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일까?` 하는 데는 업(業)이 안생긴다
차를 마실 때, 차나 찻잔에 마음이 가는 게 아니고, 차를 마시는 놈을 되돌려서
'차를 마시는 그 놈이 무엇일까?' 하는 마음으로 차를 마시면, 차를 먹긴 먹었지만
차를 마신 것에 대한 관념(觀念)을 가지고 다시 의식(意識)에 심는 것, 즉 업(業)은 없다.
그런데 차를 마신 것에 대한 관념을 따라가서 차의 맛이 ‘좋네, 맛있네, 맛없네, 짜네, 맵네…’ 등등의
분별을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분별을 하는 생각인 차의 맛이 ‘좋네, 맛있네, 맛없네, 짜네, 맵네…’ 등등
그걸 전부 다시 의식에 되심어 놓는 것이다.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자기(참나)를 잊어버린 것이다.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사람은 차의 맛이 ‘좋네, 맛있네, 맛없네, 짜네, 맵네…’ 등등의 그런 분별이
일체 없다. 그걸 무심(無心), 무분별심(無分別心)이라 한다. 차를 마시는 텅~빈 마음자리만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텅~빈 마음자리로 그냥 차를 마실 뿐이다. 그래서 의식에
입력해서 짓는 업(業)이 없다.
“야 이 새끼야!” 라는 욕을 먹었을 때,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텅~빈 마음자리, 참나를 잊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그 욕이 그냥 바람결에 스쳐가듯이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텅~빈 바탕자리,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찰나에 성성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텅~빈 바탕자리, 자기, 참나, 텅~빈 마음자리, 본래성품(본성)을 잊어버려서(매, 昧해져서)
처처(處處)에 사사(事事)에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2019. 10. 20 학산 대원 대종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