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고성 건봉사(乾鳳寺)에 들른 적이 있다. 1998년 8월, 건봉사 제6차 염불만일회 입재 때 청화 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 처음 찾았던 곳으로, 두 번째 방문이었다.
금강산 건봉사는 남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고구려 사찰로, 520년(고구려 안장왕 2년) 아도(阿道) 화상이 창건할 때의 절 이름은 원각사(圓覺寺)였다. 758년(신라 경덕왕 17년) 발징(發徵) 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 등 31인의 승려와 향도香徒 1,828인이 참여한 한국 최초의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베풀었다. 만일이면 대략 27년 5개월이 된다. 787년 만일회향 때에는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스님 31인 모두가 염불 가피로 극락에 왕생하였다. 그 뒤 참여했던 많은 신도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하며, 이때부터 건봉사는 아미타 도량이 되었다.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나옹(懶翁) 화상이 중건하여 건봉사로 개칭하여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발징화상의 염불만일회 이후 1,000년 이상 지난 조선조 후기에 제2차~제5차 염불만일회가 이루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타 완전 폐허가 되었으나, 넓은 가람터와 여러 단의 석축(집터)이 대가람이었음을 말해준다.
불이문을 지나 밋밋한 길을 오르다 보면 19개의 돌계단이 나온다. 돌계단 끝에 올라서면 좌우에 석주가 있다. 우측(북쪽) 석주에는 ‘방생량계(放生場界)’, 좌측(남쪽) 석주에는 ‘용사활지(龍蛇活地)’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다. 석주의 다른 면에는 십바라밀(十派羅蜜) 문양 중 일부인 원월(圓月;보시), 좌우쌍정(左右雙井;방편), 성중원월[星中圓月;지(智)] 등이 새겨져 있다.
석주 뒤로 연지(蓮池)가 펼쳐진다. 연지 건너에는 일자 건물인 낙서암(樂西庵)이 있다. 법상종에서 십바라밀이 보살 십지에 배대(配對)되니 이 연지를 보살지(菩薩地)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돌계단을 경계로, 계단 아래 하계(下界)는 예토(穢土)이고 계단 위 상계(上界)는 피안의 정토(淨土)인 셈이다. 보배연못(보련지寶蓮池)을 향한 19계단 중 18계단을 오르며 근진식(根塵識) 18계(界)의 번뇌를 하나하나 소멸하여 마음이 청정해지면, 19계(階)에 도달한다. 19계(階)는 생사를 해탈하고 성범불이(聖凡不二)의 ‘방생량계’에 진입하는 발판이다. 상계(上界)인 ‘방생량계’는 용과 뱀, 곧 성인과 범부가 둘이 아닌, 활력이 넘치는 ‘용사활지’이다.
이쯤에서 ‘放生場界 龍蛇活地’의 뜻을 다시 되새겨볼 만하다. ‘이생[異生;중생 또는 범부]이 탐닉하고 헤어나지 못하는 18계(界)를 놓아버린 경계에서, 용[龍;성자, 보살]과 사[巳;범부, 중생]과 함께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즉 이곳은 10바라밀을 닦는 보살이 사는 곳이며, 동시에 보살이 있도록 하는 중생이 함께 사는 곳이다.
<유마경> ‘불국품’에서, ‘마음이 맑으면 곧 정토’라고 하여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역설하였다.
“만약에 보살이 정토(淨土)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국토도 깨끗하니라.”[若菩薩欲得淨土當淨其心。隨其心淨則佛土淨]
<육조단경>에서도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 곳에 나려고 하지마는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서 부처의 땅[정토(淨土)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느니라.“[迷人念佛生彼。悟者自淨其心。所以言佛隨其心淨則佛土淨。]
배일호 노래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