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16~20

2019. 11. 30. 21: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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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16 


(1) 상당--16

 

 

宣和庚子仲秋日에 謹序하노라 
선화경자(宣和庚子) 중추일에 삼가 서문을 쓰다 

강의 ; 임제록을 출간하기 위하여 서문을 쓴 때는 북송의 휘종황제 선화 2년(서기 1120)이다. 임제스님이 입적(入寂)하신지 254년이 되는 해이다. 서문을 강설한 것

임제록 17


(1) 상당--17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住三聖嗣法小師慧然集
진주 임제혜조선사 어록 
삼성사에 사는 법을 이은 소사(小師) 혜연(慧然)이 수집함

강의 ; 임제록은 진주에 있는 삼성사의 임제스님의 높은 제자 혜연스님이 편찬하였다. 스승의 어록을 편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스승에 버금가는 도안(道眼)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스승의 법을 이은 사람이어야 한다. 법을 이었다는 사법(嗣法)이라는 말이 그를 증명한다. 소사(小師)란 스승 앞에서 자신을 겸양하여 소승, 부족한 제자 등의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법을 설하면 그것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꼭 있어야한다. 근년의 큰스님들도 그런 일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제자가 있는 분들은 돌아가신 후에도 더욱 빛을 발한다.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임제스님 보다 못하지 않는 일로 평가 된다. 그러므로 혜연스님은 당연히 임제스님 버금가는 분이다.

이 좀 장황한 것 같으나 필자는 좀 미진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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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18


1-1 전쟁의 시작


府主王常侍가 與諸官으로 請師陞座하니 師上堂云, 山僧今日에 事不獲已하야 曲順人情하야 方登此座하나 若約祖宗門下하야 稱揚大事인댄 直是開口不得이라 無儞措足處니라 山僧此日에 以常侍堅請이니 那隱綱宗이리오 還有作家戰將하야 直下展陣開旗麽아 對衆證據看하라


하북부의 부주 왕상시가 여러 관료들과 더불어 임제스님께 법상에 오르시기를 청하니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 바로 입을 열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 그런대 산승에게 오늘 왕상시가 간곡히 청하니 어찌 근본종지를 숨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 이름 난 장군[作家]이 있다면 곧 바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대중들에게 그 증거를 보여라.”



강의 ; 먼저 글의 단락을 나누고 번호를 붙인 것은 뜻을 더욱 잘 파악하자고 임의로 나눈 것이다. 매 단락마다 담긴 뜻을 요약해서 그 제목을 붙인 것도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다른 길로 흐르게 하지는 않았는가 해서 좀 염려가 된다.


부주는 하북부의 지방장관이다. 우리로 치면 도지사 정도에 해당한다. 상시(常侍)라는 말도 관직의 이름으로서 항상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국사를 의논하는 직책이다. 부주이면서 상시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이니 외호(外護)인연으로서는 법을 펴기에 손색이 없다. 자고로 선지식이 한 지역에서 법을 펴는 데는 외호인연뿐만 아니라 토지인연, 납자인연, 단월인연, 도(道)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임제스님은 이 왕상시로 해서 당신의 법을 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법이란 언어나 사량으로 표현할 일이 아니다.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부처님이나 조사님의 본마음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간청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좀 흠이 되는 부담을 안고라도 어쩔 수 없이 언어로 거량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마치 굽은 화살로도 원숭이를 쏘아 맞히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내가 먼저 무어라고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일대사인연을 거론함에 있어서는 스승도 입을 열 수가 없고 학인도 발붙일 곳이 없다. 더구나 임제록의 안목은 언어도단하고 심행처멸한 자리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라도 혹 이 자리에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드날릴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어디 한번 나와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그 솜씨를 보여라. 목숨을 걸고 한바탕 겨뤄보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걸 맞는 전쟁의 용어를 써서 법거량을 하고자 한다. 매우 살벌하고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퍽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이었다. 

임제록 19



1-2 불교의 대의

 

 


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禮拜어늘 師云, 這箇師僧이 却堪持論이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만하구나.” 

