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에는 8만 4천의 법문(法問)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법(正法)인 근본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설법한 이야기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 된다.
근본도리는 아주 간단하지만 그 의미를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하기 위하여 석가세존을 비롯하여 근본도리를 잘 체득한 사람들이 때(time, T)와 장소(place, P) 그리고 상황(occasion, O)의 T,P,O 에 따라 비유 따위를 들어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다. 이 근본도리에 대한 극히 많은 설명이 많은 경전으로서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8만 4천이라 하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으로서 근본도리를 설명하는 법에의 입구인 법문(法門)이 무량(無量)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량 법문을 크게 나누면 타력(他力)과 자력(自力)의 두가지 법문이 된다.
타력이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本願)에 의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는 입장으로 이 법문을 정토문(淨土門)이라고도 말한다. 본원이란 근본이 될 약속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아미타」란 A′meter 로서, 미터는 측정한다는 뜻(measure)이고, 물체를 계측(計測)하는 미터법의 미터와 같다. a(아)는 부정(否定)으로 아미터(a′meter)는 헤아릴 수 없이 뜻이 깊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란 말을 바꾸면 뜻이 깊은 근본도리,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뛰어난 근본도리를 의미하는 묘법(妙法)과 동일하며 불은 근본도리를 잘 증득(證得)한 사람이므로 아미타불이라 함은 근본도리에 의하고 있는 훌륭한 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력의 법문인 정토문(淨土門)에서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염불한다. 「나무」는 namas 라는 인도의 옛말을 파리 말소리로 옮겨 온 것으로 무엇에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입으로 부르는 것은 스스로 근본도리에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갖는 사람이 되려는 염원이다.
스스로 근본도리를 그대로 한다는 것은 천지 자연에 있어서의 만물만상의 존재 방식으로서 여기에는 사(邪)가 없으며 항상 정(正)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근본도리를 그대로 한다는 자연법이(自然法爾)는 올바른 것이다. 우리들 인간의 육체라는 물질과 거기에 나타나는 생명이라는 현상도 근본도리를 그대로 하고 있으므로 사람은 생. 로. 사(生老死)의 변화에서 벗어 날 수는 없다. 이 육체에 있어서의 물질이 생(生)하고 멸(滅)하는 변화의 되풀이가 신진대사(新陳代謝)로서 이것이 잘되지 않으면 병고에 시달리게 된다.
사람은 전생(前生)의 부모라고 하는 홀로는 존재할 수 없는 부부(夫婦)의 인연 사이에서 탄생하고 적당한 나이에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되어 후생(後生)으로서의 자식을 낳고, 늙어서는 죽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생(現生)이다. 현생이 후생으로 자식을 남기고 가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며, 후생으로서의 자식을 남겨놓고 가는 변화를 위하여 본능(本能)으로서 나타나는 청춘의 괴로움도 사실은 근본도리의 현상이다.
자연에 있어서 이 「스스로」라고 하는 한 사람의 변천은 근본도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므로 이 「스스로」의 힘(自力)으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력으로서 근본도리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 인간세상은 이미 자연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인간세상을 풍족하고 밝게, 그리고 즐겁게 하기 위한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이 바로 조화를 이룬 때의 안정인 것이므로 조화시의 안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공(空)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을 알고 독선이 아닌, 서로 도와가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혼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과 다함께 마음의 안정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근본도리가 나타내고 있는 조화시의 안정을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독선적인 사고를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생각해 주는 노력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스스로 노력한다면 이 인간세상은 낙원이 된다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의 자력의 법문이며 성도문(聖道門)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정을 베푼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며 스스로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근본도리의 표현이다. 불교에서 자리 이타 원만(自利 利他 圓滿)을 설법하는 것은 스스로가 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도 잘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다같이 잘 되지 않고서는 자기만이 잘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미 자연법이(自然法爾)의 타력에만 맡기지는 못하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우수운 정신병족(精神病族)이 되어서는 안되며 자연법이의 근본도리에 스스로 의지하는 자각이 인간으로서는 중요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차이를 밝히지 아니하고 자연법이의 해석을 오해하면 망상(妄想)이 되어 우수운 인간이 된다. 스스로 근본도리에 의한다는 자각이야말로 올바른 생각의 달관(達觀)된 자세이며 인간세상의 발전을 위해 조화있는 안정된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