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8. 11:0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0회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1회(유마경47강)
설법제일 담마지나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2회(유마경48강)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3회(유마경49강)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4회(유마경50강)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5회(유마경51강)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6회(유마경52강)
생이 오면 생과 함께 하고
사가 오면 사와 마주 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다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7회(유마경53강)
저도 부처님같이 아뇩다라 샴보리를 얻어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겠습니다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8회(유마경54강)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의 역사로
나찰에게 몸을 던지는 설산동자
*한 게송을 위해 생명 버리는 것을 보라
히말라야 깊은 산속에 설산동자(雪山童子)라는 어린 소년이 크게 발심하고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날 설산동자가 깊은 삼매에 들어 있는데 제석천왕이 형상이 흉악한 나찰로 변해 히말라야 산으로 내려와 동자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섰다. 그때에 나찰은 지난 세상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송의 반을 소리 내어 읊었다.
"모든 것 변천해 항상 한 것 없어[제행무상(諸行無常)] 이것을 이름 하여 나고 죽는 법이라 하네[시생멸법[(視l生滅法)]."
명상에 잠겼던 동자는 이 게송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게송을 들은 동자의 가슴은 무한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 게송에는 그가 찾던 진리가 담겨 있었다. 그는 게송을 읊은 사람을 찾았다. 그의 앞에는 험상궂은 나찰이 날카롭게 번뜩이는 흉악한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자는 생각했다.
'이처럼 거룩한 말씀을 저 나찰은 하지 못할 것이다. 저 나찰이 그 같은 게송을 읊었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날 수 없고 따가운 햇볕에서 찬물이 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도대체 누가 저 거룩한 게송을 들러주었는가.'
그러나 주위에는 게송을 읊었을 만한 사람이 눈에 뛰지 않았다. 동자가 다시 생각했다.
'아니다. 내가 지혜롭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혹시 저 나찰은 지난 세상에 부처님을 뵙고 이 게송을 들어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내 그에게 한번 물어버리라.'
동자는 나찰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존자여, 당신은 어디에서 그토록 거룩한 게송을 들었습니까? 어디서 그 반쪽 여의주를 얻었습니까? 그것을 들으니 마치 봉오리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마음이 열립니다. 존자여, 그 게송은 진실로 삼세의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도리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 게소은 반쪽 여의주처럼 아직완전하지 않은 듯하니 나머지 반 게송을 들려주실 수 없습니까?
나찰은 험상궂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수행자여,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오. 나는 먹지 못한 지가 여러날 되어 지금 말할 기운도 없소. 먹을 것을 찾아 여러 곳을 헤매었으나 구하지 못해 기갈이 아주 심하고 어지러워 그만 헛소리를 한 것뿐이오."
"존자여, 나는 지금 그 반 게송을 듣고 놀라고 기쁜 한편 의심한는 터이니, 부디 나의 의심을 지금 풀어주십시오. 당신이 말한 반 게송은 글로도 끝난 것이 아니고, 뜻으로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무슨 까닭으로 마저 말하려 하지 않습니까? 재물의 보시는 다할 때가 있으나 법을 보시하는 공덕은 다하는 법이 없습니다. 존자여, 그대가 나에게 그 게송을 마저 일러주신다면 나는 일생 동안 당신의 제자가 되어 당신을 보시겠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지나치게 얕은 꾀가 있소. 하지만 자기 일만을 생각하고 남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것을 보니 자비심은 눈곱만치도 없구려, 나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 말할 기운조차 없소."
"존자여, 당신은 무엇을 먹습니까?"
"내가 먹는 음식은 사람의 더운 살이고 마시는 것은 사람의 끓는 피요. 나는 복이 없어 이같은 것만을 먹는데 아무리 구해도 구할 수가 없소.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천신들이 수호하기 때문에 나의 힘으로는 그들을 잡아멱을 수가 없소이다."
"당신이 나머지 반 게송을 말해준다면 나는 그 게송을 듣고 나서 이 몸으로 당신에게 공양하겠소. 존자여, 설사 내가 더 살고 죽는다 해도 진리를 크게 얻지 못한다면 나의 몸은 더 이상 소용이 없소. 필경은 늙어 죽거나 호랑이나 늑대 그리고 날짐승의 밥이 될 뿐이오."
"놀리지 마시오. 당신의 그런 말을 누가 믿겠소. 그까짓 게송 반쪽을 얻기 위해 하나뿐인 자신의 몸을 버리겠다니."
동자는 다시 대답했다.
"누구나 질그릇을 주고 칠보 그릇과 바꾸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지금 보잘것없는 이 몸을 주고 금강 같은 몸과 바꾸려는 것입니다. 나의 이 말은 대범천왕과 제석천왕과 사천왕 모두가 증명할 것이며 천안통을 얻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대승행을 닦아 여섯 가지 바라밀을 구족한 보사들도 증명할 것이며, 시방세계의 부처님께서도 나를 증명하실 것입니다.
"정 그렇다면 나머지 반 게송을 읊어다릴 터이니 잘 들으시오."
설산동자는 하늘에 오를 듯 기뻤다. 동자는 몸에 걸친 사슴가죽옷을 벗어 땅에 깔아 설법하는 자리를 만들고 끓어앉아 말했다.
