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상에서의 마음공부

2007. 6. 9. 15: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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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문명의 이기는 다 서양에서 왔다. 서양인은 겉으론 겸손한 척 하지만 속으론 동양인에 대한 우월감이 강하다. 사실 서양인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 그런 지식의 양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한 원인이다. 양과 질에서 동양의 학자들이 따라올 수 없도록 공부한다. 서양의 학자들은 매우 지성적인 특징이 있다. 우리 처럼 종교에 맹목적으로 집단 발광하는 것은 이해를 못한다. 오히려 유치하게 생각한다. 지성은 왜 중요한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동물은 타고 난 본능에 따라 생존한다. 인간도 본능은 있지만 그 컨텐츠가 취약하다. 그런 부족한 본능을 대신해 신은 인간에게 지능을 주었다. 지능은 심리학적 용어이고 지성은 철학적 용어다. 이 외 인간이 가진 능력 중 언어능력이 있다. 동물도 있다. 벌을 수 십 년간 연구한 학자에 의하면 벌은 태양을 중심으로 날개 횟수와 각도를 통해 다른 벌들에게 꿀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한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동물의 신호와 다르다.     

      

언어활동은 인간에게 중요하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개념을 익힌다. 어려서 개념형성이 안되면 사물을 이해하지 못한다. 개념이 정립된 수준만큼 세상을 이해한다. 언어는 약이다. 하지만 개념을 초월한 부분은 이해할 줄 모른다. 이런 면에서 언어는 약이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이 것이 선이다 하면 나머지는 악으로 규정한다. 고정관념은 이렇게 배타적이 된다.

 

꽃 새 종이 개념을 정해버리면 이원법적으로 보게 된다. 종이냐 종이가 아니냐? 단세포적으로 분별해 판단한다. 판단 주체가 판단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를 중요시 한다. 판단적 지식은 분별심이다. 모든 것을 명사화 시킨다. 그래서 서양 말은 명사가 너무 다양하다. 서양인은 모두 개념을 정해 세밀히 쪼개고 판단해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한다. 기독교 최후의 심판도 판단이다. 개념이란 대상을 정확히 내 것으로 만들었느냐가 중요한 관점이 된다.  

 

휴머니즘 과학기술 서양의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의 가장 밑 뿌리엔 개인의 이기심과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인간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제조자 입장이다. 필요한 것은 만들어 쓴다. 이 사고방식의 근저엔 나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있다. 그런데 이 런 생각이 문제인 것은 도덕적으로 세상이 맞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려 든다. 그래서 서양엔 혁명이 많았다. 제조적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서양철학은 무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체계적인 사고를 적용시킬 수 없었다. 전혀 개념이 안 잡혔다. 또한 무는 기독교의 신의 존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소유가 불가능해 거의 악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했다. 소유도 제조도 아닌 단순한 허무로 무를 봤다. 그래서 동양과 달리 죽음을 형벌로 본다.

 

중생은 삶을 늘 소유로 생각한다. 오욕에 의해 늘 보기 때문에 채우려 한다. 안 채워지면 분노를 일으킨다. 만약 1시간 뒤 내가 죽는다면 그래도 소유를 생각할까? 예수재는 삶을 바꿔줄 수 있는 약이지 형벌이 아니다. 형벌이라면 미리 형벌은 왜 받나?

 

아기의 조그만 손을 볼 때의 마음은 부처다. 그 순간 만큼은 세간 생각이 거의 없다. 뭘 해야지 하는 탐욕의 마음이 없다. 그러나 기분 나쁠 때 보면 모든 것은 어디로 가고 나란 것만 강조된다. 삼독심 나란 생각이 없을수록 부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서양사상은 나는 나라는 개인주의 아니면 전체주의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야 한다. 개인은 소도구에 불과하다. 이 주의도 문제다. 부분은 소유가 가능하나 전체는 소유가 불가능하다.          

 

데카르트는 14C 하이데거는 20C 독일의 신비주의 철학가들이다. 데카르트는 카톨릭 도밍고회 수사였다. 중심적 스승 요제프 마이스트로 불렸다. 전통 카톨릭 사상과 너무 달라 이단으로 몰려 10차례 재판 끝에 사후 파문 당했다. 하지만 서양의 새로운 스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만물은 신으로 가득차 있다. 장미 꽃도 굼뱅이도 개미도 새도 하찮은 조그만 피조물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속에 신이 가득 차 있는데 무슨 설법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하고 말했다.

 

신은 우리 마음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다른 곳에서 찾는다. 사실 신을 떠난 것은 우리다. 신은 이런 방식으로 만물을 창조했다. 그 속에 머물기 위해. 신은 시스티나 성당의 미케란젤로의 천지창조 벽화에 그려진 전지전능한 할아버지 모습으로 높은 곳에 계신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바로 제조자적 사고방식이다. 신이 타동사적으로 만물을 창조했다면 목적만으로는 설명 안되는 불합리성이 있다.

 

만물은 다시 보내고 받아 들인다. 본성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교는 그 것을 공으로 본다. 공은 왜 중요한가? 공은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는다. 소유는 전시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소유는 한정돼 있기 때문에 언젠가 없어진다. 무한하게 보여주는 것은 공 밖에 없다. 무고갈 무진장의 상징이 공이다. 원효는 공과 불공을 동시에 봐야 한다고 했다. 진공묘유다. 모든 피조물들은 무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는 14세기에 벌써 이런 생각을 했다. 동서철학을 압축하면 결국 2가지다. 소유론적 사고와 우주는 신이고 신은 무와 다를바 없다는 해체론적 사고다.                       

 

맨날 만나서 세속적인 돈 버는 얘기 골프 얘기 재미가 없다. 매일 만나도 새로운 사람이 있다. 한 번에 다 드러난 사람은 금방 싫증이 난다. 뭐 더 볼 게 있나? 인간의 아름다움도 정신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불교가 왜 좋으냐면 나를 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상 김형효박사의 서양사상에서의 마음공부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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