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9. 14:2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식사상
加行位 1 – 발심을 더욱 더 열심히 하는 것<27송>. 現前에 立少物하야 謂是唯識이라 하면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입소물은 적은 물건이라도 한 가닥 세워졌다. 하지만 그 것을 유식성이라 한다면 이 사람은 아직 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실로 유식에 주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수행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4심사관 – 제법의 名 事 自性 差別에 대해 심사 관찰함을 말한 것으로 이는 유식지관을 닦는 입문적 관법이다. 4심사관을 줄이면 관법이다. 불교가 가르치는 것은 전부가 관법이다. 시각을 갖고 보지 않는 것이 관법이다. 텅빈 마음 내가 가진 마음이 없으니까 실상을 보게 된다. 관법을 하면 소취가 먼저 없어진다. 내 시각에 맞춰 보니 사물에 집착한다. 능취 소취 둘 다 없어졌을 때 4여실지를 얻는다. 관법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 지혜가 성취되니 주관적 객관적인 것이 다 끊어졌다. 관법수행을 하니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집착이 끊어졌다. 관법이 바로 지혜로 바뀐다.
4如實知 – 여실이란 분명한 것 틀림 없는 것. 수행자가 4심사관을 닦음으로써 4여실지를 얻고 4여실지를 얻음으로써 유식실성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4관4지는 유식을 수행하는 기본방편이다.
1.명심사관 –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중생 축생 사물은 모두 명칭이 있으나 명칭은 가립된 것으로 사물의 본체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중생은 항상 명으로 인하여 집착을 일으켜 희로애락의 정을 생하고 서로 상쟁상해한다.
태어난 사람은 녹이 많고 적을 뿐이지 저 먹을 건 갖고 태어난다.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나오게 하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이치가 불분명하면 사물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物各有主 – 만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그 주인한테 가게 되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살기 고달퍼도 죄는 안지었다. 요즘은 가지면 주인이지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만들어 놓고 죽인다. 그래야 세상을 이끄는 위인들이 많이 나온다. 수행자는 유가무실인 명에 대하여 응당 심사관찰하여 그 것이 공임을 깨달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작사 작위 – 사리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인의예지 도덕성 이런 덕목이 없이 정치를 하니 비운 불행이 온다. 사리에 대한 덕목이 없다.
2.사심사관 – 事는 作事 作爲의 뜻으로 사물을 가르킨다. 5온 12처. 산 하천 사람 짐승 집 기구 결혼 상례 농업 공업 등은 모두 사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은 모두 인연소생이고 유식소현이어서 인연과 식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자성이 존재하지 않고 찰나에 변하므로 당체가 곧 공이며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허망하게 변현된 사에 대해 심사관찰하여 그 외형적 가상에 미혹되지 않는다.
상황에 집착하지 않으니 고통이 없다. 사람은 누가 뭐래도 내가 너보다 낫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3.자성심사관 – 자성은 본래로 무소유며 필경 공이다. 오로지 허망한 분별만이 있을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제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심사관찰하여 허환의 집착을 여의는 것이다.
4.차별심사관찰 – 차별이란 명과 사의 갖가지 차별상을 말한다. 명의 차별에는 음과 의가 있고 사의 차별에는 대소 방원 고저 선악 유루 무루 등이 있으며 또한 생주이멸의 부동한 과정은 끝없는 차별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행할 때 제법의 차별상에 대하여 심사관찰하여 모든 차별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행위 2 – 나도 내 것이 아닌데 어디 집착하나. 실성을 깨달으니 집착이 끊어진다. 이 세상 어떤 상황에도 물들지 않고 동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얻은 명예 진리 재물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만든다. 이대로 수행하면 이 세상 그대로가 극락이다.
장자도 말했다. 사람이 진흙 속에 살라고 하면 바로 풍이 들고 습한 기운으로 병들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미꾸라지는 그러냐? 불 땐 방이 좋다고 미꾸라지 이불 덮어 재우면 미꾸라지가 좋아하겠나? 이 것이 차별이다. 원숭이는 높은 나무만 올라가면 좋아 한다. 왜냐고? 지 세상이니까.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개 기르면서 동물애호 한다고? 하지만 동물애호가가 사람 구하는 건 못봤다. 다 거짓말이다. 동물은 그냥 놔두는 게 저에게 이롭다. 모든 세상은 자기 세계가 있는데 인간은 너무 간섭한다. 그 이유는 차별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일반 동물애호가는 동물애호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만족 때문이다. 차별에 대한 이치를 완전 터득한 차별심사가 없어진 대지혜인만이 온갖 동물 다 길러도 된다.
4여실지를 얻는데 4단계가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9층 탑도 땅에서부터 올라가야 한다.
4선근 – 난위. 정위. 인위. 세제일위 이 4단계를 거쳐 깨달아진다. 사물의 이치를 참구하고 참구해야 명에 대한 이치가 타결된다. 사도 마찬가지다. 분명한 뒤에 여실지가 된다. 자성이 무성을 알려면 4선근의 단계를 통해 깨닫게 된다.
4가지 삼매<선정> - 暖位<명득정> 頂位<명증정> 忍位<인순정> 世第一位<무간정>
명득은 선정의 이름으로 명은 무루적 지혜 광명이며 난성에 해당된다. 한 문제를 가지고 푹 빠진 경지니 광명이 일어난다. 광명이 더욱 증장된 자리가 정위다. 즉 전 송의 난위인 광명 지혜를 증장시킨다는 뜻이다. 명증은 선정의 이름으로 광명이 증장하고 지혜가 증장한다는 뜻이다. 인순은 도장이 찍어졌다. 시차의 계합이 완전히 이뤄졌다. 계합이 이뤄진 자리는 역이 없다. 이 세상 모든 이치에 수순한다. 왜 인 자냐 하면 반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간은 선정의 명칭으로 見道位에 이르고 중간에 끊어짐이 없으므로 무간정이라 한다. 틈새가 없다.
명 자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관찰을 했으니 모르겠나? 이 과정을 거쳐야 다듬어진 인격체가 이뤄진다. 이런 수행을 거친 사람은 3일간만 같이 살아도 평안을 얻어간다. 하는 행위가 다르다. 말로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매사에 이런 일만 반복하니 물어 볼 필요가 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