강의 ; 청천백일에 천둥치고 번개 치는 일이다. 임제장군의 막하에 목숨을 담보로 녹 쓴 칼을 비껴들고 하늘을 덮는 기계로 바람을 몰아가며 뛰어 나온 장수가 있다. 관우인가. 장비인가. 조자룡인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할”이다. 참 간단하다. 일도필살(一刀必殺)의 검법이다. 혹자는 이 “할”을 부처와 부처끼리 통할 일이고 범부의 측량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할 까닭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불교다.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듣고, 들은 사실에 대해서 즉시 반응하는 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처음도 끝도 오직 활발발(活鱍鱍)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 번의 “할” 소리에 육종 십팔상(六種 十八相)으로 진동하였다.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와 팔해탈(八解脫)·육신통(六神通)이 이 “할”에 다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목숨을 걸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인생을 걸었던가. 한량없는 세월동안 인생을 걸고 목숨을 버린 일이 무량 무수 아승지 일 것이다. 세존의 6년 고행도, 달마의 9년 면벽도 모두가 이 불법대의 때문이었다. “할”이라는 그 한 마디. 그렇게 간단한 것을 위하여.


임제할, 덕산방이라 하여 임제스님의 불법가풍을 흔히 “할”로 설명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임제스님이 교화를 편 이후부터 오직 “할”과 “방”으로 학인들에게 보였다. 그래서 내방하는 사람이 문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곧바로 “할”을 하였다.


어느 비구니스님들의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던 날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입승스님이 여름 한철을 공부한 소감을 물었다. 구참(舊參)스님들부터 돌아가면서 이런 저런 소감들을 이야기 하다가 탁자 밑에 앉아있는 어느 초심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 스님 왈, “나는 ‘할’이요.”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순간 큰방이 온통 박장대소하는 웃음바다가 되었었단다.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들고 그 무서운 싸움터에 나온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즐거운 공양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도 또한 불법의 대의를 아는 사람이리라.

 
임제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손들은 최소한 이렇다. 스님들의 법문에는 으레 “할”이 따른다. 심지어 한 생애의 영결을 고하는 장례식장에서도 “할”이 난무한다. “할”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이다. 불교의 대의이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의 흉내를 낸다하더라도 너무 심한 정도다.

임제록 20


1-3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問, 師唱誰家曲이며 宗風嗣阿誰오 師云, 我在黃檗處하야 三度發問하야 三度被打니라 僧擬議한대 師便喝하고 隨後打云, 不可向虛空裏釘橛去也니라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며 어느 분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황벽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그 스님이 우물쭈물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할!”을 하고 뒤이어 내려치며 말하였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강의 ;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의 법을 이었다. 황벽스님은 백장(百丈,749-814)스님의 법을 이었고, 백장스님은 마조(馬祖,709-788)스님의 법을 이었다. 마조스님은 남악(南嶽,677-744)스님의 법을 이었고, 남악스님은 육조혜능(638-713)대사의 법을 이었다.


이렇게 설명해야 할 것이지만 “나는 황벽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라고 하여 자신의 전법내력을 여운이 있고 의미심장하게 밝혔다. 
불법(佛法)이니 종풍(宗風)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가서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20대의 몽둥이로 임제를 후려쳤다. 그렇게 간단히 불법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불법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묻고 세 차례나 얻어맞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인 것이다.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고, 제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았다.


세 번 묻고 세 번 맞은 것이 황벽의 불법이며 또 한 임제의 불법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불법이며, 역대 조사들과 천하 노화상들의 불법인 것이다. 묻고 때리는 이 사실 위에 성성역역(惺惺歷歷)하고 역역고명(歷歷孤明)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밝은 대낮에 여기 이렇게 빨가벗고 춤을 춘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그렇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끈이 짧으면 깊은 우물에는 닿을 수 없다. 이렇게 천하 사람들을 모아놓고 불법을 드날리는 것은 명명백백한 근본뿌리가 있고, 금강보검이 있고, 빼어난 솜씨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도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제대로 된 실력도 없으면서 판을 벌릴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 독화살이 날아와서 명줄을 끊어 놓을지 모르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가 맞다면 맞는 말이지만 사실 이 집안의 진짜 종풍은 허공에다 말뚝을 박는 일이다.

 




 
01. 짝잃은 원앙생  
02. 새벽길  
03. 행 복  
04. 사랑하지마세요  
05. 헤일 수 없는 세월
06. 상처  
07. 혼자가는길  
08. 가는정 오는정  
09. 그사람 이름  
10. 여자의 눈물 
11. 순 정  
12. 샘물같은 사연  
13. 미운님 고운님  
14. 무정  
15. 도련님 생각
16. 그대 이름은  
17. 흐르는 눈물  
18. 한산아가씨  
19. 공산명월  
20. 총각뱃사공 
21. 그것은 비밀  

19. 공산명월 20. 총각뱃사공 21. 그것은 비밀 22. 뜬구름 23. 라일락 꽃이피면 24. 단발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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