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9. 14:2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중국불교의 의미. 중국내의 불교가 아닌 중국화된 불교를 뜻함. 인도불교와 다름. 따라서 인도불교와 비교할 필요가 있음. 실제 티벳 쌈예 대사원에서 인도.중국불교의 우월성 논쟁이 있었음.
쌈예<Bsam Yas>대사원 쌈예의 논쟁<794> - 인도불교계와 중국불교계간의 논쟁이 끊이질 않자 양진영의 대표자를 쌈예사원에 불러 직접 왕 앞에서 논쟁을 벌여 최종결판을 내기로 한 논쟁.
인도는 Kamalasila<유가행 중관학파Yogacara madhyamika> 중국은 마하연이 선종을 대표. 모든 것은 연기이므로 주자성의 공이라는 중관학파의 주장을 기본으로해 유가행파 뿐만 아니라 유부와 경량부까지도 비판적 학습을 통해 극복하고자 함. 인도 대승불교 철학의 최후 종합태이자 완성태라 할 수 있다. 인도불교의 승리. 논쟁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과 하면 되나?
쌈예의 논쟁<불교사상적 측면> -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카말라쉴라의 유가행 중관과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마하연의 선사상과의 대결.
티벳은 7C초 통일국가 형성. 당시 당나라 장안까지 처들어간 적이 있었다. 7-8C 강력한 국가 형태.
토번<Thubet> - 7C초 티벳고원의 여러 부족들이 송첸캄포 왕에 의해 하나의 정권으로 통합된 나라로 9C초 와해될 때까지 당나라와 대등한 힘을 가졌던 강력한 국가였다. 티벳에는 인도불교 중국불교가 다 들어갔다. 지는 쪽이 티벳을 떠나라. 자연스럽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인도 쪽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다.
공을 얘기하려면 연기부터 얘기해야 한다. 분필을 예로 들면 분필을 만든 사람<인류학> 재질<지질학>을 거론해야 하고 결국 그 것은 지구와 관계된 문제이고 지구 또한 전 우주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한 먼지 속에 전 우주의 역사가 다 들어있는 셈이다. 인-직접조건-과학적 인과. 연-간접조건-불교적 인과. 망을 거두면 그물 전체가 다 따라 올라온다. 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다 연결되어 있다.
Nagarjuna<용수> - 대승불교의 초조. 인도 제14조이며 공종의 시조. 인도의 대승불교를 연구해 그 기초를 확립 크게 선양했다. 얽혀있다는 얘기는 그물에 있는 어떤 놈도 따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립성>. 달리 말하면 끝없이 변할 때 혼자 떨어져 나만 안 변할 수 없다는 거다<고정성>
연기는 고립성과 고정성을 부정한다. Sva스스로+Bhava존재=자성 실체<Substance>가 없다. 그래서 무고 공<Sunya>이다. 떨어져 저 혼자 고정불변으로 남아있는 것<자성>이 없다는 소리다. 연기=무=공이다. 공자에 매달리면 안된다. 연기와 공을 같은 차원에서 얘기하는 점이 불교의 뛰어난 점이다. 만만한 철학이 아니다. 서양철학의 난해함은 저리 가라다.
인도 대승불교 철학 1.유부 2.경량부 3.유식학파 4.유가행 중관학파.
분필을 예로든다. 유부의 설은 나의 마음<정신 심>이 분필<물질 색>이라는 밖의 대상을 동시에 접촉한 것으로 본다. 이 얘기는 각각 따로 있다는 말이 된다. 자성적으로 있다<불교적> 실체적으로 있다<서양적>. 각각 독립된 2개의 실체가 있다고 보는 서양인이 바로 데카르트다.
1.유부 – 우리의 인식은 외부의 대상과 무색투명한 마음이 동시에 접촉하여 일어나며 따라서 마음이든 대상이든 정신이든 물질이든 그 자체의 존재성<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 주장한다. 이 것은 정신과 물질을 자성적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정신은 사유를 본질로 하는 실체로 물질은 연장을 본질로 가는 실체로 각각 독립시킨 데카르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마음과 대상이 동시에 만난다는 말이 과연 맞는가? 동시에 만나지 못한다. 분필도 나도 그냥 있나? 매 순간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 과학적으로도 분자와 원자 원자핵을 가운데 두고 전자가 돌고있다. 단지 흐름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흘러가기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한 찰나 전의 분필을 본 것 뿐이다. 우리는 뭔가 본다고 하지만 매 찰라마다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날 뿐이다. 분필의 흔적만 본다. 사물 자체를 결코 인식할 수 없다<인식불가능>.
