어요. 그녀는 누구보다도 불행했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공감할 수 있었죠. 경험해 보지 않으면, 우리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경험을 말하죠, 지금의 경험을 깨닫는 거죠. 지금의 경험을 깨닫는 것이고, 과거의 의식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죠.

 

파타차라는 자신이 겪은 불행을 승화시켰죠. 그래서 자신처럼 불행을 겪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줬고, 많은 사람들을 불행의 고통에서 현실의 행복으로 바꾸어 주었죠.  불행이라고 하는 것과 행복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우리라는 말보다는 나라고 하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내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라는 거죠. 파타차라는 누구보다도 불행을 겪었고, 불행때문에 스스로의 정신을 놓았지만, 부처님을 만나서 그것을 치유받은 이후에는 파타차라는 많은 사람을 치유하려고 노력했어요. 스스로의 불행에 갇혀서 눈물 흘리고 허우적거리지 않았다는 얘기죠.

 

우리는 과거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눈물을 짓죠. 돌아오지도 않는 과거를 말이예요. 과거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죠. 현재도 시간과 함께 흘러 가구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언제나 불행과 행복 사이에 서 있다는 거예요. 어느 쪽으로 선택해서 움직일 거냐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죠. 불행 쪽에서 행복 쪽을 움직이는 선택을 할 것인가요? 아니면 행복 쪽에서 불행으로 움직이는 선택을 할 것인가요? 행복도 전이되고, 불행도 전이되죠. 파타차라는 스스로의 불행을 전이시키지 않고, 행복을 전이시켰죠. 무엇을 전이시키냐는 거죠. 행복을 전이시켜 주느냐, 불행을 전이시켜 주느냐는 거죠.   

 

누구라도 불행해질 수 있고, 누구라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 의지의 선택이 되었든 간에, 의지의 선택이 되지 않았던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죠. 행과 불행도 의지의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는 거죠. 파타차라는 그녀가 선택한 거죠. 하인을 사랑한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고, 그 노예를 데리고 먼 지방으로 도망간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죠. 그녀가 선택하는 그 의지 때문에, 그 의지가 그녀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절망하고, 모든 것을 타인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면, 아니 1%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없었겠죠.    

 

오늘 강론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내 불행을 타인에게 전이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어떠한 좌절과 절망을 겪었다 하더라도, 내가 어떠한 슬픔을 겪었다 하더라도, 내가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전이시켜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것을 겪는 것은 나 하나로다 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고통을 내 가까운 사람에게 전이시키는 습관이 있죠. 아주 나쁜 습관 말이예요. 왜 한 사람 때문에, 한 지붕 밑에 있는 가족이 그것을 전이받아야 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이 사회가 왜 부담을 져야 되는 가요?  

 

어느 누구도 일생을 살면서 고난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누구나가 절망의 벽을 바라보기도 하고, 누구나가 좌절의 구덩이를 건너기도 하죠.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을 경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파타차라처럼, 적어도 많은 타인이 그런 것을 겪는 것을 막을려고 노력하는 거, 행복을 얻도록 도울려고 노력하는 거, 그것이 부처님이 디판카라 부처님 앞에서 세웠다고 하는 서원의 정신이죠.  

 

이 파타차라 이야기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들죠. 세상에 이 여인보다 감당할 수 없는 더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상처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죠. 자기가 받는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파타차라를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좌절과 절망의 고통은 그저 순위에 끼지도 못하죠. 우리는 언제나 불행과 행복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도 내 노력이고, 그 행복을 더욱 지속시키는 것도 내 노력이죠.

 

우리가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나? 파타차라냐구? 그 불행이 왜 이 파타차라에게만 오느냐? 그 불행이 나에게만 온 것은, 나에게만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죠. 어쩌면 파타차라보다도 더 심한 고통이 와서, 그것을 겪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죠.

 

오늘 내가 이 파타차라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파타차라는 불행했지만, 그 나머지 그녀의 삶은 누구보다도 행복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겪은 그 고통을 약으로 삼아서, 고통받는 수없는 사람들을 그 약으로 치유해 줬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안고 신음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트라우마를 약으로 삼아서 많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주는 것이죠.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다 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저희들은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길 원합니다. 저희들은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저와 저희 가족과 이웃이 모두 부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복된 삶 되도록 간절히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그리움에 젖게하는 가요

(無順)

 

* 채은숙 / 빗물

* 라나에로스포 / 사랑해

* 전영 /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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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석 / 가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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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춘 / 떠나가는 배 * 정태춘 / 촛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