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파격, 노벨경제학상이 빈곤의 현장에 눈을 돌리다

2020. 3. 1. 19:06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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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경제학상에게는 ‘만수무강 상’, 혹은 ‘무병장수 상’이라는 별명이 있다. 어지간해서는 젊은 학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이 상의 고령 학자 선호 성향을 드러낸 말이다. 실제 상이 만들어진 이후 대부분 수상자의 나이는 70대였다.

지난해까지 최연소 수상자는 케네스 애로(Kenneth Joseph Arrow, 1972년 수상, 당시 51세)였는데 이는 노벨경제학상이 만들어진 초창기(노벨경제학상은 1969년 제정됨) 때 일이다. 이후 이 상의 고령 선호 현상은 나날이 심해져서 지난해까지 수상자의 평균 연령은 무려 67세가 넘었다. 다른 분야 노벨상 수상자 평균 연령이 59세임을 감안하면 ‘만수무강 상’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올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명의 공동 수상자 중 제일 앞에 이름을 올린 에스테르 뒤플로(Esther Duflo, 1972~)가 47세의 나이로 상을 거머쥔 것이다. 게다가 공동 수상자이자 뒤플로의 남편인 아비지트 바네르지(Abhijit Banerjee, 1961~)와 마이클 크레머(Michael Kremer, 1964~)도 모두 50대다. 실로 파격적인 수상이 아닐 수 없다.  

2019년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 왼쪽부터 아비지트 바네르지, 에스테르 뒤플로, 마이클 크레머.
2019년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 왼쪽부터 아비지트 바네르지, 에스테르 뒤플로, 마이클 크레머.ⓒ노벨위원회

파격은 또 있다. 뒤플로는 노벨경제학상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수상자다. 백인, 남자, 미국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설명됐던 노벨경제학상은 여성에게 유난히 인색했다. 최초의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1933~)이 2009년에야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심지어 오스트롬은 경제학가 아니라 정치학자였다. 그래서 뒤플로는 여성 경제학자로서 처음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아내 뒤플로에 비해 덜 하지만 남편 바네르지의 수상도 파격적이다. 그는 유색인종 출신으로는 세 번째, 아시아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바네르지의 국적은 미국이지만, 그는 인도 출신이다. 또 부부가 노벨경제학상을 함께 수상한 것도 처음이다. 그 동안은 공동 수상은 물론, 시차를 두고도 부부가 경제학상을 받은 사례가 없었다. 다만 부부가 각각 다른 분야에서 상을 받은 경우는 다섯 번 있었다.  

노벨경제학상이 왜 이런 파격을 선택했을까?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세 명의 업적이 탁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뒤플로를 비롯한 세 명은 빈곤 분야 연구에서 ‘실험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책상머리에서 숫자로 가난을 논하는 탁상공론에서 벗어나, 가난한 민중들의 삶 속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50주년을 맞은 노벨경제학상 역사에서 이들은 가난한 민중들 옆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경제학자들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가난에 대한 논쟁들 

빈곤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원조가 빈곤 해소에 도움이 되느냐?”는 주제로 격론이 벌어진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Dambisa Moyo)나 우파 경제학 관점에서 빈곤을 연구한 윌리엄 이스털리(William Easterly) 등은 “원조는 아무 짝에는 쓸모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다.  

심지어 모요는 “원조를 줄여 5년 내에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한 적이 있다. 원조를 해봐야 부패한 독재자들의 살만 찌우고, 아프리카 국가의 경제적 자립성도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반면 모요의 스승인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는 “모요와 이스털리의 주장은 과장됐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원조가 없다면 지금 당장 수 억 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반론한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계에서 매우 유명한 ‘삭스-이스털리 빈곤 논쟁’이다.  

이들의 논쟁은 이런 식이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민중들은 말라리아에 걸려서 많이 죽는다. 말라리아는 모기에 물려서 걸리는 질병이다. 그렇다면 민중들이 모기장을 많이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원조에 반대하는 이스털리나 모요 등은 모기장을 공짜로 나눠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공짜 물건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모기장을 집구석에 처박아 놓는다. 게다가 무한정 제공되는 공짜 모기장은 모기 침투를 막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그물로 쓰이거나 암시장에서 판매되기도 한다. 

반면 삭스는 “그럴수록 더 무료로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이 나눠줄수록 그 중 일부라도 모기장을 설치하기 때문이다. 또 모기장을 그물로 쓴다는 이유로 유료화하면 굶주린 민중들은 돈이 생겼을 때 모기장이 아니라 먹을 것부터 살 수밖에 없다.  

이런 논쟁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통 아이를 많이 낳는다. 그렇다면 많은 자녀를 갖는 것이 빈곤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199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Gary Becker)는 “자녀가 많을수록 더 가난해진다”고 주장한다. 가정에서 쓸 수 있는 예산은 한정돼있는데, 자식이 많으면 교육 예산이 여러 자식에게 분산되기 때문이다.  

