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9. 14:3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산업주의: 기계화 공업화<기계.공업 생산성.생산력 향상.발달> 물질적 부의 무한증대 추구 – 경제발전척도.
산업주의의 생산성 생산력 실현방식에서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나온다.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정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이란성 쌍생아로 배란은 같지만 2개의 난자에 2개의 정자처럼 엄마가 같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산업주의에서 야기된 이념들이다.
자본주의: 생산성 향상 – 생산수단 – 개인소유 – 시장 - 자본경쟁
공산주의: 생산력 발달 – 생산수단 – 사회공유 – 시장 – 국가 계획통제
생산수단은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구분하는 핵심용어다. 생산을 하려면 <도구 기계 원료 자원 토지 건물 + 노동력>엄청난 자본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본가가 등장한다. 생산물이 생기면 이윤이 생기고 자본가는 자본을 투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윤을 독식한다. 그러다 보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이는 혁명의 원인이 된다. 자본가의 독식 사회적 공유로 하자 그러면 이런 모순이 없어지고 더 잘 살게 된다는 이론이 공산주의다.
러시아 혁명 – 자본주의:공산주의. 러시아 혁명의 본질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투쟁이라기 보다는 농업주의 기득권 세력과 산업주의 혁명세력간의 싸움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자본주의 자 자도 모르던 시대였다. 미국의 남북전쟁도 사실 노예해방은 명분일 뿐이고 남의 농업과 북의 산업주의의 싸움이다. 북이 승리하여 미국의 산업주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남쪽이 승리했다면 오늘의 미국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자본주의<Capital> - 자본에 대한 이윤의 추구를 뜻하며 핵심은 개인적 소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에 대한 이윤의 추구<이윤> – 자율경쟁<자유> – 사유재산<소유>
이는 16-18C상업을 통한 이윤 추구의 상업자본주의에서 19-20C 산업자본주의<공산주의=정확히는 산업공산주의>를 통해 오늘날 정보를 지향하는 탈산업주의 시대로 발전한다.
자본주의 핵심하면 소유다. 그런데 불교하면 제일 먼저 무소유가 생각난다. 무소유는 언뜻 들으면 재산보유를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무소유는 소유의 근본성격 <무자성.공성.연기성>을 말한 것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건전한 자본주의를 말한다.
무소유: <A-bhava 자성적 존재 부정=무자성> A-vidyamana<실체적 존재 실유에 대한 부정>으로 모두 無自性 空으로 이는 무소득 무소착 무소주를 말한다. 얻을 게 없고 집착할 게 없고 머물 것도 없다. 연기다. 삼라만상이 다 그렇다.
무소유 - 단순히 재산소유의 부인이 아니라 소유재산을 포함한 일체 사물의 근본성격에 대한 확인이다. 일체법의 근본성격은 모든 것이 무자성의 공한 것이며 그렇게 공한 것은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한 것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보는 소유의 근본성격도 무자성의 공성과 상호의존적 연기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소유 재물을 갖지 말라. 빈곤을 말하나? 부처님은 정당한 소유는 좋다. 자신과 가족을 평안하게 한다. 하지만 거기 집착하고 미혹하면 근심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소유는 연기성이고 공성이다. 연기성은 모두 상호의존<신용관계>돼 있으니 상호존중<보시>하라는 것이다. 공성은 무자성<무집착 미혹 근심>이고 비실체<탈산업주의. 정보>라는 것이다. 지혜롭고 정당한 소유는 인정한다. 하지만 공평하게 분배해서 조화를 이루라는 말이다.
1.산업사회: 실물재산<Real property>- 가시적 + 유형 + 물질실체가 있다.
2.탈산업 사회: 정보재산<Info-prperty> - 비가시적 + 무형 + 물질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으니 비유비무다.
불교 자본주의 – 다르마<법Dharma>에 따른 정당한 소유와 상호의존의 신용성 그 것에 함축된 상호존중의 분배성 재산 자체에 대한 무집착성 소유대상의 비실체성 등을 핵심으로 한다.
경전을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은 법dharma에 따라 재물을 구한다. 법에 따라 재물로 자기를 안락하게 만들고 또 강하게도 만든다. 그리고 그 것을 분배하여 복을 짓는다. 그러나 재산을 탐하지 않고 재산에 미혹되지도 않으며 죄악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재물에 대한 근심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어 즐거움을 누린다>
기독교 자본주의<Max Weber 1864-1920> - 독일의 사회과학자<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근대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발생은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Calvinism의 교리 하에서 금욕과 근로에 힘쓰는 종교적 생활태도와 관련시켜 설명했다.
Calvinism에 Predestination 예정설이 있다.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는 설이다. 신께서 이미 구원을 정해 놓았다는 설이다. 그렇다면 나는?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만약에 구원받을 선한 양이라면 사업에
성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업성공은 구원의 표시며 소명완수였다. 소명은 Berufung 직업은 Beruf로 Rufen부르다가 어원이다. 기독교적 시각으로 보면 직업은 천직이다. 금욕주의는 부의 저축을 저축은 자본의 축적을 가져왔다.
유교 자본주의 –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의 산업화 성공. 동아시아 가치=유교 자본주의 성공을 가져왔다. 민은 사를 따른다는 국가의 정책적 지도력이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이뤘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IMF를 맞자 유교 자본주의도 문제가 있다 진단하게 된다. 그러자 유교 자본주의는 국가의 도덕적 지도력. 도덕정치에 대해 다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불교 자본주의 – 베버는 서양은 세간내적 금욕주의가 상업발달과 자본주의를 가져왔다 말하며 불교를 비판한다. 동양은 여전히 신비적이고 탈속적으로 상업발달을 저해한다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서영시의 중국근세종교윤리와 상인정신이라는 책을 통해 전혀 그렇지 않다 주장한다. 불교는 견성성불을 말한다. 不離世間覺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다. 또한 금욕 그 이상의 금욕을 말한다. 일일부작 일일불식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이는 근면생산을 말하고 있고 실제 당송시대의 상업발전을 가져왔다.
유교윤리는 벼리 강이다. 통제-위계질서-수직-폐쇄로 산업사회 질서엔 맞지 않는다. 불교윤리는 상호의존의 인드라 망으로 상호존중-수평-개방체제로 오늘날의 탈산업사회 정보화시대에 맞는다.
기독교 유교 자본주의<발생론적 접근> - 기독교 자본주의와 유교 자본주의는 발생학적인 설명에만 주목하고 있고 분배의 정의라는 자본주의 내부의 치명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유와 분배의 조화를 추구하는 불교적인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이상 김종욱 교수의 아편전쟁과 개화파6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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