2.경량부 – 인간은 대상이 지나간 흔적만 볼 뿐 대상 자체는 결코 인식할 수 없고 다만 추리를 통해 대상의 존재를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함. 이는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는 결코 인식될 수 없고 단지 감성을 촉발하는 원인으로써 요청될 수 있을 따름이라고 한 Kant의 주장과 비교될 수 있다. 인식의 틀이라는 색안경 벗을 수 있는 안경이 아니다. 혼자만이 아니고 모두 다 끼고 있다. 인간적인 안경이다. 그 놈을 통해서 본다. 개는 개대로 보고 사람은 사람대로 본다. 우리는 겉 껍데기만 본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 마음이 한 찰라 전의 사물 결국 마음이 한 찰라 전의 마음을 볼 뿐이라는 얘기다. 네 마음이 분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네 마음을 본다. 분필은 석회질 덩어리다. 영어로 Chalk라고도 한다. 우리 의사에 의해 이름으로 덧 씌워졌다. 가정일 뿐이다. 순간만 있다 보고 분필이 존재한다 보는 것이다. 결국 있다고 보는 것은 제 마음이 덧 씌워 마음이 지어낸 것을 그 마음이 보는 것 뿐이다. 세상은 오직 마음 뿐이다. 의식<Vijnana> 의식이 지어낸 것<Vijnapti> 통 털어 식 유식 유심이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이 식은 믿을 것이 못된다. 해탈 열반으로 가야한다.
3.유식학파 – 인식이라는 것은 바로 한 찰라 전의 우리 마음 속 의식이며 이런 의식의 부단한 흐름이 무시 이래로 되풀이 되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Husserl이 Noesis<사유: 생각하고 있는 작용> Noema<사유된 것: 그 의식이 만들어 놓은 것>라는 것을 강조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마음 – 지어낸 것만 인정 – 사물. 모두 공한 것은 차이가 없다. 공 그 것도 공하다. 집착할 꺼리가 없다. 반 실체다. Heidegger whitehead deleuze 등의 서양 철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4.유가행 중관학파 – 모든 것이 공이고 그래서 공 또한 공한 것인 이상 사물 뿐만 아니라 그 마음도 역시 공한 것이라고 주장. 이렇게 철저하게 반 실체적인 입장은 하이덱거 들뢰즈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의 탈 실체적인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
유부에서 중관까지 1C-8C, !7C-20C. 발생기에서 1500년의 시차가 있다. 현대철학과 반실체 공의 사유. 데카르트의 인식론 Kant Husserl 17C시작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 - 자아 강화. 주체 – 결국 불교와 만날 수 밖에 없다. 연기니까 공이고 무아다. 인도에서 위 4 학파를 거치며 800년을 왔다. 대승 불교철학은 점차성 절차성이다. 하지만 선불교는 원샷 한방에 끝낸다. 하지만 공부하려면 유부부터 단계를 밟아야 하지 않겠나?
인도의 점수는 한량없는 시간을 지나야 한다. 3아승기겁<Kalpa>의 시간이 필요하다. 40리 바위를 3년에 한 번씩 가서 비단으로 스쳐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가는 시간이 칼파다. 혹은 성안에 겨자 씨 가득 채워 3년마다 하나씩 다 빼낼 때까지의 한량없는 시간을 말하기도 한다. 너무 길다. Asamkhya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 것도 3번이나? 어찌보면 포기한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보살은 지혜 자비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할 때까지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려도 하겠다는 특징이 있다.
인도 대승불교의 특징 – 인도의 대승불교가 깨달음에 이르는 데 수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진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이 지혜만이 아니라 자비와 방편에도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김종욱 교수의 불교의 중국화와 중국의 불교화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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