반면 자식이 한 명이면, 교육 예산이 그 한 명에게 집중돼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가난에서 벗어날 확률도 높아진다. 베커의 이 논리는 꽤 많은 빈곤국에게 지지를 받아 여러 정부가 산아제한이나 가족계획 정책을 펼치는 근거가 됐다.  

알윈 영(Alwyn Young)이라는 영국 경제학자는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창궐할수록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펼쳤다. 에이즈로 인구가 감소하면 여러 명이 나눠받을 교육을 소수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인재가 더 많이 양산된다는 주장이었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답을 찾자 

그런데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의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궁금증이 떠나지 않는다. “모기장을 원조하면 그물로 쓰인다고? 자식이 많으면 교육수준이 떨어진다고? 진짜로 그런지 확인해 봤어?”라는 궁금증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모기장이 그물로 쓰이는 걸 내 눈으로 봤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실제 그물로 쓰이는 사진도 있다. 하지만 몇 건의 케이스 말고 진짜로 그렇다는 의미 있는 통계가 있냐는 거다. 모기장을 무상으로 나눠주면 도대체 몇 퍼센트가 모기장을 그물로 쓰는지, 또 모기장을 유료화하면 사용 빈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 문제가 해결이 된다.

“자식이 많으면 교육수준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럴 거라는 상상 말고 진짜로 그런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 도대체 자식 몇 명부터 교육수준이 떨어지는지, 한 명을 낳은 집안의 교육수준은 얼마나 올라가는지, 심지어 두 변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기는 한지 등도 직접 조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경제학에서 벌어지는 많은 논쟁들은 현장이 아니라 책상머리에서 이뤄진다. 주류경제학이 그런 학문 아닌가? 주류경제학은 “인간은 이기적 존재다”라는 명제 하나로 무려 200년을 버텨왔는데 진짜로 그런가? 실험을 해보면 인간은 이기적일 때도 있지만 이타적일 때도 있고 협동적일 때도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현장을 누비며 연구를 해보면, 책상머리에서 떠든 것들은 와르르 무너지기 일쑤다. 

뒤플로와 공동 수상자들이 개척한 분야가 바로 이것이다. 원조가 도움이 되네, 안 되네, 책상머리에서 아는 척 하지 말고 빈곤층을 직접 찾아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뒤플로 팀은 전 세계 수 백 곳의 빈곤층을 찾아 그곳에서 직접 실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 현장 중심의 연구는 실로 많은 문제를 해결해 냈다. 

예를 들어 모기장 문제는 이렇다. 직접 수 십 곳의 빈곤층 마을에 모기장을 공짜로도 나눠주고,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10% 할인 쿠폰을 주기도 한 뒤 사용률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접 해보면 석학들의 책상머리 논쟁은 너무나 허무하게 결론이 난다. 실험 결과 최선의 방법은 모기장을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다. 다만 그냥 나눠주지 말고 모기장의 사용법을 충실히 설명한 뒤 나눠주면 모기장 사용률이 극대화된다.  

빈곤층이 자식을 많이 낳으면 더 빈곤해질까? 이것도 현장에 가서 조사를 해보면 나온다. 현장에서 집계해보면 자녀 숫자와 교육 수준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가난한 나라 정부들이 경제학자들의 상상력을 굳게 믿고 산아제한계획을 열심히 추진한 것은 쓸 데 없는 짓이었다는 이야기다.

예방접종을 무료로 할 것이냐, 유료로 할 것이냐 문제도 직접 가서 해 보면 진실이 드러난다. 무료로 할 때와 유료로 할 때의 접종률 차이를 집계하는 것이다. 민중들 속에서 실험을 한 결과 무료로 하는 것과 동시에 접종자에게 콩 1킬로그램을 나눠줄 때 접종률이 가장 높았다. 당연히 빈곤층의 생존율도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래서 뒤플로는 이야기한다. “가난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를 그만 두고 현장으로 들어가자”고 말이다. 가난을 해결하려면 가난의 한복판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경제학의 시선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에 꽂혀 있어야 된다. 숫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뒤플로 부부는 저서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의 말미에 이런 말을 남긴다.

“가난은 수 천 년 동안 줄곧 우리 곁에 있었다. 50년, 100년을 기다려야 가난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면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실행 가능한 방법이 있다.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말고, 좋은 의도를 품은 세계 전역의 수 백 만 명과 함께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무궁무진 개발하자. 그러한 아이디어가 99센트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우리는 가난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척 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고급 자동차 타고 호화찬란한 호텔 학회에서 숫자 몇 개 발표하면서 마치 경제학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허세도 버려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심으로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살피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바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50주년을 맞아 노벨경제학상이 모처럼 감동적인 선택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인류 사회가 가난에 대해 보다 진심을 다한 해결책을 찾는 일에 힘을 모으기를 바란다. 뒤플로에게 영광과 축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