"존자여,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 원하옵나니 저를 위해 나머지 반게송을 설해 구족하게 하소서."
나찰은 게송을 읊었다.
"생기고 소멸함이 다 사라진 그 세상은[생멸멸이(生滅滅己)] 모든 고통을 떠나버린 대열반의 기쁨이다[적멸위락(寂滅爲樂)]."
동자는 게동을 듣자 환희심이 솟았다 게송의 뜻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나무와 바위 등에 수없이 게송을 새긴 다음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 동자는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 나찰에게 몸을 던지며 말했다.
"간탐하고 인색한 여러 사람들, 또 적은 것을 보시하고 뽐내는 사람은 모두 와서 내가 한 게송을 위해 생명 버리기를 초개같이 하는 것을 보라." [대반열반경]
수메다 행자가 설산동자라는 수행자의 몸을 받아 정진할 때였습니다. 설산동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리의 게송을 들었습니다. 그 게송을 말한 이가 누구인지 사방을 들러보니 나찰만이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입니다. 설산동자는 나찰을 보고 '나찰이 그 게송을 읊었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 날 수 없고, 따가운 햇볕에서 찬물이 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란 어떤 특수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특수한 사람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진리는 우주에 충만해 있으나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또한 진리를 볼 수 있는 길을 알아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설산동자는 곧 자신이 형상에 집착했음을 참회하고 나찰에게 스승의 예를 갖추어 진리를 받들고자 합니다. 설령 나찰이 한 말이더라도 그것이 진리이기만 하다면 따를 용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란 불교라는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불교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길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찰은 배고픔으로 굶어 죽을 것 같아 무의식중에 내뱉은 헛소리라고 말합니다.
"수행자여,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오. 나는 먹지 못한 지가 여러날 되어 지금 말할 기운도 없소. 먹을 것을 찾아 여러 곳을 헤매었으나 구하지 못해 기갈이 아주 심하고 어지러워 그만 헛소리를 한 것뿐이오."
설산동자가 그렇게도 애타게 찾고자 했던 부처님의 법이 굶어 죽을 것 같아 지껄인 헛고리였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려한 안어와 난해한 전문용어로 강의하는 철학교수나 대장경 구절을 인용하고 주석을 달아가며 설법하는 스님, 혹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선사의 말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삶의 의미를 투박한 말투로 신앙 고백을 하는 어느 평범한 보살님의 말 속에서 발견한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화려하게 장엄된 웅장한 법당에서 보살의 수행에 대해 설법하는 스님보다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부처님의 진리와 보살의 보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진리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진리는 권위와 형식을 갖춘 곳보다는 그렇지 못한 곳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진리는 중생의 세계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삶 속에, 그것도 처절한 고통의 현실속에 있습니다.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선재동자가 불법을 구하기 위해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닙니다. 53명의 선지식 중에는 훌륭한 스님도 있니만 대부분 대장장이 . 창녀 . 농부 . 장자 같은 평범한 이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진리를 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목사나 신부 혹은 스님까지도 상직자라고 합니다. 성직자는 신을 믿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대행해 주는 성스러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르므로 스님을 성직자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볼때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스님은 수행자입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입니다. 구도자에게는 어떤 형식적인 이름만의 불교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저건 악마다, 저건 이교도다.' 하는 식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교라는 이름만 기지고 있으면 무조건 옳다는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이런 두 가지 편견이 다 극복되어야 합니다. 구도자는 설산동자와 같이 바른 법이라면 나찰에게까지도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설산동자는 나찰에게 스승의 예를 갖추어 법을 청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쉽게 완성될 수 없습니다. 나찰은 진리를 설해주는 대가를 요구합니다.
"내가 먹는 음식은 사람의 더운 살과 피요."
나찰은 진리를 완성하는 대가로 설산동자의 생명을 요구합니다.
진리는 가만히 앉아서 완성되지 않을 뿐더러, 발견하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라의 성자 이차돈은 승려도 거사도 아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벼슬을 하는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법을 위해 순교를 자청했습니다. 이처럼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사는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중생계의 현실입니다.
설산동자는 진리를 구하고자 몸을 버리는 것은 질그릇을 칠보그릇과 바꾸는 것이고, 금강과 같은 불멸의 몸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몸을 바침으로써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되고 불국 정토가 성취되는 길입니다.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성인들의 서원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진리를 얻은 설산동자는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
"간탐하고 인색한 여러 사람들, 또 적은 것을 보시하고 뽐내는 사람은 모두 와서 내가 한게송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을 보라."
설산동자는 조그마한 선행에 자족하는 우리의 안일하고 자기중심적인 자만심을 향해 날카로운 비수를 던집니다.
보살은 혼자만이 지혜를 얻고 진리를 증득한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살은 모든 이에게 진리를 밝히고 지혜를 얻게 해 그들과 합께 불국 정토에 들고자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이러한 보살들의 역사이며, 이것이 곧 부처님의 역사입니다.
월호스님의 행불아카데미 169회(유마경55강)
사물-
범종-지옥중생
운판-날짐승
법고-들짐승-가죽
목어-물짐승
무의식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뇌는 핑계를 찾고
무의식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뇌는 방법을 찾는다
무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평상시 자주 쓰는 말이다
나는 지금 크고 밝고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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