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중국화와 중국의 불교화2

2007. 6. 9. 14: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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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연 – 중국선사로 처음엔 스승인 대복이 속해 있던 북종계통의 문하였지만 나중에 남송의 신회 밑에서 사사를 받았다고 추정됨. 쌈예의 논쟁에서 중국 불교계를 대표해 Kamalasila와 논쟁함.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신수-대복.혜능-신회> 마하연은 양 계통을 다 이어받았다.

신수 – 북종선의 개조. 50세에 5조 홍인의 제자가 됨. 혜능보다 무려 32살 연상. 황제 부름을 수용하나 의발 전수엔 실패. 박학다식 제반학문에 통달. 북점.

혜능 – 24살. 5조 홍인의 뒤를 이어 중국 선종의 6조가 됨. 일자무식. 황제 부름 불용<정치적 얽힘에서 독립>. 의발 전수는 정통성과 함께 선의 특징인 불립문자의 파격성을 보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독립성>을 대비시키므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의도적이 아닌가? 할 정도로 좀 의심이 든다. 두 사람은 물과 불처럼 도저히 강조하지 못할 사이는 아니었다. 남돈.

 

<득도계>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有<惹>塵埃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받침대 라네. 수시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한 티끌도 끼지 않도록 하세.<신수>

菩提本無樹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有<惹>塵埃 깨달음은 본시 나무가 아니요 맑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으니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도대체 어느 곳에 먼지가 있겠는가? <혜능>

 

혜능은 글을 몰라 받아 적어달라 했다. 이 글을 통해 일자무식도 깔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통성 때문에 남종선은 많은 사람들 손을 거쳤다. 菩提=Bhodhi 깨달음 悟다. 樹에 비교하여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무가 갑자기 열매를 맺을 수 있나? 티끌은 번뇌 망상이다. 먼지를 털어내면 맑은 거울이 드러난다.

 

心性本淨 客塵所染 마음의 성품은 원래부터 깨끗한 것이니 더러워진 것은 나그네처럼 잠시 내려 앉은 먼지에 불과하다. 신수는 교과서를 쓰고 있다. 그래 그럼 진짜 먼지가 뭐냐? 진짜 먼지는 따로 있다 생각하고 털려고 덤비는 그 게 진짜 먼지라는 얘기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고립.고정돼 있는 것은 없다. 이 게 바로 연기고 연기는 공이다. 그러니 집착 소유할 것이 없다. 물화시키는 거다. 털어야지 하는 또 하나의 망상. 수나 대 따위는 원래 없다. 먼지-번뇌-따로 없다. 본래-자심-애당초 먼지 번뇌 없다. 자심 진여본성<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그러한 불성> 자성만 있다.

 

원래 이런 이치는 <한 순간 일시에 한꺼번에 통째로> 돌이켜 보면 된다. 원래자심이 부처인데 왜 밖으로 찾아다니나? 이미 보배를 다 갖고 있는데. 돈오란 한 순간 또는 한꺼번에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헤능은 돈오 신수는 점수다. 오재수유 悟在須臾 깨달음이 잠깐 사이에 있다. 혜능의 돈오는 잘못 생각하면 無修로 생각할 수 있다. 반면 가장 완벽한 修로 볼 수도 있다. 안 닦는 無修가 아니다. 순간순간 찰라찰라 깨친 그 내용이 매 순간 생각과 행동 속에 반영돼 드러난 것이다. 무수가 아니라 가장 완벽한 수다. 신수 혜능 모두 존경해야 한다.     

 

인도불교 - 점오. 과정성=계단 오르기. 중생을 다 구제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먼지라도 털어내야 한다. 空亦復空 공 역시 공일 뿐이다. 자비심이 강조 된다.

중국불교 – 돈오. 본래성=장대 높이뛰기. 시간상으로 찰라지간 마음 하나 돌린다. 심성본정 객진번뇌라며 중국불교가 자신감을 준다. 장대 높이뛰기 올라갔다 다시 떨어져 착지한다. 다시 일상과 현실로 돌아간다. 혼자 뛴다 혼자 간다.

 

모든 것은 공하다. 공역시 공일 뿐이다. 부정의 Process만 있다. 공의 Process만 있다. 공화과정이다. 하지만 공은 허무가 아니다. 공이까 다 생긴다. 그래서 진공묘유다. 만물이 다 공하다. 공의 원리에 의해 만물이 생긴다. 공의 이치도 있으니 진공묘유 묘하게 있다 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부정을 거친 긍정 단순긍정이 아닌 대긍정이다. 다시 이 땅으로 착지한다. 초월도 좋지만 초월을 통해 다시 착지한 卽事而眞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바로 참이라는 것이다. 현실이란 우리 일상 그대로의 현실이다.

 

내 마음이 어디 다른 데 있나? 1.山是山 산은산 - 소유 집착하는 實有의 산이다. 가짜 산이다. 2.山不是山 산은 산이 아니다 – 수행 후의 무망심 무심지심의 산이다. 소유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닌 被有의 산이다. 3.山袛是山 산은 여전히 마찬가지로 그렇게 산이다 – 산은 어디 있나? 여여하게 있는 그대로의 산이다. 그렇다고 없나? 완벽한 현실주의다.

이상 김종욱 교수의 불교의 중국화와 중국의 불교화 강론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