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문 불제자 모용진

2007. 6. 9. 14: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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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묘 전실방 동수부부 초상<357>동수 동수부인의 초상화. 앞이 좁고 뒤가 넓은 묘. 동서30m. 6m 방이 3개 있는 전실. 벽면 가득 초상화 그림. 동수묘 전실 서쪽 방 입구<357>동수묘 이전엔 생활상을 담은 소재를 벽화로 그린 적이 없다. 불교적 요소 가미. 이런 벽화를 그리는 자체가 불교적이다. 불도징 310년 중국 들어옴. 1만 제자 양성. 348년 돌아감. 동수 12년 뒤 출현 고구려 벽화의 시원이 됨. 모습은 부처님 정좌한 자세. 돈황벽화 그린 서역기법. 의복에 음영이 있다.

 

돈황 막고굴 435굴 서벽중앙 백의불<5C 중기>. 동수부인 초상<357>. 여사잠도부분<4C>여인네 머리 모양. 서역 기법. 불교와 깊은 관계 추측. 동수묘 전실 동쪽 방벽면 방아<357>항아리 우물 등 당시 생활하던 장면 그대로 그림. 동수묘 부엌<357>외양간. 동수묘 뒷방 동쪽벽 행도<357>횡렬 종대. 수레 탄 동수 모습. 수많은 재물도 가져와 그런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불교의 불전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덕흥리 고분 평안남도 덕흥리 고분 전경<408>1976 12월 하수도 공사 중 발견. 78년 알려짐. 덕흥리 고분 전실 모용진 초상<408>선비족 성씨 2. 공손씨 모용씨.

모용진 묘비명<408>석가모니 불제자. 이 이야기를 제일 첫머리에 써 놓았다. 불제자다. 중국은 불교가 전해진 뒤 100년 정도 지나 비로소 일반 대중이 믿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문화 충격을 유교로부터 받았다. 바로 불교를 믿진 않았다. 과거 벼슬명 나열하면서 제일 먼저 고구려 벼슬명부터 나열. 광개토대왕 시절 405년 경 요동성을 확실히 영토로 삼았다. 좀 더 살았다면 서진을 했을 것이다. 유주 13군 태수내조도<408>태수 알현 장면. 유주는 현재 요동. 당시 고구려는 도지사 격인 13명의 태수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모용진 -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17<407>기사에 의하면 북연 왕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는 고구려 사람으로 고양씨 후손이기에 성을 고로 하였다. 모용보가 태자로 삼아 모용이라는 성을 주었다. 대동강 하류 남포에 자리잡은 덕흥리 무덤의 주인은 유주자사 모용진으로 영락 18<408>에 죽었다. 영락은 광개토대왕 년호.

 

즙안 장군총 옛모습<414>고분 벽화와 전혀 다른 무덤 양식. 거대 규모. 7단의 피라미드 형태. 3단에 시신 안치. 우리 민족은 돌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 기본 형태다. 높이 13.5m. 스투파 대개 14-5m 직경 35m 정도 크기로 스투파적 발상을 가지고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즙안 장군총 새모습<414>그 위에 목조 건물을 지은 흔적이 있다. 장수왕 427. 313년 미천왕 낙랑지역 영토확정. 태수 임명 요동지역 다스림. 미국문화는 일본 통해 들어오듯 중국문화는 한국 통해 일본에 흘러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원경 아들 장수왕이 세움. 높이 5.4m 1 1.5m 크기로 무덤 근처에 위치. 중국 대륙엔 이런 규모의 비가 없다. 우리 민족의 돌 다루는 특성과 재주. 생긴대로 그대로 자연스럽게 글자를 새겨 넣었다. 중국인 일본인 같았으면 표면을 다 깎은 뒤 썼을 것이다. 글씨 한 자 10cm 크기. 광개토대왕비 탁본. 현재 우리가 쓰는 해서체로 고해풍의 글씨. 중국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자기들 잃어버린 문화를 우리가 그대로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석가문 불제자 모용진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