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9. 15:2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죽어 지내야 할 재를 살아 지내는 것이 예수재다. 살아 업상을 점검하는 것이다. 자신의 업을 한번 돌이켜 봐라. 우린 지금 생사의 길에 살고 있다. 이 말은 생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참 삶을 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이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방법일까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식의 55심소 중 5별경심소에 욕과 승해심이 있다. 우리는 끊임없는 욕구를 가지고 산다. 선한 것에 대한 욕구를 가지면 선욕이 되며 악한 것에 대한 욕구를 가지면 악욕이 된다. 누구나 다 잘 살고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르면 또 생긴다. 끝도 없다. 하지만 성불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욕망이 사라진다. 마음만 내면 그런 선한 욕구심 때문에 성불의 자리 또한 가질 수 있다.
승해심은 더 잘 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인류는 이 때문에 끊임없이 향상 중이며 아직 진행 중이다. 남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것이 보살도다. 이 세상 가장 잘 사는 방법은? 극락 갈 생각 말고 지옥에 안 가는 거다. 그러면 이 세상 제일 잘 살다 가는 것이다. 공자의 핵심사상은 인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도달해야 하겠다 해서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호학을 통해 인의 자리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공자는 나는 오직 배우기만 좋아할 뿐이라고 말했다.
모르는 것만 배우는 것이 호학인가?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려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호학이다. 상수 제자 안현에게 극기복례를 말한다. 자신을 극복하고 예의를 지킬줄 알라. 불천로 화를 남에게 옮기지 마라. 화가 치밀어 올라와도 결코 남에게 표시하지 말라. 그 것이 극기다. 불교에도 화내지 말라는 탐진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극기하려면 탐욕을 멈추고 화내는 것을 멈추고 고집부리는 것을 멈춰야 한다. 훨씬 구체적이다. 이 것이 바로 중국 사고방식과 인도 사고방식의 차이다.
복례는 불이과다. 허물을 2번 다시 반복하지 말라는 소리다. 불교는 탐진치를 끊는 것이다. 극기보다 탐진치 끊는 것을 극기로 삼는다면 훨씬 쉬워진다. 극기하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다. 참회하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다. 예수재도 지금 지내는 것이 잘 죽는 방법이다. 지금 잘 살면 나중에 설령 지옥에 가도 걱정이 없다. 내생 걱정하지 말고 금생만 잘 살라. 8정도 6바라밀 잘 사는 방법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만 가지고 실천하라. 수 없는 선현들이 이 세상을 바꿔 주었다. 자기가 이루고 이 세상을 바꾸신 분들은 모두 모셔야 한다.
깃발을 든 사람이 있어야 그 뒤에 인재가 나온다. 송나라 1030년 인종 황제는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권학문에서 배워라 배워라 배우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했다. 이 세상 쓸모없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했다. 한 사람의 깃발이 이렇게 무섭다.
권학문 - 풀과 나무에 견주어도 풀엔 영지가 있고 나무엔 춘이 있으며 만약 새와 짐승에 견주어도 새엔 봉황이 있고 짐승엔 기린이 있으며 만약 똥과 흙에 견준다 해도 똥은 오곡을 살찌우고 흙은 백성을 기른다. 하지만 세상 온갖 사물 중에 배우지 않는 이는 쓸모가 없다<인종>.
당시 범희문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어머니는 자신을 데리고 재가를 했다. 하지만 그 집도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괜히 근심 하나만 더 늘었다. 성도 새 아버지 성을 따랐다. 어느날 어린 놈이 관상쟁이에게 물었다. 제가 이 다음에 재상이 되겠나요 못되겠나요? 관상을 보니 안된다. 그러면 한의사는 되겠나요? 깜짝 놀랐다. 어찌 재상 말고 중인계급인 한의가 되려 하는가? 재상이 되야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관상이 안 된다니 한의 밖에 더 있나요? 하지만 만상의 얼굴이 심상만 못한 것이라 했다. 이런 역경 속에 인물이 나온다. 그는 승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장행거는 무관이다. 범희문을 만나 학문을 권장 받았다. 이 권장 한 마디에 무관을 때려치운다. 이후 장행거로부터 위대한 주자사상이 나온다. 아무리 못된 이도 수양하면 바뀐다. 일체 중생이 다 성불할 수 있다 부처님은 설하셨지만 잘 모른다. 어떤 이는 독침에 불과금이라. 홀로 잠 자는데도 이불에게 안 부끄러워야 한다 했다. 이 얼마나 생각하고 조심하며 사는 말인가? 어떤 이는 얼마나 가난하던지 반딧불을 모아놓고 글을 읽었다. 여건 좋은 사람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이루는 것은 절대 환경에 있지 않다. 진짜 이 세상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이 이 땅에 나와야 한다. 그래야 가까운 일본 중국이 우리를 무서워 한다.
이상 혜거스님 예수재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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