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주위에 있는 사물에 대하여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많아지고, 사물의 유사성(類似性)과 상위성(相違性)을 구분하는 식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의 고통과 괴로움을 갖게 되었다.
"사람은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다고 말할 때, "그렇다" "당연하다"고 아는 것만으로는 죽음을 고통으로 하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는 없다. "왜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라고 그 진상을 밝히지 않고는 납득하지 못한다. 위로만으로 안정을 얻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도 좋다. 그러나 가르침을 믿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믿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믿는 것보다 확실한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식을 가진 인간은 예부터 만물만상의 근원을, 그 근원으로부터 어떻게 하여 만물이 만들어지고 만상이 나타났는가의 원인의 원인을 밝혀내려 했다. 그리하여 원인의 원인을 밝혀 나아가다가 결국에는 창조주인 신을 생각하고 이 신을 원인으로 하여 신만의 뜻에 의해서 일체가 있고, 죽음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생각하면 사람의 마음 속에 신이 있다는 것이 된다.
마음이 의지할 곳으로서 신을 근원으로 하는 것도 종교라고 하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을 생각하고 신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의 모습도 마음 속에 만들어지고 신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이것 역시 사람들끼리 사이에서 그렇다는 것일뿐 여기서 신이란 무엇이냐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렇게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정도로 숨바꼭질 밖에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신이란 이러한 것이라고 배우고, 신이 참으로 있는 것인가를 묻고 또 캐 묻다가 마침내 석가세존은 만물만상의 근원을 공(空)이라 하고 만물이 만들어지고 만상이 나타나는 사리를 근본도리로서 발견한 것이다.
근본도리에 의하여 사물의 진상이 밝혀지게 된다면, 단지 사물을 알고 식별하는 지식만에 그치지 않고, 사물의 정사(正邪)를 판단하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즉, 근본도리를 마음의 의지로 삼아 사물의 진상을 밝혀 판단과 응용하는 마음의 활동을 지식을 넘어선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사전에도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별하는 마음의 작용, 사물을 사려(思慮)하고 계획하며 처리하는 힘」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지혜에 의해서 사물의 진상이 밝혀지고, 무엇이냐, 무엇이냐 라고 고뇌하면서 미혹을 바꾸어 깨달음에 이르는 이치가 된다. 전미개오(轉迷開悟), 번뇌의 미(迷)를 해탈(解脫)하여 열반의 깬 마음에 이른다고 하는 불교가 혼자만의 수행일지라도 동행이인(同行二人)으로 하는 것은 근본도리에 의지하여 사물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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