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5~8

2019. 11. 17. 11: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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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5



 (1) 상당--5

 

 

不是河南이면 便歸河北이로다 院臨古渡에 運濟往來로다 
하남지방이 아니면 하북지방으로 돌아감이여,
임제원은 옛 나루터에 임해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강의 ; 임제스님이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드날릴 곳을 말하고 있다. 어느 곳으로 가던지 그 장소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황벽스님은 황벽스님대로 나는 나대로 인연을 따라 가고 인연을 따라 머무를 것이다. 어디를 가든 천지만물은 그대로가 모두 무위진인인데.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을 건지고 눈을 열어주면 되는 일인 것을. 실로 그 후 임제스님이 가서 머문 임제원은 하북의 진주 호타하라는 강포구의 도시 오늘의 석가장이란 곳이다. 임제원에는 지금도 그의 탑과 비석이 있다. 강포구에서 나그네들을 강을 건너게 하는 일과 사람들을 제도하는 일의 표현이 같기 때문에 ‘임제원은 옛 나루터에 임해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절묘하다. 


임제록 6

(1) 상당--6

 

 

把定要津하니 壁立萬仞이로다 奪人奪境하야 陶鑄仙陀하고 
요새(要塞)가 되는 나루터를 지키고 있으니 그 절벽의 높이는 만 길이나 되고, 
사람도 빼앗고 경계도 빼앗는 수단으로 선타바를 만들어 낸다.

강의 ; 임제스님이 지키고 있는 곳은 불교 최후의 관문이며 요긴한 길목이다. 그 곳을 지나가지 않으면 불교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부처도 아니며 조사도 아니며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그 관문의 높이는 만 길이나 되는 높고 높은 요새다.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다 떠난 자리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경지다.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객관]을 온통 부정해 버리는 방법과 그 자신[주관]마저 부정해 버리는 등등의 수단을 써서 건진다. 때로는 주관과 객관을 모두 부정하고, 때로는 주관과 객관을 모두 긍정하여 받아드린다. 이것을 사람들을 제접(提接)했을 때 네 가지로 구분하여 법을 쓰는 방씩으로 사구(四句) 또는 사요간(四料簡)이라 한다. 때로는 봄바람 같고 때로는 살을 에는 매서운 겨울바람 같다. 이러한 솜씨로 열반경의 선타바와 같은 총명하고 민첩하고 지혜로운 제자들을 길러낸다.

임제록 7


(1) 상당--7

 

 

三要三玄으로 鈐鎚衲子로다 常在家舍하야 不離途中하니
삼요삼현으로 수행납자들을 단련하였고,
항상 집안에 있으면서 길거리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강의 ; 임제종풍(臨濟宗風)의 특징이라 할 삼구(三句)와 삼요삼현(三要三玄)과 사요간(四料簡)과 사빈주(四賓主)와 사조용(四照用)등이 있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한 구절의 말[一句語]에는 반드시 세 가지 깊고 현묘한 문을[三玄門]을 갖추어야하고, 한 가지의 깊고 현묘한 문에는 반드시 세 가지의 긴요 한 점[三要]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방편도 있고 방편의 활용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요삼현은 근기를 활용하는 세 가지의 양상을 나타낸 것이다. 결코 법문의 깊고 얕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세 가지로 활용하는 양상을 보여 수행납자들을 잘 단련하였다. 마치 무쇠를 두드려 강철을 만들고 나아가서 천하의 명검(名劍)을 만들듯이 하였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한 사람은 영원히 길거리에 있으면서 집안을 떠나지 않고, 한 사람은 집안을 떠나 있으면서 길거리에도 있지 않다. 누가 인천의 공양을 받을만한가?” 
불교의 이상적 인물인 부처님을 달리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문수는 깨달음의 지혜를, 보현은 그 깨달음의 실천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깨달음과 그의 실천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마치 몸과 몸짓의 관계다. 몸이 있으므로 몸짓이 있고 몸짓은 몸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들을 말할 때 ‘문수는 언제나 집에 있지만 길거리의 일을 떠나지 않고, 보현은 언제나 길거리에 있지만 집안의 일을 떠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임제스님은 그처럼 안과 밖을 겸하였고, 이(理)와 사(事)를, 선(禪)과 교(敎)를, 문(文)과 무(武)를, 지혜와 그 칠천을 완전하게 겸하여 어떤 일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였다.



임제록 8

(1) 상당--8

 

 

無位眞人이여 面門出入이로다 兩堂齊喝에 賓主歷然이요
무위진인이 얼굴을 통해 출입하고,
두 집의 수좌가 동시에 “할”을 함에 주객이 분명하다.

강의 ;임제스님의 보고 듣고 하는 작용은 불조(佛祖)의 지위에도 속하지 않고 중생(衆生)의 지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임제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붉은 고기 덩어리에서 한 사람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여러 분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하였다. 
그 때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그러자 임제스님은 법상에서 내려와서 멱살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빨리 말해봐라.” 
그 스님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임제스님이 잡았던 멱살을 밀쳐버리고 말씀하시기를,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
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벼렸다. 
임제록에서 첫째가는 한 구절을 꼽으라면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차별 없는 참 사람><참사람>이라고도 표현한다.


임제스님의 법석(法席)의 전장(戰場)에는 언제나 활과 칼을 서로 겨누고 있는 매우 긴장된 상황이었다. 
임제가풍을 표현하는 말로 <임제 할(喝) 덕산 방(棒)>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임제스님은 할을 잘 하고 덕산스님은 방을 잘 쓴다는 뜻이다. 그 날도 법상에서 수행납자들과 할을 주고받으며 법을 거량하였다. 그 날은 법을 거량하기 전에 벌써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두 선방에서 수좌가 서로 보는 순간 동시에 할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스님이 그 문제를 들고 나와 임제스님께 물었다.

 
“이럴 때 두 사람의 할에 나그네와 주인의 차별이 있습니까?”
“나그네와 주인이 분명하지. 대중들이여, 임제의 나그네와 주인의 소식[賓主句]을 알고 싶으면 두 선방의 두 수좌들에게 가서 물어보라.”라고 하시고는 곧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단란주점 아가씨라고 이상하게 보진 마세요
    술팔고 웃음 팔아도 순정은 있어요
    사주팔자 안좋아서 없는집에 태어났고
    이고생을 하고 있지만
    계타고 적금타서 큰 목돈 손에쥐면
    이바닥을 떠날거예요
    요상한 눈웃음으로 보시려고 하진마세요
    내게도 순정을 주는 김모씨가 있어요

    내이름은 순아랍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에레나예요
    그냥 그냥 에레나라고 통한답니다
    술이 좋아 마신술이 아니랍니다
    괴로워서 마신술에 내가 취해서
    고향의 부모님이 고향의 여동생이
    보고파서 웁니다
    그날밤 그 요정 그 요정 카바레에서
    보았다던 순아는 거짓이예요
    새빨간 립스틱 순아는 다홍치마 순아는
    오늘밤도 파티장에서 춤을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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